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2. 관직과 관계
  • 1) 관직의 구조
  • (4) 실직과 산직

(4) 실직과 산직

 관직은 實職과 散職으로도 구분되고 있었다. 이같은 분류의 기준이 된 것은 職事가 있느냐 또는 없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전자는 물론 직사가 있는 관직이었던데 비해 후자는 그것이 없는 관직이었다. 여기에서 직사가 있다는 말은 쉽게 이야기해서 일정한 직임을 맡고 있다는 뜻으로서, 통치기구 내의 定額에 포함된 관직은 모두 실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위에서 이 실직에 관하여 살펴 본 셈이다.

 이러한 실직에 대해 산직은 일정한 직임이 부여되지 아니한 虛職으로, 이에는 檢校職과 同正職 및 添設職이 있었다.0236)李成茂,<兩班과 官職>(≪朝鮮初期 兩班硏究≫, 一潮閣, 1980), 138쪽. 그러면 실제적인 직무를 맡고 있지 않은 이러한 산직제의 설치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주된 요인은 아마 관직에 취임하기를 희망하는 인원은 많은데 비해 실직은 정해진 액수가 있어서 수용에 한계가 있었던 만큼 가능한 한 그 문제를 해결하여 보고자 하는데 있지 않았나 짐작된다.0237)韓㳓劤,<勳官 「檢校」考-그 淵源에서 起論하여 鮮初 整備過程에 미침->(≪震檀學報≫29·30, 1966), 90쪽.
金光洙,<高麗時代의 同正職>(≪歷史敎育≫11·12, 1969), 120·125쪽.
첨설직은 여말인 공민왕 때에야 설치되지만 검교직과 동정직은 관제의 정비와 함께 중앙집권화가 본격화하는 성종조부터 마련되는 것도 그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중 검교직과 동정직은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 같다. 구체적인 검교직의 예를 볼 것 같으면 문반의 경우 檢校太師(정1품)·檢校侍中(종1품)·檢校右僕射(정2품)·檢校尙書(정3품)·檢校太醫少監(종5품) 등이 찾아지며, 무반의 경우는 檢校大將軍(종3품)·檢校將軍(종4품) 등이 찾아진다.0238)韓㳓劤, 위의 글, 88∼93쪽 참조. 이처럼 검교직은 문반 5품, 무반 4품 이상에 해당하는 관직에만 설정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동정직의 예로는 문반의 경우 尙食奉御同正(정6품)·殿中內給事同正(종6품)·衛尉注簿同正(종7품)·良醞令同正(정8품)·良醞縕丞同正(정9품) 등이, 무반의 경우 中郎將同正(정5품)·郎將同正(정6품)·別將同正(정7품)·散員同正(정8품) 등이 찾아지며, 다시 이속직으로는 主事同正·令史·同正 書藝同正 등이 보여,0239)金光洙, 앞의 글, 129∼131쪽 참조. 그것은 문반 6품, 무반 5품 이하의 관직에 널리 설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검교직은 문반 5품, 무반 4품 이상의 상층부에 해당하는 관직에, 동정직은 문반 6품, 무반 5품 이하의 하층부에 해당하는 관직에 설치된 것으로 미루어 양자는 산직체계라는 하나의 구조를 이루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되는 것이다.0240)金光洙, 위의 글, 132∼133쪽.

 목종 원년(998)에 제정된 改定田柴科에 의하면 제5과에 散左右僕射, 제6 과에 散六尙書가 들어 있는 것을 비롯하여 이하 차례로 이어져 제17과에 散殿前承旨와 散隊正에 이르기까지 본직 앞에 ‘散’字가 붙어 있는 관직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0241)≪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목종 원년 12월. 이들도 산직체계 내의 관직으로 이해된다. 본직의 앞 또는 뒤에 ‘檢校’·‘同正’을 넣어 표시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을 경우 단순히 ‘散’ 자를 넣어 산직임을 나타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0242)이 점은 이미 金光洙가 앞의 글, 121쪽에서 지적한 바 있는데, 朴龍雲은 앞의 글, 24∼25쪽에서 그것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이는 張文緯가 檢校禮部尙書였는데 그를 달리 ‘散秩禮部尙書’라 부르고 있는 사실과0243)<張文緯墓誌銘>(李蘭暎 編,≪韓國金石文追補≫, 亞細亞文化社, 1968). 崔忠獻이 門蔭으로 ‘散補良醞令’이 되고 뒤에 ‘散加衛尉注簿’를 했다고 전하는데,0244)<崔忠獻墓誌>(≪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문음제의 초임은 동정직을 받는 게 상례였으므로 그것은 필시 양온령동정과 같은 관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확실한 것 같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개정전시과에서 給田의 대상으로 규정된 산직은 실직이 없이 단지 품계만 보유하는 去官 이전의 전직관이거나 혹은 전보관계로 대기 중에 있는 대우관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확실치는 않다”는 매우 신중한 이견이 제시된 바 있으나0245)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高麗大出版部, 1980), 43쪽. 아마 그렇지는 않았던 듯싶다. 하여튼 고려시대에는 이런 검교직과 동정직이 상당히 비중있는 직제로써 널리 이용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관직이 이처럼 광범하게 활용되고 있었던 데는 그것이 관직세계로의 편입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勳職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관계가 깊었다. 검교직의 賜與가 우대 조치의 일환이었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동정직도 음서자에게 주어진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포상의 의미가 많이 내포되어 있는 관직이었던 것이다.0246)韓㳓劤, 앞의 글, 90·94쪽 및 金光洙, 앞의 글, 124쪽. 나아가서 후자는 관직의 初職으로 기능하였고, 그리하여 여기에서 얼마간의 기간을 지내면 실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만큼 그 역할은 한층 주목받을 만한 것이었다.

 산직을 지니고 있는 자에게는 또한 토지가 지급되고 있었다.0247)韓㳓劤, 위의 글, 90쪽 및 金光洙, 위의 글, 157∼163쪽. 이는 무엇보다 목종 원년에 제정된 개정전시과의 제3과에 검교태사가 들어가 있을 뿐더러,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 아래의 科等에 배치된 ‘散’字가 붙은 관직들을 검교직과 동정직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만큼 그로써도 뒷받침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데 그 뒤에 갱정된 문종 30년(1076)의 전시과에서는 그같은 산직자들이 토지 지급대상에서 일체 배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때에 이르러 저들에 대한 토지 지급이 아예 중단된 것일까, 아니면 별도의 규정이 따로이 마련된 것일까. 이 점은 좀 불분명한데, 그러나 다시 그로부터 얼마의 시기가 지난 인종 때의 사실을 기록한≪高麗圖經≫에 의하면, “내외의 見任 受祿官이 3,000여 원이요, 散官同正으로 녹은 없으나 給田하는 자가 또한 14,000여 원이었다”고0248)≪高麗圖經≫권 16, 官府 倉廩.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직자에게 토지 지급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만성적인 토지 부족현상으로 현직자들에게 지급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보여지는 당시에 그렇게 많은 수의 산직자들에게 과연 어느 정도로 혜택이 돌아갈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토지를 분급한 사실만은 분명한 듯하다. 산직의 帶有는 이런 면에서 역시 실제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고 이해된다.

 이러한 산직은 고려 후기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더불어 濫授되면서 질적 저하를 가져왔다. 동정직만이 설정되어 있던 하급 관직에 검교직이 나타나고 있는 데서 그같은 사실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검교직은 고위 관리에 한하지 않고 향리·백성에게까지 미쳐서 避役의 수단이 되기에 이르렀다고 전하거니와,0249)≪高麗史≫권 35, 世家 35, 충숙왕 12년 동 10월 을미. 이에 대해서는 韓㳓劤, 앞의 글, 96쪽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동정직을 띤 인원들 역시 크게 증가하여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그만큼 감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0250)金光洙, 앞의 글, 165∼175쪽.

 이와 같은 실정에서 공민왕 3년(1354)에는 또 첨설직이 설치되었다. 紅巾賊과 倭寇의 잦은 침입이 있는 데다가 元에 구원병까지 파견해야 했던 당시의 현실 속에서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軍功을 세운 士人과 향리 등이 다수 나오게 되는데, 이들을 관직으로 상주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政曹(吏曹와 兵曹)를 제외한 6부의 判書(전기의 尙書)와 摠郞(전기의 侍郞)의 수를 배로 늘리고, 각 司의 3·4품 숫자도 늘리는 한편 42都府의 每領마다 역시 中郎將·郎將은 각 2인씩, 그리고 別將·散員은 각 3인씩 첨설하도륵 했던 것이다.0251)≪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添設職 공민왕 3년 6월. 이러한 조처가 여말의 무인세력 성장과 관계가 깊었다는 연구가 있어 주목되거니와,0252)鄭杜熙,<高麗末期의 叅設職>(≪震檀學報≫44, 1978).
―――,<高麗末 新興武人勢力의 成長과 添設職의 設置>(≪李載龒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90).
그러나 어떻든 이로써 고려의 관제는 더욱 문란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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