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6) 도병마사
  • (5) 도평의사사 기구의 확대

(5) 도평의사사 기구의 확대

 고종 말년에 이미 도병마사는 종래의 관원 구성에서 탈피하여 재추의 합좌기관으로 화하였음은 앞에서 살핀 바 있다. 이제 도병마사는 고려의 재상이라 할 수 있는 재신과 추신의 회의기관으로 승격한 것이다. 앞에서 든 바≪櫟翁稗說≫에서 도병마사는 시중·평장사·참지정사·정당문학·지문하성사로 판사를 삼고 판추밀 이하로 사를 삼았다 하고,≪高麗史≫백관지에도 시중 이하 5재를 판사로 삼고 6추밀 및 직사 3품 이상으로 사를 삼았다 한 것은, 이러한 재추가 판사·사가 되어 정식 회의원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특히 백관지에 도평의사사로 개칭된 이후에는 국가대사를 僉議(재신)·密直(추신)이 항상 합작하였다 하였으니, 이제 고려 후기의 도당이 재신과 추신을 구성원으로 삼을 만큼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 후기에는 이들 재추 뿐 아니라 三司의 관원도 도당의 회의원이 되게끔 확대되었다. 즉 충렬왕 때는 삼사도 재추와 함께 재상으로서 도당의 구성원이 되었다.≪櫟翁稗說≫의 도평의사사조에 지금은 첨의·밀직이 증원되고 여기에 또 각각 商議의 관원이 있었으며, 삼사의 판사와 左右使도 재신열에 끼어 도당에 합좌하였다고 한 것은, 재추와 함께 삼사도 정식 회의원이 되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더욱이 昌王 때에는 開城·厚德(禑王 謹妃의 立府)·慈惠府(恭愍王 益妃의 立府)의 판사와 尹도 도평의사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또한 藝文館員도 이에 포함한 듯하다.

 이제 도당은 재·추·삼사의 요원으로 회의원을 구성하였던 만큼 그 수가 증가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에는 재추의 수 자체가 증원되었는데, 그것은 앞에서 살핀≪櫟翁稗說≫의 서술로써 알 수 있다. 더욱이≪櫟翁稗說≫에는 증원된 재추에 다시 商議까지 더하여 그 수가 엄청나게 증가되었다고 하였다. 상의란 정식 직사자가 아닌 재추로 비록 도당회의에 참여하였지만 서명권이 없었으나 뒤에는 그들도 서명권을 가지고 국정에 참여하였다. 이리하여 고려 말기에 가서는 재·추 외에 삼사의 요원까지 도당에 합좌하고 다시 여기 상의까지 포함되어 도당의 회의원은 확대일로에 있었던 것이다.

 충렬왕 24년(1298) 충선왕 즉위 후의 下敎에서 재추의 수가 古制의 배나 되어 의정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한 바 있으며,0119)≪高麗史節要≫권 22, 충렬왕 24년 및 충선왕 즉위년 5월. 우왕 2년(1376) 金續命은 원래 양부는 5재·7추뿐이었는데 지금은 하루에 제수되는 재추가 50인이 되었다고 한탄하였다.0120)≪高麗史節要≫권 30, 우왕 2년 3월. 그런데 실제 그 해 말에 임명된 재추는 59명이나 되었다.0121)≪高麗史節要≫권 30, 우왕 2년 12월. 그 후에도 재추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는데 우왕 5년 간관의 上言에는 당시 양부의 수는 60명이나 되었다 하였고,0122)≪高麗史節要≫권 31, 우왕 5년 정월. 창왕 즉위(1388) 8월 趙浚의 陳時務에서는 근래 도당에 합좌하여 국정에 참여하는 재상이 6·70인에 이르렀다 하였으며,0123)≪高麗史節要≫권 33, 우왕 14년(창왕 즉위) 8월. 恭讓王 원년(1389) 郎舍 具成祐 등의 상소에는 재추의 수가 7·80인이나 되었다고 하였다.0124)≪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공양왕 원년 12월.

 이와 같이 도당에 합좌하는 재추의 수는 증가일로였는데 이는 그만큼 도당 의 지위를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당 회의원의 과다한 증가는 오히려 도당의 의정활동에 불편을 가져오는 부작용을 일으켜 이를 타개하기 위해 內宰樞制를 만들었다. 충렬왕 4년(1278) 재추가 많아 의정에 부적합함이 있다 하여 새로이 必闍赤을 두고 禁中에서 常會하여 기무를 참결케 하여 이를 別廳宰樞라 불렀는데0125)≪高麗史節要≫권 20, 충렬왕 4년 10월. 이것이 내재추제의 기원이 된다. 우왕 때 林堅味 등이 내재추에 임명되어 항상 금중에서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였는데,0126)≪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1, 林堅味. 이로 인한 다른 재추의 국정에서의 소외는 공민왕 20년(1371) 羅州牧使 李進修로 하여금 내재추 폐지의 상소를 올리게끔 만들었던 것이다.0127)≪高麗史≫권 43, 世家 43, 공민왕 20년 7월. 그러나 도당 회의원의 관직 확대와 그 수의 증가는 제도적으로 도당의 지위를 높이는데 절대적인 계기를 마련하였음이 확실하다.0128)≪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都評議使司. 이 때 藝文館員도 포함되었던 것은 공양왕 2년 門下府·三司·密直司의 정원으로 判司事·同判司事·兼司事를 삼고 그 밖의 商議와 開城府, 藝文館員은 제외되었다는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후기 도당기구의 변질 중 중요한 것은 그 안에 행정기구가 정비된 점 이다. 상부구조에 있어서의 회의원 증가와 함께 하부구조로서 행정사무를 담 당한 기구와 기능이 확충 정비되었으니, 이는 도평의사사가 도당으로서 최고 정무기관이 된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도병마사에 甲科權務로 임명된 錄事 8인이 이속을 통솔하고 있었다. 이들 녹사는 재추의 합좌 때 먼저 앞에서 안건을 말하고 회의원 사이를 돌아다니며 논의를 정한 연후에 시행토록 하는0129)李齊賢,≪櫟翁稗說≫前集 1, 合坐之禮. 이른바 堂吏로서의 직능을 지녔던 것이다. 그런데 공민왕 때부터는 도당에 6色掌이 있어 도당 합좌 때 의론할 사항을 가지고 사무를 본다고 하였는데, 이들이 앞의 녹사의 후신으로 보인다.0130)≪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공민왕 8년 7월. 이 6색장은 6전 체제의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아 6部의 일을 직접 관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6색장은 창왕 때 정식으로 6방녹사로 개편되었다. 즉 창왕 때 도평의사사의 6색장을 吏·禮·戶·刑·兵·工의 6방 녹사로 고치고 여기에 또한 知印 10인과 宣差 10인을 두었던 것이다.0131)≪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都評議使司. 이제 6색장은 6방녹사로 정비되었고 그 밖의 중앙 여러 관아의 일을 보는 10인의 지인과 지방에 使外하는 선차 10인을 둠으로써 도당이 내외를 총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도평의사사는 상부에 재추와 하부에 사무요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의 청사도 구분되었다. 공양왕 2년(1390)에 새로 건립된 도평의사사 청사는 중앙에 使司廳이 있고 좌우에 首領官廳이 있었으니,0132)鄭道傳,≪三峯集≫권 4, 高麗新作都評議使司廳記. 여기에 재추 합좌소와 사무관청이 나뉘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도당의 행정사무 기능은 마침내 공양왕 때에 이르러 사무관청인 經歷司의 설치를 보게 되었다. 즉 공양왕 2년에 6방 녹사를 통할하는 경력사를 설치하고 여기에 3·4품의 經歷 1인과 5·6품의 都事 1인을 두었다 한다.0133)≪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都評議使司 공민왕 2년. 이제 도당에는 경력사가 설치되어 3·4품의 고위 관직으로 경력을 임명함으로써 행정기구의 성격이 강화되었고, 그들은 새로 지은 수령 관청에서 집무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도당은 고려 후기로 갈수록 상층부의 회의원 임명의 관부가 확대되고 그 수가 증가하였으며, 또한 하층부의 사무처가 정비 강화되었다. 이러한 도당의 기구확대는 그에 비례하여 그 기능의 확충을 초래케 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