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10) 사와 도감
  • (1) 제사의 조직

(1) 제사의 조직

 고려시대에는 3성·6부나 중추원·삼사 등 중요 관부 이외에 여러 司가 설치되어 기타 잡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이들 百司는 비록 하부관청이지만 고려 정치제도상 무시할 수 없는 실무를 담당한 기구였다. 이들 백사에는 어떤 기구가 있었고 그들은 어떤 구조로 조직되어 있었는가를 살펴 보기로 하자.

 ≪高麗史≫백관지 서문에는 성종 때 중앙에0179)고려의 諸司·都監에 대한 논문은 전무하다. 다만 文炯萬이<高麗特殊官府硏究-諸司都監各色의 分析>(≪釜山史學≫9, 1985)에서 百官志 중앙관제 말미에 있는<諸司部監各色>조항을 검토한 논문이 있을 따름이며, 따라서 백관지 본문에 있는 제사에 대한 논문은 전혀 없다고 하겠다. 省·部·臺·院·寺·司·館·局이 있었다 하고, 처음에는 재상이 6부를 통할하고 6부는 寺·監·倉庫를 통할하는 명령체계가 확립되었으나, 고려 말에 가서는 都堂의 확대로 6부는 그저 허설이 되고 백사도 “渙散 無統”으로 계통을 잃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6부가 시·감·창고를 통할하였다고 한 것은 모든 庶司가 6부에 예속되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과연 고려의 諸司는 6부의 관할 하에 놓이는 일사불란한 정치체계를 이루고 있었을까.

 백관지에는 중앙관제 말미에 부록형식의<諸司都監各色>이란 조항으로 여러 관서를 간단한 細註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 나오는 「諸司」란 이 글에서 말하는 백사가 아니며 이들 백사는 백관지 본문에 나오는 정식 관제에 따른 엄연한 관서이다. 따라서 고려의 제사를 엿보기 위하여는 위의<諸司都監各色>이 아니라 백관지 본문의 정규 관서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고려가 모방한 당의 관제는 3省·6部·9寺·5監·1臺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1臺란 御史臺를 말한 것인데 9시·5감이 3성·6부와 병칭된 것을 보면 상하관계가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고려에서 6부가 시·감 등 제사를 통할하였다는 백관지 서문과 다른 것이다. 그러면 과연 고려에서도 당제와 같이 제사에 9시·5감·1대가 있었는가부터 고찰해야 할 것이다.

 1臺인 어사대가 고려에도 설치되고 6부와는 별도로 독립하여 존재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의 9시가 고려에서 그대로 채용된 것 같지 않다.≪高麗史≫세가 태조 2년(919) 정월에는 개경에 3성·6상서관·9시 를 설치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기사는 찬자의 오류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 때 9시가 세워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성종 2년(983) 5월에 처음으로 3성·6조·7시가 마련되었다고 한 기사는 이 때 3성·6부(6조란 표현은 잘못이다)가 성립한 것이 확실한 까닭에 7시의 설치도 사실로 보여진다. 고려는 성종 때 당제에 따른 정치기구를 마련하였기 때문에 3성·6부 이하 제사도 그에 따랐을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高麗史≫백관지에는 이 때 한 번에 7시가 성립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백관지에는 많은 제사가 목종 때 세워진 것으로 나타나 7시도 성종 이후 점차적으로 정비되었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고려는 당의 9시가 아니라 7시로 축소되어 설치되었음이 달랐던 것이다.

 고려의 寺는 때에 따라 그 명칭의 변화가 많아 어떤 고정된 수를 말하기 어렵지만 7시가 원형인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것은 위의 성종 2년의 7시의 설치와 더불어≪高麗史≫刑法志 公牒相通式에도 6官諸曹·7寺·3監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종 30년(1076)의 更定田柴科에서는 「7寺卿」·「7寺少卿」·「7寺丞」 등이 나타나 당시 7시가 존재하였음이 증명된다. 그러나 같은 문종 30년 文武班祿에는 「7寺丞」·「7寺主簿」가 나오지만 상관은 「6卿」·「6少卿」으로 한 寺가 빠져 있다. 이어 인종조 문무반록에도 역시 「5寺丞」·「5寺少卿」으로 오히려 두 寺가 빠져 있다. 이것은 7시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종 관제 이후 인종조까지도 7시는 그대로 존속되었지만 다만 7시 중 나머지 1시 또는 2시의 卿·少卿의 문무반록 대우에 차등이 생겼다고 풀이된다.

 그러면 이들 고려의 7시는 어떤 관부로 구성되었을까. 당대의 9시는 太常寺·光祿寺·衛尉寺·宗正寺·太僕寺·大理寺·鴻臚寺·司農寺·太府寺였다. 이에 대하여 고려의 7시가 어떤 관부로 구성되었는지는 백관지의 기록으로는 가려내기 어렵다. 그런데 고려의 7시로는 太常寺·衛尉寺·太僕寺·禮賓省·大府寺·司農寺·司宰寺를 들기도 한다.0180)李丙燾, 앞의 책, 115∼117쪽.

 寺와 동격인 기구로 監·省이 있다. 감으로서는 國子監·小府監·將作監·軍器監·司天監·太醫監이 있고 성에는 秘書省·殿中省이 있었으나 그 장관도 監이었다. 고려에서는 전기 공첩상통식에도 7시·3감의 이름이 있고 또 문종 30년 전시과나 인종조 녹봉조에도 역시 3감의 이름이 보이지만 그것이 어떤 監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상은 대체로 문종조를 중심으로 한 시기의 관부 구조로 볼 수 있다.

 이들 시·감·성 밑에는 署와 局이 딸려 있었다. 백관지에는 이들 관부의 예속관계가 명기된 것이 없지만 당의 관제는 일목 요연하게 상하 계통이 규정되어 있다. 이로 보건대 고려에서도 서와 국은 시·감·성에 예속되게끔 分置되었을 것이다. 가령 당의 太常寺에는 太廟署·郊社署·太樂署·鼓吹署·太醫署·太卜署·廩犧署의 7서가 딸려 있었고 太僕寺에는 乘黃署·典廐署·車府署·典牧署의 4서가 예속되어 있었으므로, 고려의 태상시에는 大廟署·大乘署·掌牲署 등이 딸려 있고 태복시에는 供驛署·典廐署 등이 예속되었을 것이다. 감에도 시와 같이 대체로 서가 예속되었는데 그러나 과연 고려의 모든 시가 당과 같이 7寺와 諸監 밑에 전부 예속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당의 2省인 비서성과 전중성에는 국이 예속되어 있었는데 비서성에는 著作局·太史局(司天臺), 전중성에는 尙食局·司藥局·尙衣局·尙舍局·尙乘局·尙輦局이 속해 있었다. 고려의 비서성에도 저작국은 없었으나 局長인 著作郞이 고려 후기에 秘書監(典校寺)에 속해 있었으며 태사국은 고려 후기에는 書雲觀에 병속되었으나 그전에는 이에 속했을 것이며, 전중성에는 상식국·상약국·상의국·상사국·상승국 등이 예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고려의 모든 서·국이 도표화할 수 있게끔 시·감·성에 예속관계에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백관지 서문에서 諸衙門이 통할·소속되는 바 내용이 분명하지 않다고 쓴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다음의 중요한 과제는 백관지 서문과 같이 6부가 寺·監·倉庫를 통할하였느냐의 문제이다. 당제는 전술한 바 3성·6부·9시·5감·1대로 이들이 각각 독립기관임을 나타내고 있었으니, 이것은 9시·5감·양성에 서·국이 예속된 것과 다른 점이다. 이들 9시 5감이 어떻게 6부에 소속되고 있었다는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당의 6부에는 각각 그 자체에 4司씩 있어 모두 24司로 구성되고 있었으나 다른 관부를 예속하고 있었다는 내용은 볼 수 없다. 이런 점으로 보면 고려의 6부도 7寺·諸監을 관할하였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고려에서는 署의 장관인 令이 종5품 내지 종8품이었으며 局의 장관인 奉御도 역시 정6품으로 그 품질이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7시의 최고직인 판사는 정3품, 卿은 종3품이고 양성도 역시 판사 정3품, 監 종3품이며 諸監은 판사가 종3품, 감이 정4품으로 모두 그 장관의 품질이 높았으므로 그 지위가 높았다고 하겠다. 특히 이들 시·성·감에는 서·국과는 달리 3품관인 판사가 있어 그의 독립성이 나타나고 있다.

 전기한 公牒相通式에는 京官들의 공문발송의 양식이 서술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 단계로 內史·門下·尙書都省-6官諸曹-7寺·3監-諸署局 등으로 고려의 여러 관부에 4단계의 계층이 있었음을 알게 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들이 각각 상하의 행정계통을 구성하고 있었느냐에 대하여는 문제가 있다. 전술한 바 시·감은 그 관부의 독립성이 엿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 시·감이 6부와 전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으니, 그 기능상 6부의 감독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교육기관인 국자감은 예부의 관할하에 있었고, 財貨·廩藏을 관장한 대부시는 호부, 魚梁·川澤을 관장한 사재시는 공부의 관할을 받았을 것이다. 고려 후기인 우왕 14년(1388) 8월 창왕 즉위 후 趙浚의 陳時務에 各司를 원래와 같이 6부에 분속할 것을 건의하고 또 공양왕 원년(1389) 12월에도 역시 조준이 6부로 하여금 소속 각사를 점검케 할 것을 요청한 사실을 보면 원래 6부는 소속 관사를 지휘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들 시·감이 도식적으로 6부에 예속된 하부기구로 조직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렇게 보면 고려의 寺·監·省은 독립관청이지만 그 기능에 따라 해당 6부의 지휘를 받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밑의 시·감과 서·국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였다고 짐작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