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8) 어사대와 낭사
  • (3) 대간의 직능

(3) 대간의 직능

 대간은 言事를 담당한 언관이다. 우리가 전혀 별개의 관원인 어사대와 중서문하성 낭사를 한데 묶어서 보는 것도 그들의 직능에 공통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대관과 간관의 직능은 똑같았는지, 아니면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를 고찰해 보아야 하겠다.

 어사대의 직임에 대하여는≪高麗史≫백관지에 시정을 논집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糾察 탄핵하는 일을 맡는다고 하였다. 즉 어사대는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을 뿐 아니라 백관을 규찰하는 직능이 있었고, 또한 風憲官에서 常賤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의 의례·복장 등 사회기강을 숙정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어사대의 가장 주요 직능은 백관을 감찰하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事元期에 監察司라고 개칭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대관의 직능에 대하여 간관의 직능은 백관지에 간쟁과 봉박을 맡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국왕의 과실을 간쟁하여 시정케 하고 또 敎旨가 부당하면 封還 駁正하는 것이었다. 즉 간관은 국왕 측근에서 부당한 처사를 간언하고 논박하여 이를 바로 잡는데 주요 임무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상 대관과 간관의 직능을 보면 전자가 백관의 감찰에 그 주임무가 있는 반면 후자는 국왕에 대한 간쟁에 주임무가 있어 양자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다음의 사료를 통해서 볼 수 있다.

諫官과 御史는 비록 모두 言責의 臣이지만 그 직은 각기 다르다. 간관은 獻替를 관장하여 人主를 바르게 하였는데 대하여 어사는 규찰을 관장하여 百僚를 바로 잡는다. 그러므로 군주에 과오가 있으면 간관이 奏牘하고 신하에 위법이 있으면 어사가 封章한다.(鄭道傳,≪三峰集≫권 6, 經濟文鑑 下, 臺官).

 위에서 보다시피 간관과 대관은 다같이 언론의 책임을 맡고 있으나, 간관은 군주에 간언하고 어사는 백관을 규찰하는데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충렬왕 6년(1280)에 국왕이 “간쟁은 성랑의 직임이므로 감찰사가 人君의 시비를 간언하는 것은 그 본연의 임무가 아니다”0161)≪高麗史節要≫권 20, 충렬왕 6년 3월.라고 한 것도 대관과 간관의 본 임무가 각기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대관·간관의 형식적 본디 임무의 구분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양자의 직능의 한계는 명확하지 못하였다. 간관이 백관의 비리를 탄핵하는가 하면 대관이 군주의 과실을 간언하기도 하여, 대간은 다같이 언관으로서의 직책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臺諫一體」로서 어사대와 낭사는 합동으로 언사를 행하여 군주의 과오와 백관의 비위를 논박하였다. 비록 전혀 다른 양 기구로 분립되고 형식적 직능도 달랐지만 실제로는 똑같은 언관으로서 함께 활동하였으므로 모두 「대간」이란 명칭으로 일컬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대간의 직임은 첫째 간쟁으로 국왕의 과실을 간언 시정케 하는 것이었다. 이 간쟁을 백관지에는 다만 낭사의 직임으로 규정하였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대관도 간쟁을 행사하였음이 여러 사료에 나오고 있다.

 둘째 기능은 봉박이다. 이것은 국왕의 부당한 조칙을 봉환하여 駁正한다는 것으로 하나의 거부권 행사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관도 시정의 논집이라는 임무가 있는 데서 국정의 잘못을 논박하였으니, 이는 간관의 봉 박과 서로 통하는 직능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대간은 함께 군주나 재상들의 국정의 잘못을 논박하고 시정케 하는 언론기관이었으니, 이 기능은 크게 보아 첫째의 간쟁기능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셋째는 어사대의 직능으로 표기된 백관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대관의 고유 직능이지만 사실은 이것도 간관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여러 사료에서 살필 수 있다. 간관은 단독으로도 백관을 규찰하였지만 또 대·간 합동으로 행하기도 하였다. 이 때 규찰·탄핵의 대상은 宰相으로부터 下吏에 이르는 모든 관리가 포함되었다. 이렇게 보면 대간은 군주에 대한 간쟁 봉박의 직능과 함께 모든 관리에 대한 규찰·탄핵의 직능도 가졌다고 하겠다. 즉 지금까지 든 세 가지 직능은 대간이 언관으로서 군주 이하 모든 관리의 과오 비리를 논박 시정케 하는 권한을 세분한 데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대간은 署經의 직능이 있었다. 서경이란 관리의 임명에 있어서 대간의 동의 서명을 뜻하는 것으로 아무리 국왕의 재가가 있어도 告身에 대한 서경을 얻지 못하면 효력이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관리 임명에 대한 대간의 서경이 없는 한 관직 제수는 무효가 되었는데, 이 때 모든 관직 임명이 이에 해당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고려시대의 서경제도에 대한 조선 초기의 기록에는 9품으로부터 1품에 이르는 모든 관리가 이에 해당되었다고 하고, 실제≪高麗史≫에도 1품인 政丞까지도 대간의 서경을 경유한 예가 보여 최고 관직인 수상까지도 대간의 심사과정을 거쳤음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5품 이하관리에 한하여 대간의 서경이 필요했던 조선시대와 다른 점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서경 절차가 1품까지의 재상도 포함되었다는 점에는 의문이 간다. 고려 말에 종 1품인 僉議政丞의 고신을 대간이 서경한 사료는 확실히 보이지만, 그러나 그 이전에도 재상에 대한 서경이 실제 실행되었는지 분명치 않다. 조선시대에 5 품 이하에만 서경이 필요하였다는 점과 아울러 볼 때 역시 고려에서도 5품 이하나 최고 3품 이하의 관리에만 적용치 않았나 짐작된다. 아무래도 3품 이하관으로 구성된 대간이 2품 이상의 재상의 임명까지도 심의한다는 것은 정상 적인 제도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서경은 비단 관직 임명에 필요하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법제를 제정하는 데도 반드시 요구되었다. 후대 조선시대의 기록이지만 고려에서는 一法을 세우고 一官을 설치하는데 있어서도 반드시 대간으로 하여금 完議 參詳케 하여 합의에 이른 뒤에 그 依牒을 내보내 시행하였다고 하고,0162)≪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4월 경술. 또한 고려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릇 立法·定制에는 반드시 대간으로 하여금 서경케 한 후에 시행하였는데 이를 依貼이라 하였다고 한 것은0163)≪世宗實錄≫권 37, 세종 9년 7월 임자. 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간관과 대관은 간쟁·봉박 및 시정의 논집, 풍속의 교정, 백관에 대한 규찰·탄핵, 그리고 서경의 일들을 맡았는데 이들은 그들 의 구분된 직임을 넘어 하나의 대간으로서 같이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 직임 의 내용은 비록 군주·재상·백관 및 일반 상천 등 그 대상에 차이가 있었으나 잘못된 정치와 인사 및 풍속을 바로 잡는데 있다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었다. 이것은 고려 대간의 직능이 모든 분야에 걸쳐 기강을 확립하여 국가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는 장치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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