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6) 도병마사
  • (4) 도평의사사로의 개편

(4) 도평의사사로의 개편

 고려 전기에 자주 나오던 도병마사의 기록이 무신란 후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무신정권이 재추의 도병마사 기능을 제약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崔氏政權의 말기인 고종 후년에 가서 도병마사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그런데 이 때의 도병마사는 이미 전의 그것과는 자못 다른 면이 있었다.

 고종 45년(1258)의 기사에 의하면 按察使가 지방관리의 탐학을 도병마사에 탄핵 보고하였으며, 또한 도병마사를 「都堂」이라 칭하고 도병마녹사를 「堂吏」라고 일컬음을 볼 수 있다.0116)≪高麗史節要≫권 17, 고종 45년 정월. 도당이란 이름은 도병마사가 재상들의 정치 중심지임을 표시하는 뜻이 된다. 같은 해 「都兵馬宰樞所」가 공신에 대한 포상을 상주하였는데0117)≪高麗史節要≫권 17, 고종 45년 7월. 이것은 도병마사가 재추로 구성된 사실을 보여준다. 뒤에 가서는 도당을 곧 宰樞所라고도 정하였기 때문이다.

 고종 말에는 「兩府合坐」란 말이 나온다.0118)≪高麗史≫권 123, 列傳 36, 嬖行 1, 白勝賢. 이 양부합좌란 곧 재추들이 합 좌 회의하는 도병마사를 가리킨다. 이제 고종 말기에는 도병마사가 양부재추 로 구성되고 국가의 대사를 합좌 회의하는 중요 기구로 변질된 것이다. 종래 의 도병마사는 재추 가운데 특정인만이 판사·사에 임명되고 그 밑의 부사·판사도 회의원이 되었는데, 이제는 부사·판관은 보이지 않는 대신 재추 전원이 정회원으로 합좌하게 되었다. 또한 그 기능도 종래에는 국방·군사관계에 한정되었던 것이 이제는 중요 국사 전반에 걸쳐 합작하는 명실상부한 「도당」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도병마사의 都堂化는 마침내 충렬왕 5년(1279) 도평의사사로 승격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고려는 충렬왕 원년에 모든 관제를 격하시켜 3성을 합하여 僉議府로 일원화하고 尙書 6部는 4司로축소시켰으며 그 밖의 다른 관부도 개편하였다. 그러나 도병마사만은 그대로 계속하다가 4년 후인 충렬왕 5년에 가서야 도평의사사로 개칭한 것이다. 다른 고려 관제는 元의 제도와 비슷하여 참월하다는 이유로 격하 개편하였지만 도병마사는 고려 독자적인 제도였기 때문에 개칭할 필요가 없어 그대로 존속하였는데, 이제 도병마사가 병마에 대한 문제 뿐 아니라 국사 전반에 걸친 광범한 문제를 회의하고 재추 전원에 의한 「도당」으로 승격하였으므로 그에 알맞는 칭호인 도평의사사로 바뀐 것이다. 즉 도병마사의 도평의사사로의 개칭은 원의 간섭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구성과 기능의 확대에 따라 고려 자체의 필요성에서 이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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