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6) 도병마사
  • (6) 도평의사사의 기능 확충

(6) 도평의사사의 기능 확충

 도당기구의 확대와 정비는 그 기능의 확충을 가져오게 하였다. 고려 전기의 도병마사가 국방·군사문제만을 의론한데 대하여 이미 고종 이후에는 국가 중대사를 합의하는 宰樞合坐制로 변질되었으나 충렬왕 때 도평의사사로 개칭되면서 이러한 기능은 보다 확대되었다. 실제로 고려 후기의 도당의 議政機關으로서의 내용은 田制·租稅·刑獄·儀禮·銓注·軍事·對外關係 등 내외의 모든 중대사가 해당되고 이러한 안건은 도당에 합좌한 재추들의 합의와 서명으로 시행케 되었던 것이다.0134)宰樞入坐法에 대하여는 앞의≪櫟翁稗說≫에 잘 서술되어 있고, 합좌소의 모습과 서명의 방법 등은≪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공민왕 8년 7월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합좌기관으로서의 도당의 기능은 이전보다 확충되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려 후기 도당 기능의 커다란 변질은 그것이 합의기능 뿐 아니라 행정기능도 가졌다는 점이다. 즉 도평의사사는 국가 중대사를 회의하였을 뿐 아니라 여기서 결정된 사항을 실제로 시행하는 집행기구가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본 바 도평의사사에 직접 행정사무를 맡은 6색장 또는 6방녹사, 그리고 이를 통할하는 사무처인 경력사를 설치한 것은 이러한 행정기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 도당은 중외 官司를 통령하는 최고 정무기구가 되었다. 공민왕 20년 (1371) 12월 교서에서 百僚 서무는 도당에서 摠斷하는 바 중앙의 모든 관서는도당을 통하여 지방관에게 하첩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은 이를 나타낸다.0135)≪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중앙정부의 공문이 도당을 통하여 諸道按廉使에게 하달되는 동시에 또한 지방에서 올라 오는 공문도 제도안렴사가 직접 도당에 올리게 되었다. 고려 후기 도당은 중앙 諸司를 총령하고 지방의 제도안렴사에게 직첩하는 명실공히 일원적인 중앙 최고 정무·행정기관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도당의 국가행정의 관장은 종래의 상서 6부의 기능을 무력화시켰을 것은 당연하다. 백관지 서문에 都堂權의 확대로 6부는 허설이 되고 백사는 계통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쓴 것은 이를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공양왕 4년(1392)에는 각사가 受禀할 일은 6曹를 통하지 않고 도당에 直報하게끔 법제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 말의 도당은 재추가 국정을 합좌 회의할 뿐 아니라 국가 모든 사무를 직접 시행하는 사무행정 기능도 갖게 되었다. 중앙의 백사도 도당을 통하여 지방의 제도안렴사에게 하첩하고 반면 제도안렴사도 중앙의 도당에 상첩하였으며, 王旨도 역시 도당을 경유하여 시행케 되고 왕에게 올린 상소문도 다시 도당에 내려 의논케 하였으니, 도당은 완전히 정치·행정의 최고 중심기관이 되었다. 여말에 조준이 本朝의 제도는 도당이 百揆를 총할하고 號令을 반포하는 기관이었다고 말한 것은 그 단적인 표현이라 하겠다.0136)≪高麗史節要≫권 34, 공민왕 원년 12월.

 처음 고려의 정치체제는 3성·6부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중서문하성이 최고 정무기관이 되고 상서 6부에서 국무를 분담 시행하였으며, 여기에 중추원이 추가 설치되어 재추가 국가대사를 의논하였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는 이러한 정치체제에 일대 변동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도평의사사체제로의 전환이었다. 이제 후기에는 도평의사사가 도당의 호를 가질 만큼 일원적인 최고 정무·행정기관의 지위로 승격하여 百僚 庶務를 총단하는 권력기구의 총본산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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