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2. 관직과 관계
  • 2) 국초의 관계와 문산계
  • (1) 국초의 관계

(1) 국초의 관계

 官階란 관인들의 지위와 신분을 나타내는 공적 질서체계를 말한다. 고려에서 이리한 질서체계로 기능한 것은 중국의 산관제를 도입하여 성종 14년(995)부터 정식으로 채택한 문산계였는데, 하지만 그 이전에도 고려 나름의 독자적 관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大匡·正匡·大丞·大相 등 이른바 개국 초의 관계가 그들로서,≪高麗史≫백관지에는 이에 대해, “國初에는 관계를 문·무로 나누지 않았다. 大舒發韓·舒發韓·夷粲·蘇判·波珍粲·韓粲·閼粲·一吉粲·級粲은 新羅의 제도요, 大宰相·重副·台司訓·翰佐相·注書令·光祿丞·奉朝判·奉進位·佐眞使는 泰封의 제도였는데, 太祖는 泰封主가 제 뜻대로 제도를 고쳐 백성들이 잘 익혀 알지 못하므로 모두 신라의 것을 따르고 다만 名義를 쉽게 알 수 있는 것만 태봉의 제도를 좇았다. 얼마 후에 대광·정광·대승·대상의 칭호를 사용하였다”고0253)≪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文散階. 전하고 있다.

 이 백관지에 의하면 대광·정광 등 국초의 관계는 고려 태조 王建이 즉위한 「얼마 후」부터 사용되고, 다시 그 이전에는 신라의 위계였던 서발한(伊伐飡)·이찬(伊尺粲)·소판(迊飡) 등과 태봉의 관계였던 대재상·중부 등이 쓰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의 용례를 보면 대재상·중부 등은 찾아지지 않아 확인할 수가 없고 소판·파진찬·한찬 등도 태조 원년(918)의 것이 대부분이며,0254)武田幸男, 앞의 글, 24∼26쪽. 이 글에서는 高麗的 官階가 처음 사용된 시기를 태조 2년으로 잡고 있으나, 아마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후 몇 예가 더 나타나다가 동 6년부터 아예 새로이 수여한 사례는 눈에 띄지 않는다.0255)金甲童,<高麗初期 官階의 成立과 그 意義>(≪歷史學報≫117, 1988, 5∼6쪽;≪羅末麗初의 豪族과 社會變動硏究≫,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90, 180∼181쪽). 반면에 대광·정광 등의 고려적 관계는 역시 태조 원년부터 수여되고 있으며,0256)≪高麗史≫권 92, 列傳 5, 洪儒. 이후 점차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신라의 위계제를 이용한 것은 잠시 동안일 뿐0257)李純根,<高麗初 鄕吏制의 成立과 實施>(≪金哲埈華甲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225∼229쪽)에서 後代에도 신라식 위계를 칭한 사례가 있음을 들어 아마도 성종 14년까지는 이것이 고려적 관계와 병용되었으리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하지만 그같은 현상이 있게 된 것은 이미 그 전에 받았던 위계를 고려왕조에서도 인정해준 데 따른 것으로, 형식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여러 논자들에게서 제시되어 있다(武田幸男, 앞의 글, 29∼30쪽 및 金甲童, 앞의 책, 181쪽). 일찍부터 고려적 관계가 주로 쓰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려 초기의 관계로 기능한 정광·대상 등의 칭호도 사실 그 기원은 태봉에 있었다. 弓裔는 상기한 두 칭호 이외에 元輔·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 등의 官號를 제정해 사용하였었다.0258)≪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 天祐 원년 갑자 및 권 40, 志 9, 職官 下. 그러한 가운데에서 궁예의 정권을 인수한 고려 태조는 새로이 개국한 후 그것들을 이끌어다가 신라식 위계제에 대신하는 고려 나름의 관계로 기능하게 했던 것이라 짐작되거니와, 위에서 지적했듯이 그들은 점차 널리 사용되어 갔던 것이다.

 고려 초기의 관계는 9품계 16등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내용이≪高麗史≫권 75 選擧志 3 鄕職條에 전하는데, 간편하게 도표로 보이면 다음의<표 5>와 같다.

 검토하여 보면 이와 같은 16등급의 고려 초기 관계가 처음부터 모두 갖추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즉위 19년(936) 이전에는 실례상 그들 중의 반수 가까운 칭호가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처음에는 이들 가운데 몇몇 칭호만이 사용되다가 역시 후삼국의 통일사업이 완수되는 것을 계기로<표 5>와 같은 16등급으로 확대 완비된 것이 아닌가 짐작되는 것이다.0259)武田幸男, 앞의 글, 14∼23쪽 및 金甲童, 앞의 책, 181쪽에서 그 시기를 태조 23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品 階 官 階 名 等 級
1 品 三 重 大 匡
重 大 匡
1
2
2 品 大 匡
正 匡
3
4
3 品 大 丞
佐 丞
5
6
4 品 大 相
元 甫
7
8
5 品 正 甫 9
6 品 元 尹
佐 尹
10
11
7 品 正 朝
正 位
12
13
8 品 甫 尹 14
9 品 軍 尹
中 尹
15
16

<표 5>高麗 初期의 官階

 그러나 어떻든 이들 관계는 태조 원년부터 성종 14년까지의 약 80년간 고려 왕조의 공적인 질서체계로서 여러 모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는 우선 광종 11년(960)에 마련되는 백관의 公服에서 맨 윗층인 紫衫層이 ‘元尹 이상’이라는0260)≪高麗史≫권 72, 志 26, 輿服, 冠服 公服 광종 11년 3월. 관계에 기준을 두고 제정되었다는 데서 엿볼 수 있거니와, 그 아래의 丹衫·緋衫·綠衫層은 中壇卿·都航卿·小主簿와 같이 관직에 기준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과 비교된다는 점에서도 한층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뒤 경종 원년(976)에는 시정전시과가 제정되지만, 여기에서 가장 후대를 받은 부류는 자삼층으로0261)≪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경종 원년 11월. 역시 원윤이 그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성종 2년(983)에는 왕이 “詳政殿에 나와서 문·무 원윤 이상의 각 사람에게 말1필씩 하사한” 기사도0262)≪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2년 3월. 눈에 띤다. 이처럼 서열 체계로서의 관계가 담당한 기능을 각 방면에서 확인할 수가 있는데, 한편 그들 용례를 통해 관계는 그 구조상 크게 원윤 이상과 좌윤 이하로 나뉘어져 그 사이에 획선이 그어져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파악된다.0263)武田幸男, 앞의 글, 36∼42쪽.

 관계는 물론 중앙의 관인들에게 수여되었다. 그리하여 저들은 관계만을 지니고서도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0264)金甲童, 앞의 책, 192∼199쪽. 하지만 관계는 그렇게 중앙의 관인들에 한정하여 수여된 것은 아니었다. 城主·將軍 등을 일컬은 이른바 지방의 豪族들에게도 주어졌던 것이다. 태조 6년에 ‘下枝縣將軍’ 元奉에게 원윤을 준 것을0265)≪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6년 춘 3월. 비롯하여 이후 그와 같은 예는 다수 보이고 있다.0266)武田幸男, 앞의 글, 36∼37쪽 및 金甲童, 앞의 책, 190쪽. 아마 태조는 관계를 매개로 호족들을 포섭함으로써 자기의 세력범위를 확대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관계의 수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于山國과 女眞族의 추장 및 耽羅國의 왕자 등에게 미치고 있다.0267)武田幸男, 위의 글, 32쪽 및 金甲童, 위의 책, 191쪽. 그를 통한 포섭의 범위가 이방인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관계라는 질서체계가 고려의 영역을 넘어서 그 주변까지도 포섭하여, 고려왕조를 중심으로 하는 질서세계의 수립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0268)武田幸男, 위의 글, 31∼33쪽. 지니는 바 의미가 크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國初의 관계는 앞서 설명했듯이 성종 14년에 중국식 문산계가 유일의 공적 질서체계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생명을 잃게 된다. 이후 그것은 변질되어 鄕職化하는 것이다.0269)武田幸男,<高麗時代의 鄕職>(≪東洋學報≫47-2,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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