•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4) 중추원
  • (4) 추신의 기능

(4) 추신의 기능

 승선이 중추원의 관원이면서도 따로 승선방에서 집무한 데 대하여 상부구조인 추신은 본원에서 중추원 본래의 임무를 수행하였다.≪高麗史≫백관지에 보이는 중추원 기능 중 출납·숙위·군기지정 가운데 승선이 출납을 맡았다면 추신은 군기의 일을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중추원은 軍政을 담당한 송의 추밀원제를 본딴 것이므로 고려에서도 군기지정을 관장하였다고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의 중추원이 수행한 직능을 보면 이런 군기와는 무관한 것이 많다. 목종조 김치양의 난 때 국왕측에 중추원 관인이 여러 사람 관여하였고 중대성 개편에 西北面都巡檢使 康兆, 副都巡檢使 李鉉雲이 그의 장·차관이 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때의 중추원은 무력을 가진 군정기관의 성격이 있지 않았나 추측되지만 중대성이 파해진 후부터는 그런 기능이 보이지 않는다.≪高麗史≫에 보이는 중추원의 구체적인 업무는 궁내의 貢物, 內府文書의 보존, 封爵·立府의 의전, 죄수의 사면, 軍目靑冊의 보유, 그리고 궁내 숙위자의 점검, 국가 제사의 與祭官의 差定, 燃燈·八關會 행사의 관장 등이다. 이것은 중추원이 궁중 內府의 모든 일을 관장하고 儀注·典章 등 예식에 관여하여 禮司와 같은 직무를 행사하였음을 보여준다.0082)邊太燮, 앞의 글, 73∼75쪽. 朴龍雲도 똑같은 견해를 발표하고 중추원은 軍政에 관여한 것같지 않고 의례를 집행하고 궁중 서무를 관장하는 것이 큰 임무였다고 하였다(朴龍雲, 앞의 글, 130쪽).

 그런데 고려 후기에 이르러 중추원은 군정을 관장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內府·典章·儀■ 등 예사에 가까운 기능을 가졌던 중추원(樞密院·密直司로도 개칭)이 비로소 軍政·兵機의 군사적 기능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공민왕 때 萬戶府의 군목청책을 추밀원에 納藏하였고0083)≪高麗史≫권 111, 列傳 24, 柳濯. 같은 공민왕 23년(1374) 밀직사로 하여금 空名의 千戶牒·百戶牒을 수여케 한 것으로 알 수 있다.0084)≪高麗史≫권 83, 志 37, 兵 3, 船軍 및 권 113, 列傳 26, 鄭地. 고려 후기의 중추원이 군정을 담당하였음을 가장 명확히 증명하는 것이 공양왕 원년(1389) 鄭道傳이 쓴<新作都評議使司廳記>이다.

국가는 門下府를 설치하여 理典을 관장케 하고 三司를 설치하여 錢穀을 관장케 하며 密直을 설치하여 군무를 관장케 하였다(≪三峯集≫권 4, 記).

 이것은 고려 말의 밀직사가 군무를 관장한 군정기관임을 명시한 것이다. 조선건국 후 중추원이 병기·군무를 관장한 군사기관이었음은 고려 말의 이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에 중추원이 군정기관으로 화하였는데 그것이 언제 어떻게 변하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아마 元에 굴복한 충렬왕 초에 모든 관제가 개편되어 추밀원이 밀직사로 바뀌고 도병마사도 도평의사사로 승격되면서 정무를 담당한 첨의부에 대하여 군무를 관장한 밀직사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0085)朴龍雲도 역시 忠烈·忠宣王代로 추정하면서 그 중에서도 密直司를 陞秩하여 僉議府와 함께 양부로 같이 칭한 충선왕 2년설을 제시하였다(朴龍雲, 앞의 글, 131∼132쪽). 특히 도평의사사의 기능 강화는 6部의 허설을 초래하고 이것이 병부(軍簿司)에 대신한 밀직사의 군사적 기능의 강화로 나타났다고 짐작된다.

 중추원이 군기의 일을 관장하였다고 하는데 이 「軍機」란 軍國의 기밀 또는 기무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宋史≫職官志에 추밀원의 기능을 “軍國機務·兵防·邊備·戎馬의 정령을 관장한다”고 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군기지정에 대한 설명 조선초 定宗 2년(1400)에 臺省이 上 章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이에 따르면 고려의 군령 체계는 재상의 발령권, 摠制의 발병권, 諸衛將軍의 掌兵權으로 상하가 서로 유지되었는데 邦治·軍國의 일을 맡은 성재가 발령자이고 군기를 관장한 중추관이 곧 총제로 발병자이며, 府兵을 관장한 제위상대장군이 장병자였다. 즉 재상(성재)이 왕명을 받들어 명령을 내리면 중추원이 이를 받아 장병자인 제위상대장군에게 발병하게 하였던 것이다. 과연 고려에서 이러한 군령 계통이 잘 짜여져 실천되었는지는 확언하기 어려우나 고려 후기에 중추원이 군무를 장악한 병권의 소유기관이었음은 사실로 여겨진다.

 그러면 충렬왕대 이전에 중추원이 군사적 기능을 갖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의 중추원이 군정을 담당한 송의 추밀원을 본땄던 만큼 당연히 군기를 장악해야 할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內府, 禮司의 일을 보는 기관으로 행세하였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역시 고려 정치제도의 전반적인 성격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고려는 송과는 달리 3성·6부가 정상적인 기능을 행사하여 병부는 군사행정 기구로서 건재하였으며, 또한 도병마사가 주로 양부재추로 구성되어 군사, 변방의 일을 회의 결정하는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틈바구니 속에서 중추원이 군정·병기의 기능을 행사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중추원의 추신은 재추(재상)로서 군국의 중대사를 회의하는 지위에 있었고 도병마사에도 참여하였지만 이것은 중추원의 고유 권한이 군정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고려 전기에 중추원이 군기를 관장하지 못한 것은 송제와는 다른 정치체계 속에 설치된 때문이라 하겠다.

 끝으로 고찰해야 할 중추원의 기능은 백관지에 있는 「宿■」에 대한 문제이다. 처음 성종 10년(991) 우리나라 「直宿員吏」의 직이 송 추밀원과 성격이 비슷하다고 하여 이를 바탕으로 중추원을 설치하였는데 이 직숙이 숙위로 표현되었다고 하겠다. 송 추밀원은 侍■諸班直·內外禁兵 및 內侍省官 등의 일을 관장하였으므로0086)≪宋史≫권 162, 志 115, 職官 2, 樞密院. 고려에서도 숙위를 담당하였을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승선이 「更日入直」하였으며 추신도 궁내에 직숙하는 예가 허다하였음을 사료에서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중추원이 숙위의 기능을 가졌다는 것은 그 관원의 숙직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직숙을 총괄하였기 때문이다. 중추원의 堂後官이 궁문의 수직자를 往監하고 또 직숙 승선의 供億을 담당한 것은0087)權近,≪陽村集≫권 15, 送金堂後序. 이 숙위의 기능을 말한 것이 될 것이다. 공양왕 때의 사실이지만 도당이 밀직·중방으로 하여금 입직자를 점검케 할 것을 요청하여 왕의 윤허를 받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백관지에는 중추원의 기능으로 출납·숙위·군기의 세 가지를 들고 있지만, 이 중 승선이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고 중추원이 수직자를 관장하여 왕궁의 숙위를 맡았으나 군기만은 충렬왕대 이후에 가서야 비로소 관계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고려 후기에 들어와 재신이 정무를 관장한 데 대해 중추원의 추신이 군무를 맡아 이원적인 체제를 이루었던 것이다. 물론 재추는 함께 도당의 회의원이 되어 정치, 군사 등을 비롯하여 광범한 중요 국사를 의정하였으나 중추원은 일단 군국기무를 관장하는 고유 직능을 갖게 되었다고 하겠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