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2. 관직과 관계
  • 1) 관직의 구조
  • (1) 관직의 설치와 구분

(1) 관직의 설치와 구분

 ≪高麗史≫권 76의 百官志 1 서문에, “高麗 太祖가 개국한 처음에는 新羅와 泰封의 제도를 叅用하여 관을 설치하고 직을 나누어 서무를 보게 했다”고 한 바와 같이 초창기의 관제는 신라와 태봉, 그 중에서도 주로 후자의 것에 의거하였다. 그러다가 光宗朝(950∼975)에 이르러 새로운 몇몇 제도를 마련한데 이어 중국의 것을 모범으로 하면서 고려 나름으로의 관제를 정비하는 때는 成宗朝(982∼997)였다. 이후 거기에 얼마간의 첨삭을 가하여 완성을 보는 것은 文宗朝(1046∼1083)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역시 백관지 서문에서도 “성종이 크게 새로이 제작하여 내외의 관서를 정하였는데, 안(중앙)으로는 省·部·臺·院·寺·司·館·局이 있고, 밖(지방)으로는 牧·府·州·縣이 있었다. 官에는 常守가 있고 位에는 定員이 있어 이에 一代의 제도가 크게 갖추어졌다. 문종·예종이 비록 조금 增損하였으나 대체적으로는 성종 때의 옛(제도를) 承襲하여 자손으로써 준수하는 바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종조에 들어와 고려왕조의 정치와 행정을 담당할 각 관서와 거기에 설치된 관직 및 그들의 직분과 정원 등의 제도가 갖추어졌으며, 그것이 문종조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변혁을 거치면서 완비되어 갔음을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거니와, 이는 현재 개별 관서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도 다시 확인되고 있다.

 이렇게하여 설치된 관직은 그들의 고하에 따라 正·從1品부터 正·從9品까지의 품계가 매겨졌다. 즉 가장 높은 관직은 정1품이 되었고 다음이 종1품, 다음이 정2품, 이하 차례로 내려가 말직은 종9품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9품 관제는 역시 중국에서 빌어 온 것인데, 고려에서 이 제도를 처음 도입한 것은 광종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官品을 칭한 최초의 사료는 景宗 원년(976) 2일 文武兩班의 墓制를 정할 때 그 넓이와 높이의 기준을 1품부터 9품에 이르는 품계에 의거하고 있는 사실에서0191)≪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경종 원년 2월. 여기에는 “六品以下”라고만 보이나 그것은 곧 6품부터 9품까지를 의미했다고 해석된다.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광종이 죽은 지 9개월 후의 일로서 이미 先王代에 마련된 9품 체계에 따라 이 때 와서 묘제에 대한 法式을 제정한 것이 아닌가 짐작되는 것이다. 광종은 “華風을 존중하고 華士를 예우했다”는 崔承老의 평과도 같이0192)≪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중국의 제도를 모형으로 삼아 왕조의 체제를 정비하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군왕의 한 사람이었다. 광종 7년(956)에 저들의 제도를 좇아 백관의 衣冠을 제정하고0193)≪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7년. 또 동 9년에는 後周人 雙冀의 건의를 받아 들여 처음으로 科擧制를 실시한 것과0194)≪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광종 9년 5월. 역시 중국의 제도인 文散階의 부분적인 채용이0195)末松保和,<高麗初期의 兩班에 대하여>(≪東洋學報≫36-2, 1953;≪靑丘史草≫1, 笠井出版社, 1965).
武田幸男,<高麗初期의 官階-高麗王朝 確立過程의 一考察->(≪朝鮮學報≫41, 1966).
그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그리하여 광종조는 “조정의 儀制가 자못 볼만한 게 있는” 시기였다는 것이지만,0196)≪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이와 같은 상황을 참작컨대 9품 관제가 광종 때에 도입되었다는 이해는 그런대로 납득이 가는 것이다.

 관직에 품계를 부여하는 9품 관제는 이후 점차 널리 시행되어 간 듯하다. 실례를 보건대 위에서 든 경종 원년 2월의 기사 이외에 동년 11월 田柴科 始定을 할 때, ‘職散官各品’에게 지급하되 “官品의 고저는 논하지 않았다”고 한019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경종 원년 11월. 경우의 ‘官品’도 9품 체계내의 品과 같은 뜻으로 해석되며, 또 성종 원년(982) 6월에 “京官 5품 이상은 각기 封事를 올려 時政의 득실을 논하라”고 한0198)≪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원년 하 6월. 일과, 동 9년 10월 西京에 行幸하여 入流者 중 80세 이상에게 상을 줄 때 ‘3품 이상’·‘5품 이상’·‘9품 이상’ 등으로 나누고 있는 것0199)≪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9년 동 10월. 등에서 그 점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9품 관제는 광종조에 도입된 후 경종을 거치고 성종조에 이르러서는 정착되는 단계에 들어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高麗史≫百官志에는 각 관서에 설치된 대부분 관직의 정원과 품계가 문종조에 이르러 제정된 듯이 나타나 있으나, 이것은 그 때를 기준으로 정리한 결과일 뿐 저들 제도는 이미 성종조에 정비된 상태였다고 파악하는 것이 옳을 듯싶다.

 9品 체계에 해당하는 관직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品官職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고하에 따라 몇 개의 단층을 이루어 宰樞職과 叅上職·叅下職 등으로 구분되고 있었다. 하지만 관직은 이들 품관직만으로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아래에 品外의 吏屬職(胥吏職)이 다수 설정되어 있었으며, 그들도 또한 크게 人吏層 이상이 視務하는 入仕職과 掌固 等類가 일을 보는 未入仕職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상의 實職에 비하여 散職 체계가 따로 마련되어 상층에는 檢校職이, 그리고 하층에는 同正職이 설치되고 있었다. 이제 그들 구분을 보기 쉽게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0200)金光洙,<中間階層>(≪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230쪽.

品 官 吏 屬(胥 吏)
宰 樞 叅 上(叅內) 叅 下(叅外) 人 吏 掌 固
檢 校 職 同 正 職  
入 仕 職 未 入 仕 職

<표 1>高麗時代 官職上의 區分

 관직은 이러한 방식 이외에 흔히 東班職과 西班職으로 양분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원래 北座 南面한 왕에 대하여 동쪽에서는 文官의 班列을 東班, 서쪽에서는 武官의 班列을 西班이라 한데서 비롯하거니와, 그렇기 때문에 동반은 문반, 서반은 무반이라고도 칭하였다. 兩班이란 바로 이들을 이르는 말로써 우리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터이지만, 이에 따라 관직은 文班職(東班職)과 武班職(西班職)으로 구분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다른 시기도 대개 그러하였지마는 특히 고려시대에는 이 두 계열의 관직 중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으며, 또 양반에 대칭되는 南班이 따로 더 존재하였으나 이 반열의 관직은 殿中의 당직이나 국왕의 호종 및 단순한 왕명 전달 등을 맡아 보던 궁중의 內僚職으로 문반직과는 말할 것 없고 무반직과도 비교·상대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아니하였다.

 위의 구분이 직능에 의한 것인데 비해 관직은 또한 지역에 따라서 京職과 外職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었다.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전자는 당시의 서울인 開京에 위치한 중앙관서 소속의 관직이며, 후자는 각 지방행정 단위의 관직이었지마는, 이들의 경우는 물론 경직이 외직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이에 수반된 문제를 해결할 겸 관원들에게 대민업무를 이해시킨다는 뜻에서 初職을 아예 외직으로 임명하거나 또는 관직상의 승진에 앞서 외직을 거치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하여 놓고도 있었다.

 淸要職이나 館職은 그의 중요성 내지 성격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었다. 이 중 청요직은 국왕과 백관에 대한 諫諍과 監察 등을 맡은 臺諫職과 文翰을 담당한 翰林院職 및 문·무관의 인사를 관장한 吏部와 兵部의 관직 등을 말하는데, 글자 그대로 「맑고도 요긴한 관직」이란 뜻에서 그같이 구분하여 부른 것 같다. 관직 가운데는 淸·濁과 要·閑이 있어 그처럼 분류하기도 했던 듯 싶거니와, 이들은 당시 門閥貴族의 仕路와 관련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0201)朴龍雲,<臺諫의 身分>(≪高麗時代 臺諫制度 硏究≫, 一志社, 1980).

 館職은 청요직의 하나이기도 했던 藝文館(翰林院)과 時政의 기록을 관장한 史館(春秋館)의 관직 등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들은 文筆을 담당한 기구의 관 직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다른 官職과 구별되어 그와 같이 불렸던 것이거니와, 이들은 모두가 과거 급제자들만이 진출할 수 있는 仕路였다는 데서0202)許興植,<高麗 禮部試의 諸業別 出題와 及第者의 進出>(≪白山學報≫20, 1976;≪高麗科擧制度史硏究≫, 一潮閣, 1981). 또한 논자들의 관심을 모은 바 있었다.

 官職은 지금까지 살펴 보는 동안 알 수 있듯이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 다양한 구분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분류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고, 위에서 지적한 바 그들의 구조에 관하여 좀 더 살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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