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9) 한림원과 문한관
  • (2) 한림원의 기능

(2) 한림원의 기능

 한림원의 기능은 백관지에 “詞命을 제찬하는 곳”이라 하였다. 즉 국왕의 조칙을 기초 작성하는 기관이란 뜻이다. 이것은 비록 한림원이 외제라 하더라도 지제고인 까닭에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고려에서 조칙을 작성하는 보다 중추적인 기관은 성랑으로 임명된 내제였다는 사실은 한림원으로 하여금 그 기능에 제약을 받게 하였다.

 성랑으로 지제고를 겸한 내제란 우선 국왕 측근에 입시하고 또 국왕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중요한 조칙을 작성하였는데, 한림원 등 타관으로 지제고를 겸한 외제는 고원에서 王言이면서도 그리 중요하지 않은 詞疏를 작성하였다. 당대에는 내제인 한림원이 冊書·制書 등 가장 중대한 왕언을 작성한데 대하여 외제인 중서사인은 詔旨·勅制 등을 작성하였으며, 송대에도 내제는 왕언 가운데 大制誥·詔令·赦文 등을 관장하고 외제는 誥詞의 종류를 관장하여 차이가 있었으므로0174)≪大唐六典≫권 9, 中書省 및≪舊唐書≫권 43, 志 23, 職官 2, 中書舍人.
≪朝野類要≫권 2, 兩制 및≪宋史≫권 161, 志 114, 職官 1, 中書省 및 권 162, 志 115, 職官 2, 翰林學士院.
고려의 내제·외제도 기초하는 조칙에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의 왕언에는 국왕이 왕실을 책봉하는 冊文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교서, 관리의 고신인 制誥, 국왕의 회답인 批答, 외교국서인 表箋, 그 밖의 佛道疏·祝文 등의 禁中 문서가 있었지만0175)崔濟淑, 앞의 글 참조. 이것은 거의 지제고가 고원에서 제술하였고, 그 중 형식화된 文詞의 일부를 한림원에서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 때 한림원이란 지제고를 겸한 학사가 아니라 최하위직인 直翰林院을 가리켰다. 그것은 李奎報의≪東國李相國集≫에 “在翰林 受勅述”이라 하여 조칙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은 이규보가 직한림이었던 사실로 증명된다. 고려에서는 성랑이 詞臣으로 문한관의 중심을 이루어 비록 내제·외제의 차이는 있었지만 실제 사소의 종류는 구분되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직한림 중심이지만 한림원이 조칙 작성의 행정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졌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성랑과 고원이 양제를 이루고 있었으나 이를 일원적으로 통할하는 행정기구는 한림원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려 말의 사실이지만 우왕 2년에 성랑인 諫議大夫 李悅이 지은 疏文이 미리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여 국왕이 藝文檢閱(즉 직한림원)을 巡軍獄에 가두게 한 것은 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고려의 한림원은 학사들이 모두 겸직이고 최하위직인 직한림이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특히 내제가 되지 못하였다는 점에 그 직능이 약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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