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10) 사와 도감
  • (2) 도감의 구성과 기능

(2) 도감의 구성과 기능

 고려에는 寺·監·署·局 등 諸司 외에 따로이 비정규 관부가 있었다.≪高麗史≫백관지에서는 이들 특수 관부를 중앙관제 말미에 부록형식으로<諸司都監各色>이란 조항으로 나열하고 있다. 여기에 서술된 기구는 都監을 주축으로 한 고려 독자적인 임시관부로 잡다한 내용이 혼잡하게 수록되어 있다. 여기 「諸司」라는 용어가 있으나 이는 앞에서 본 바 百僚 庶司, 즉 百司와는 다른 것이다.

 실제로<諸司都監各色>에 「司」가 붙은 관부명은 제일 앞에 있는 都評議使司와 尙瑞司·典牧司·光軍司의 4司 밖에 없으며 또한 도평의사사를 제외하면 그리 중요 관부도 아니다. 아마 「諸司」의 명칭이 앞에 붙여진 이유는 고려 후기의 최고 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가 제일 먼저 立項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따라서<제사도감각색>의 조항명에 「諸司」를 앞에 쓴 것은 「司」의 수나 비중, 그리고 백사와의 혼동으로 적절한 표현은 못된다고 느껴진다.

 실제로<제사도감각색>의 내용은 제사가 아니라 도감과 各色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 수록된 관부는 총 109개가 되는데 그 가운데 도감이 58개, 각색이 10개가 되어 특히 도감의 수가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司·都監·色 외에 관부 명칭으로 17개의 종류가 있어 총 20개로 분류되지만 그 가운데 역시 도감과 각색이 가장 많은 편이다.0181)文炯萬은 앞의 글에서 「房」과 「坊」을 한데 묶어 19개 종류로 분류하였다. 「諸司」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좀 이상하지만 도감·각색의 명칭은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요컨대<제사도감각색>조항에는 정규 관부가 아닌 잡다한 고려 관부를 모두 混入시켰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제사도감각색>조항의 중심이 되는 것은 전술한 바 제사가 아니라 도감과 각색이다. 그것은<제사도감각색>의 총 109개 관부 가운데 도감이 과반수나 되고 각색도 두번째로 많으며 그 중에는 매우 중요 관부가 끼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도감·각색에 대하여는 백관지 서문에 도감·각색은 어떤 일이 있을 때 설치하고 그 일이 끝나면 폐지하였지만 그 중에는 그대로 존속시킨 것도 있었다 하고, 그 관부명은 대다수가 무신란 후 무인이 제멋대로 제정하여 거의가 鄙俚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도감·각색이 임시적인 비정규 관부 임을 나타내는 동시에 무인들이 많이 설치하였음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의 대다수 도감·각색은 거의 중도에 폐지되고 극히 일부만이 그대로 존속되었으며, 또 그 대부분은 무신란 후 고려 후기에 설치된 것이 많았으므로 백관지 편찬자의 말은 옳은 것이다.0182)文炯萬은 위의 글에서 이러한 서문의 서술에 반대하고 있다. 즉 都監·各色은 임시기구라고 할 수도 없거니와 그 名號를 무인들이 마음대로 제정하였다고 한 것도 역시 적당치 않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특히 관부명이 「鄙俚」하다고 한 것은 중국 관제에 대한 고려 독자적인 名號에 대한 자기 비하를 나타낸다. 따라서 본고에서는<제사도감각색>의 중심이 되는 도감과 각색에 대하여 중요한 부문만 골라 고찰하려 한다.

 <제사도감각색>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도감은 都評議使司 다음에 기술한 式目都監이다. 식목도감은 도평의사사가 재추로 구성된 변방·군사문제를 다룬 회의기관인데 대하여 역시 재추로 구성된 법제·격식을 다룬 회의기관이라는데 유사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도평의사사와 식목도감은 국가 내외의 중요사를 재추들이 회의 결정하는 중대 기구였던 것이다. 따라서 식목도감을 도평의사사 다음에 항목을 세우게 된 것은 타당하다고 하겠다.

 식목도감 다음으로 항목이 설정된 도감은 8번째의 會議都監과 9번째의 迎送都監이다. 따라서 이들 회의도감과 영송도감도 도감으로서는 중요 관부임을 느낄 수 있다. 백관지 通文館條에는 細註로 禁內學官으로 비서성·사관·한림원·보문각·어서원·동문원을 들고 式目·都兵馬·迎送을 아울러 禁內 9官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식목도감과 영송도감은 도병마사와 함께 금내 3官이 되었던 것이다. 고려 후기에는 「3官」 또는 「3都監」의 명칭이 자주 보인다. 3관이란 여기 나타나는 바와 같이 식목도감·도병마사·영송도감의 관원을 표시하였다. 전기 통문관조에 금내학관이 參外인 점으로 보아 3관도 역시 참외이며 그것은 곧 錄事를 가리켰음이 확실하다. 금내 9관에 포함된 식목도감·도병마사·영송도감의 녹사를 「3관」이라 불렀던 것이다.

 3도감은 바로 이들 3관이 있는 세 관부 즉 식목도감·도병마사·영송도감을 표시하였다. 이 때 식목도감과 영송도감은 엄연한 도감이지만 도병마사(뒤의 도평의사사)를 3도감에 포함시키는 데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세 기구는 항상 한데 묶여 금내 3관이 되었으므로 3도감이라 통칭되었던 것 같다. 인종 9년(1131)에 軍國 이해에 관한 封事를 올리는데 文官常參 이상과 한림원·사관·국학·보문각 및 식목·도병마·영송도감 녹사 등을 포함시킨 것은 역시 식목도감·도병마사·영송도감이 3도감으로 연속되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0183)≪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9년 3월. 鄭道傳의≪朝鮮經國典≫에 보면 고려의 補吏의 방법에는 두 종류가 있었는데 이른바 3都監·3軍錄事·諸評議使司知印·宣差는 모두 士人으로 임명하고 그 밖의 椽吏·典吏·書吏·令史 등 이속은 良家 자제로 충당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 3군 녹사와 나란히 나오는 3도감 녹사는 위의 식목도감·도병마사·영송도감의 녹사라 생각된다.0184)邊太燮,<高麗의 式目都監>(≪歷史敎育≫15, 1973), 68∼69쪽. 사실상 도병마사(도평의사사)는 식목도감과 함께 재추양부가 국가 내외의 중대사를 회의 결정하는 병립기관으로 애당초 도감의 성격을 지닌 기구였는데 다만 성종 때의 兩界兵馬判事制의 기원 때문에 도병마사로 명명되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의당히 「都兵馬都監」으로 불렀을 것이다. 도병마사를 3도감의 하나로 포함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된다.

 영송도감이 식목도감·도병마사와 함께 금내 3도감이 되고 그 녹사가 3관에 포함될 정도로 그 지위가 높았으므로 도감으로서는 식목도감·회의도감에 이어 세번째로 올라서게 되었다. 영송도감은 외국 사신의 영송을 담당한 중요 기구였으므로 금내 3관에 포함되었던 것 같다. 전기한 바 영송도감이 금내 9관에 포함되었을 뿐 아니라 전술한 인종 9년 制에서는 군국 이해에 대한 봉사를 올리게끔 한 것도 그 지위가 높았음을 표시한다.

 그러면 식목도감 다음의 도감인 회의도감은 어떤 기구였을까. 그보다 하나 아래인 영송도감이 3도감에 포함되었는데 그보다 앞의 관부인 회의도감이 여기서 빠져 있는 것은 좀 이해가 안간다. 이상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백관지에는 엄연히 회의도감이 하나의 기구로 기술되고 문종 때 제정되었다고 쓰여 있지만≪高麗史≫에는 그 어디에도 회의도감이 존재하고 어떤 일을 하였다는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회의도감이 실제 존재하였는지 조차 의심케 하는 사실이다. 셋째로 회의도감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는 것은 고려의 회의기관으로서 엄연히 도병마사(도평의사사)와 식목도감이라는 거대한 양대 관부가 엄존하였는데 다시 애매하기 짝이 없는 회의도감이라는 막연한 회의기관이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여기 보이는 회의도감이란 실재 존재하지 않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高麗史≫에도 회의도감의 명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관부명이 아니라 商議에 부수된 ‘商議會議都監事’라는 관직명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가령 고려 후기의 사람인 趙浚이 密直提學·商議會議都監事에 임명된 사실이나,0185)≪高麗史≫권 118, 列傳 31, 趙浚. 柳珦이 前簽書密直司事·商議會議都監事였던 것은 이를 나타낸다.0186)<安心寺指空懶翁舍利石鍾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고려 후기에는 재추에 직사자가 아닌 상의가 임명되어 도당에 참여하는 재추의 수가 증가하여 많을 때는 7∼80명에 이르렀다. 이 상의는 같은 재추로서 도당에 합좌하였을 뿐 서명권이 없었으나 뒤에는 이들도 합의된 문서에 서명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0187)邊太燮,<高麗都堂考>(≪歷史敎育≫11·12, 1969;≪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101쪽). 이들 직사를 갖지 못한 재추의 상의가 정식으로 상의회의도감사였다고 생각된다. 모든 재추직에 상의가 있었으며 그들은 도당이나 식목도감에서 회의하는 회원이란 뜻의 상의회의도감사를 겸하였던 것이다.0188)職事宰樞가 合坐會議에 참여한 것은 당연하지만 商議도 商議會議都監事로서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 밖에 공민왕 7년 2월에 慶千興이 知門下政事·商議會議都監事, 柳淑이 同知樞密院事·商議會議都監事 등 여러 예가 있다. 여기서 會議都監은 독립하여 나오지 않고, 반드시 商議에 붙어 표기되고 있어 그가 기구명이 아님을 나타낸다. 식목도감에 상의식목도감사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도평의사사와 식목도감에 같은 상의회의도감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회의도감이란 정식 관부가 아니라 앞의 도평의사사(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의 회의기관의 회의원을 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0189)文炯萬도 앞의 글에서 會議都監이 都評議使司나 式目都監에 종속되었던 관부로 독립된 업무를 수행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高麗史≫찬자는 상의회의도감사의 이름에서 회의도감을 하나의 관부로 잘못 이해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도병마사(도평의사사)도 도감에 속하는 관부이고 식목도감·영승도감과 함께 금내 3도감의 중요한 관부였으며, 회의도감은 하나의 독립관부가 아니라 합좌기관인 도병마사·식목도감의 회의원을 나타내는 관직명이었다. 이 밖에도 55개나 되는 많은 도감이 있었으나 거의 모두 일시적인 관부로 곧 폐지된 경우가 많았다. 앞에서 본 백관지 서문에서 도감을 임시적인 기관으로 본 것은 이 때문이었다.

 도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各色이다. 각색은 모두 10개나 되어 조항명에 <諸司都監各色>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 「色」이란 담당직을 나타낸 것으로 비교적 하위 직원을 가리켰다. 10개 색 가운데 淨事色만 고종조에 기능했을 뿐 다른 9개 색은 전부 고려 말에 설치되었다. 고려 후기에 도평의사사에 6色掌이 설치된 것도 색이 하나의 직사를 가리키며 그 지위가 낮았음을 나타낸다.0190)朝鮮時代에도 各色掌이 있어 이들은 각기 所掌하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뜻하였는데, 궐내(司饔院)에서 음식을 마련할 때 각기 소장을 달리하여 湯水色·床排色·炙色·酒色·燈燭色 등이 이에 속하여 신분은 천하였다 하니 고려 말의 色도 그 지위가 낮았음을 짐작케 한다(≪譯註 經國大典≫,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6, 135쪽). 따라서 색이란 고려시대의 직사 담당자의 뜻으로 관부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제사도감각색>에 8개가 되는 直이 관원인 것과 같았다.

 이상 백관지의<제사도감각색>의 내용을 간단히 고찰하였다. 여기 관부 가운데 도평의사사나 식목도감 등 고려 정치제도 가운데 아주 중대한 기관이 포함되었으나 백관지 편찬자는 그것이 고려 독자적인 관부라는 점에서 부록 형식의<諸司都監各色>에 집어 넣었다. 특히 편찬자는 이들 관부를 「鄙俚」라 하여 비하시켰는데, 그것은 중국 관제와 다른 데서 나온 표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여러 관부가 고려 정치제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邊太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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