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3. 중앙 정치체제의 권력구조와 그 성격
  • 1) 중앙 정치체제의 권력구조
  • (1) 국왕과 재추와 상서 6부

(1) 국왕과 재추와 상서 6부

 전근대 왕조국가에 있어서 흔히 ‘萬化之源이며 出理之本’으로 묘사되는 국 왕의 권력은 절대권에 가까운 것이었다. 근대적인 의미의 입법권과 사법권·행정권 등을 모두 장악하고 있던 국왕의 권한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국가가 국왕 한 사람의 의지에 의해서 전적으로 운영된 것만은 아니었다. 국왕 밑에는 당연히 그의 여러 보필기구가 마련되어 있었지마는, 그들에 의한 보필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왕권에 대해 제약하는 구실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儒敎政治理念에 입각하고 있던 동양 내지 한국사회에 있어서 天子·國王은 하늘의 뜻(天意)에 따라 정사를 펴야만 한다는 책무가 주어졌던 만큼 그에 의해 제약을 받기도 했지만, 그같은 사상·이념에서 뿐 아니라 실제로 통치기구들을 담당하고 있던 臣僚群에 의해서도 왕권은 어느 정도 규제를 받았던 것이다. 정치권력 구조의 문제는 바로 이런 점에 핵심이 있다고 생각되거니와, 그것은 물론 각 사회가 자리한 역사적 위치나 여건에 따라 차이가 났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면 고려왕조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고려에서 정치의 중심기구는 흔히들 3省 6部로 일컬어지는 中書門下省과 尙書省, 그리고 中樞院(樞密院)이었다. 이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기구는 중서문하성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던 宰府였거니와, 여기에는 省宰·宰臣·宰相으로 불리는 2품 이상의 門下侍中 이하 諸平章事·叅知政事·政堂文學·知門下省事 등 「宰五」(宰臣5職)가 소속하여 국왕과 더불어 국정을 의논하는 의정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품계상 상서성의 상층기구인 尙書都省 역시 이같은 재상의 司로써 여기에는 정2품인 左·右僕射 등이 있어 일을 보았다. 하지만 이 기구는 앞 대목에서도 설명했듯이 정무를 처리하는데 발언권이 있는 권력기구가 되지 못하고 사무관청적인 성격이 강하였으며, 따라서 그 곳의 관원들 역시 자신의 지위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0297)邊太燮,<高麗宰相考-3省의 權力關係를 중심으로->(≪歷史學報≫35·36, 1967;≪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70∼74쪽). 그 내용에 관한 설명은 이 책 Ⅰ편 2장 1절 2항의 주 20) 참조. 이에 비해 오히려 중서문하성의 재부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기구는 중추원의 상층부인 樞府였다. 이곳 소속의 樞密·宰相인 判院事 이하 直學士까지가 「樞七」(樞密7職)로서 이들도 의정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史書에 자주 보이는 「兩府」·「宰樞兩府」니, 또는 「宰樞」·「宰五樞七」·「兩府宰相」이니 하는 서술들이 바로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고려에서는 국가의 중대사가 이들 宰樞의 협의에 의해 처리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유사한 위치에 있는 재상의 司인 재부와 추부를 함께 설치해 놓고 국사를 같이 보게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재·추 상호간의 견제적 작용에 본뜻이 있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국가의 중사가 재부의 독단으로 처리되는 것을 막는 하나의 제동기적 조처로 같은 재상의 위치에 있는 추부를 따로 설치한 게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더구나 재추회의는 議合이라 하여 만장일치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데서 더욱 그러한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재·추간의 견제작용은 재상권의 분화를 뜻하며, 그것은 곧 왕권의 안정과 관계가 깊다.0298)邊太燮,<高麗의 政治體制와 權力構造>(≪韓國學報≫4, 1976), 29쪽. 하지만 귀족사회체제였던 고려사회에서 중추원 추부가 현실적으로 과연 어느 정도 그 본래의 취지에 맞게 기능하였을까는 의문시되는 점이 많다.0299)朴龍雲,<高麗의 中樞院 硏究>(≪韓國史硏究≫12, 1976), 97∼98·136∼138쪽. 양부재상은 모두 귀족의 대표적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재신과 추밀이 상호 견제하는 작용보다는 같은 귀족의 입장에서 긴밀히 협조하는 면이 많았다고 했을 때 왕권은 오히려 이들에 의해 제약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 고려의 정치적 실정은 후자의 경우가 더 현실에 가까운 이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정치권력이 이들 재추에게 집중되도록 짜여져 있었다. 그같은 사실은 무엇보다 兼職制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0300)兼職制에 대해서는 張東翼,<高麗前期의 兼職制에 대하여 (上)·(下)>(≪大丘史學≫11·17, 1976·1979) 및 崔貞煥,<高麗 中書門下省의 祿俸規定>(≪韓國史硏究≫50·51, 1985;≪高麗·朝鮮時代 祿俸制硏究≫, 慶北大出版部, 1991, 96∼99쪽) 참조. 중서문하성의 재신은 三司와 翰林院의 판사 및 史館의 監修國史·修國史·同修國史를 겸직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고, 또 비록 그와 같이 법제화되어 있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 여러 요직을 겸임하는 예가 많았으며, 중추원의 추밀 역시 臺諫의 최고직 등을 두루 겸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권력구조상 더욱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재신이 정무집행기관인 상서 6부의 判事를 겸직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상서 6부는 문선과 훈봉의 정사를 관장한 吏部와, 무선·군무·우역 등의 정사를 관장한 兵部, 호구와 貢賦·전량의 정사를 관장한 戶部, 법률·사송 등을 맡은 刑部, 예의와 제향·조회·교빙·학교 등을 맡은 禮部, 그리고 산택과 工匠·영조를 맡은 工部를 말하거니와, 이들 각 부서의 장관인 尙書는 정3품으로 재상의 모임인 재추회의에는 참석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는 상서 위에 판사를 따로 두고 중서문하성의 재신으로 하여금 겸직하게 하였다. 즉, 그들은 상서 6부의 서열에 따라 首相이 判吏部事, 亞相은 判兵部事, 三宰는 判戶部事와 같이 차례로 내려가 六宰가 判工部事를 겸직하도록 법제화되어 있었던 것이다.0301)邊太燮, 앞의 책, 79∼82쪽.
―――,<高麗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體系-尙書省機構를 中心으로->(≪歷史學報≫47, 1970;위의 책, 17∼18쪽).
거기에다가 상서직도 중추원의 추밀이 겸직하는 예가 많았으므로, 상서 6부는 자연히 재추양부, 그 중에서도 특히 재부의 통제에 놓이게 마련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高麗史≫권 76 백관지 서문에서도 “그 입법한 처음의 시기에 재상은 6부를 통할하고, 6부는 寺·監·倉·庫를 통할하였다”는 설명을 붙여 놓고 있다.

 고려 때의 재추는 이처럼 의정기능을 하였을 뿐 아니라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집행기구인 상서 6부를 장악하였던 만큼 그들의 권한은 그만큼 강화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왕권에 대해 제약적인 요소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물론 관점에 따라서는 상서6부가 자기의 소관 사무를 국왕에게 직접 아뢰고 처리하는 直奏制가 강조되어 있기도 하다.0302)邊太燮, 앞의 글(1976), 25∼26쪽. 하지만 재신이 겸하는 6부 판사제가 따로이 마련되어 있는 당시에 있어서 직주제가 어느 정도의 실효성을 갖는 제도였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지 않다. 판사제가 없는 조선에서 6曹直啓制를 채택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왕권의 강화와 같은 효과를0303)末松保和,<朝鮮議政府考>(≪朝鮮學報≫9, 1956;≪靑丘史草≫1, 笠井出版社, 1965, 269쪽). 고려에서는 거두기가 어려웠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0304)姜晋哲,<邊太燮著≪高麗政治制度史硏究≫書評>(≪歷史學報≫52, 1971), 134쪽.

 고려시대의 정치체제는 재추 중심이었다는 이해가 가능할 듯싶다. 그리하여 왕권도 이들에 의해 상당한 제약을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같은 점은 이미 처음으로 국가의 기틀을 잡아 가던 성종조부터 논의된 바 있었다. 즉 崔承老가 時務策을 올리는 가운데 왕권의 전제화에 반대하면서, 군주는 신하들을 예우하며 넓은 포섭력을 가지고 아랫 사람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0305)≪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그리하여 국왕과 귀족관료가 권력의 조화를 이루면서 원만하게 국가를 운영하여 갈 것을 건의하고 있거니와, 고려의 정치체제는 그런 점에서는 비교적 잘 균형이 잡힌 권력구조였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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