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7) 식목도감
  • (1) 식목도감의 설치와 구성

(1) 식목도감의 설치와 구성

 式目都監은≪高麗史≫百官志에 중앙관제 본문이 아니라 말미에 「諸司都監各色」이라고 부록 형식의 細註로 실려 있다. 식목도감은 都評議使司(처음의 都兵馬使)와 함께 宰樞들이 국가 내외의 중대사를 회의 결정하는 중요 기구였으나 중국 관계와 다른 고려의 독자적인 임시기관이었기 때문에 부록에 실리는 천대를 받아야 했다. 종래 도평의사사와 식목도감이 都堂이라고 불리우는 최고 기관이었으면서도 고려 정치제도에서 무시된 이유도 여기에 비롯한 것이었다.0137)式目都監에 대한 논문으로는 邊太燮,<高麗의 式目都監>(≪歷史敎育≫15, 1973)이 있을 따름이다.

 도평의사사와 식목도감은 전혀 별개의 직능을 가진 독립된 회의기관 이었다. 그것은 같은 시기에 양자가 함께 존재하였던 사실로 증명된다. 따라서 백관지에서도 도평의사사와 식목도감은 따로 항목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高麗史≫찬자는 이들 두 기관을 처리하는데 크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高麗史≫편찬에 많이 이용한 李齊賢의≪櫟翁稗說≫에 “도병마사를 뒤에 都評議使로 개칭하였는데 또한 式目都監使라고도 칭하였다” 하여 양자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高麗史≫편찬자는≪櫟翁稗說≫의 도평의사사 내용을 전재하면서도 식목도감을 별개의 항목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或稱爲式目都監使”라는 구절을 삭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과연 도병마사(도평의사사)와 식목도감은 별개의 기관이었는가, 만약 별개의 기관이었다면 양자의 기능은 각각 어떻게 달랐으며, 이제현이 두 기관을 동일시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점을 해결해 보고자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양기관은 동시대에 독립하여 함께 존재하였기 때문에 일단 다른 회의기관으로 보고 식목도감의 설치와 구성부터 살펴 보기로 하겠다.

 백관지에는 식목도감에 대하여 文宗朝 관원 구성을 썼을 뿐 언제 설치되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高麗史≫에 식목도감의 기사가 보이는 것은 현종 14년(1023)에 식목도감이 詹事府의 公廨田을 의논하여 정하고 또 첨사부 관원의 給從數를 아뢰어 정했다는 기사가 처음이다.013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公廨田.
≪高麗史≫권 72, 志 26, 輿服, 鹵簿 百官儀從.
그러나 식목도감은 宰樞를 중심으로 구성된 회의기관이란 점에서 唐·宋의 제도와 다른 독자적인 기구란 점에서도 도병마사와 유사하므로 도병마사가 성립된 시기인 성종조부터 현종조 사이에 설치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면 식목도감의 관원 구성은 어떠하였을까. 식목도감은 정식 행정관서가 아니라 하나의 회의기관이었기 때문에 그 관원은 타직으로 임명된 회의원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高麗史≫에 기록된 식목도감의 관원 구성을 문종조 관제로 표로 만들면<표 12>와 같다.

 이 표를 보면 식목도감은 省宰로 임명된 使 2인, 정3품 이상의 副使 4인, 5품 이상의 判官 6인, 그리고 甲科權務의 錄事 8인 등 도합 20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使 2인 省 宰
副 使 4인 正3品 이상
判 官 6인 5品 이상
錄 事 8인 甲科權務

<표 12>式目都監의 官員構成(文宗朝)

 이 식목도감의 관원 구성은 같은 회의기관인 도병마사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유사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도병마사가 성재로 判事를 삼고 3품 이상 추신이 使가 된 것은 식목도감이 성재로 사를 삼고 정3품 이상으로 부사를 삼은 것과 서로 통하며 그 이하 판관·녹사도 인원수나 관질도 비슷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도병마사에는 최고직으로 판사가 있는데 대하여 식목도감은 사가 최고직임이며 성재의 수도 2인으로 적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식목도감은 도병마사와 똑같은 회의기관으로 기본적인 관원 구성이 유사하였으나 약간 격이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식목도감의 최고직인 사 2인은 성재로 임명되었는데 실제로는 首相인 門下侍中이 임명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고려에서는 수상이 자동적으로 도병마사의 판사가 되고 동시에 식목도감의 사가 되어 양 기관의 의장이 되는 제도를 시행하였던 것이다. 성재 2인이라 한 것을 보면 문하시중 이외의 또 한 사람의 재신이 사가 된 것 같다. 식목도감의 부사는 정3품 이상이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6樞密 및 職事 3품 이상이 겸하였고 도병마사의 사와 맞먹는 지위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식목도감의 부사도 역시 도병마사의 사와 같이 3품직을 겸한 추밀을 임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식목도감도 도병마사와 같이 재·추로 임명된 사·부사를 정식 회의원으로 삼은 것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식목도감의 정식 회의원이 재추로 구성된 사·부사이지만 그 확대회의에는 판관도 포함되었을 것은 도병마사의 예에서 짐작할 수 있다.0139)邊太燮,<高麗都堂考>(≪歷史敎育≫11·12, 1969;≪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89∼90쪽 이에 반하여 式目錄事는 순전히 사무직이었다. 식목녹사는 刀筆吏인 갑과권무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회의원이 되지 못하고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처리하는 실무 사무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식목도감에는 도병마사에 있는 吏屬이 보이지 않는다. 식목도감도 하나의 독립된 기관이므로 당연히 실무 잡사를 처리하는 이속이 없을 수 없다. 이것 은<諸司都監各色>에 또 하나의 기구로 立項된 會議都監에 이속이 없는 것과 서로 통한다. 아마 이것은 뒤에서 살펴 보려는 바와 같이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이 같은 會議都監으로 지칭되어 도병마사의 이속이 모든 사무를 처리한 데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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