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5) 삼사
  • (1) 삼사의 설치

(1) 삼사의 설치

 고려의 三司는 중외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관장하는 관부로서 송의 삼사를 본따서 설치하였다. 고려는 당제를 기본으로 3성·6부의 정부기구를 만들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송제의 樞密院과 삼사를 본따서 중추원과 삼사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고려에서 삼사를 처음 설치한 것은 언제일까.

 ≪高麗史≫백관지에 의하면 삼사는 태조 때 설치된 것이라고 한다.0088)≪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三司.
邊太燮,<高麗의 三司>(≪歷史敎育≫17, 1975) 참조.
즉 태조가 태봉의 調位府를 고쳐 삼사를 설치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삼사는 태조 때 설치되고 그것이 태봉의 調位府를 개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0089)≪三國史記≫권 40, 志 9, 職官 下, 弓裔官號에도 調位府는 지금 三司라 하여 태봉의 조위부가 고려의 삼사로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洪汝河의≪彙纂麗史≫에도 국초에 내의성·광평성·삼사를 설치하여 3성을 삼았다고 하여0090)洪汝河,≪彙纂麗史≫권 15, 百官志. 역시 태조대에 삼사가 설치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의 삼사가 태조 또는 국초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태조 즉위 초(918)에 발령된 인사 임명에 삼사직이 없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삼사의 관직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사가 처음으로 자료에 나타나는 것은 훨씬 뒤인 성종 12년(993)이다. 즉 玄化寺碑銘에 孝肅仁惠王后(獻貞王后)가 淳化 4년에 서거하자 三司廳 안으로 殯을 옮겼다고 하였는데,0091)<玄化寺碑銘>(≪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이 순화 4년은 성종 12년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삼사는 고려의 기본관제인 3성·6부나 중추원 등과 함께 성종대에 설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의 삼사는 백관지에서 태봉의 조위부를 고쳐 만들었다고 하였다. 태봉의 조위부는 또한 신라의 調府에서 연유하였는데, 이들은 함께 貢賦를 관장하였으므로 고려의 삼사도 역시 공부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삼사는 그 관서명 자체가 중국제도에서 나왔고 또 그의 기능도 調(공부)보다도 광범한 중외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전담하였기 때문에, 신라의 조부나 태봉의 조위부의 후신의 성격이 아니라 재정 전반의 사무를 관장한 송의 삼사제를 채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송은 최고의 재정기관으로 삼사를 두고 방대한 기구 조직을 만들었는데 고려도 이 송제를 채용하였던 것이다.

 성종 때 설립된 삼사는 얼마 안가서 큰 변을 당하였다. 현종 5년(1014)에 上將軍 金訓과 崔質이 무신란을 일으켜 삼사를 혁파하고 대신 都正司를 설치한 것이다. 이 무신란은 현종 때 軍額의 증가로 백관 녹봉이 부족하게 되자 문신들이 京軍永業田을 빼앗아 녹봉에 충당하려는데 반발하여 일으킨 거사였다. 이 때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御史臺를 폐하여 金吾臺를 만드는 동시에 또한 삼사 대신에 도정사를 설치한 것이다. 이 때 어사대와 함께 삼사가 집권무신의 개혁 대상이 된 것은 이들이 문신들의 세력기관인 동시에 삼사가 백관 녹봉을 관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삼사를 도정사라 개칭한데서 지금까지 삼사의 녹봉 급여에 문신 중심의 불공정성이 있었지 않았나 짐작된다.

 현종 14년(1023) 도정사는 다시 삼사로 복구되었다. 현종 6년(1015) 김훈·최질의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금오대가 다시 어사대로 복구되고 그 밖의 집권 무신이 건립한 것이 모두 혁파되었지만, 도정사만은 그대로 계속되다가 14년에 가서야 삼사로 환원되었던 것이다. 비록 무신정권이 개정한 도정사이지만 새 문신정권도 종래의 삼사에 대한 혁신적 기운을 존속케 한 듯하다. 이제 고려의 삼사는 현종 14년에 도정사로부터 환원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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