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3. 중앙 정치체제의 권력구조와 그 성격
  • 1) 중앙 정치체제의 권력구조
  • (2) 국왕과 재추와 대간

(2) 국왕과 재추와 대간

 고려시대의 권력구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또 하나의 조직으로 대간이 있었다. 대간이란 臺官과 諫官을 합하여 부르는 명칭으로, 이 중 간관은 중서문하성의 하층부를 이루는 郎舍 소속의 散騎常侍(常侍)와 直門下·諫議大夫(司議大夫)·給事中·中書舍人·起居注·起居郎·起居舍人·補闕(司諫·獻納)·拾遺(正言) 등을 말하며, 대관은 御史臺(監察司·司憲府) 소속의 判御史臺事·御史大夫·御史中丞·雜端·侍御史·殿中侍御史·監察御史 등을 일컫는다.≪高麗史≫권 76 백관지에 의하면 이들 가운데 간관은 군주의 불가한 처사나 과오에 대하여 힘써 간언하는 諫諍과 부당한 조칙을 봉환하여 駁正하는 封駁을 담당하였다고만 전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활동 사항을 검토해 보면 이들에게는 署經權도 부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서경은 다시 문무관의 임명에 있어서 비록 국왕의 재가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들이 심사, 동의하는 서명을 해야 비로소 효력을 발생하게 한 告身署經과, “신법을 세우고 구법을 고치며 喪 중에 있는 인원을 起復시키는데” 있어서도 같은 절차를 밟게 한 依牒署經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얼핏 보더라도 간관의 직능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간관의 직임에 비해 대관의 그것에 대해서는 역시 동일한 백관지에 “시정의 論執과 풍속의 矯正, 그리고 규찰·탄핵을 관장하였다”고 보인다. 이들은 그때 그때의 정치나 시책에 대한 집요한 언론과 常道를 벗어난 풍속의 단속 및 백관의 비위·불법을 규찰 탄핵하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 아울러 이들에게도 물론 서경권이 주어져 있었다.

 이같은 대관과 간관의 직능을 놓고 볼 때에 각각은 임무가 조금씩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자는 주로 군주를 대상으로 하여 간쟁을 담당하였는데 비하여 전자는 주로 관료들에 대한 감찰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면 살펴 보면 양자의 직능 한계는 명확치 아니한 점이 더 많이 나타난다. 대·간은 같은 언관으로서 다같이 시정의 득실을 논하고 있을 뿐더러, 간관이 관료의 비법·탐학 등을 논죄하고 있는가 하면, 대관들도 군주에 대한 간쟁 등 간관의 직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서경권도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권한이었거니와, 그렇기 때문에 「臺諫一體」라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대간」이라는 용어 자체에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들은 흔히 같이 상소를 올려 군주의 과실과 백관의 비위를 논하여 서로 보조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대·간은 상호 깊은 유대를 가지고, 한편으로는 왕권 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추와 일정한 관계 위에서 중요한 정치적 기능 을 수행하였다. 그러면 먼저 이 중에서 왕권과의 관계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 점에 있어 대간은 왕권을 규제하는 쪽으로 많 이 기울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이들에게 부과된 시정의 논집이나 서경·간쟁·봉박 등의 직임 자체가 그러하거니와 실제로 그 직임을 수행하는 과정을 고찰하여 보더라도 그러한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0306)金龍德,<高麗時代의 署經에 대하여>(≪李丙燾華甲紀念論叢≫一潮閣, 1956), 482∼484쪽.
朴龍雲,<臺諫制度의 成立>(≪韓國史論叢≫1, 1976, 43∼47쪽;≪高麗時代 臺諫制度 硏究≫, 一志社, 1980, 170∼174쪽).

 물론 이와는 의견을 달리하는 입장도 표명되어 있다. 대간의 기능은 왕권을 억제한 면보다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는 쪽으로 더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0307)宋春永,<高麗 御史臺 관한 一考察>(≪大丘史學≫3, 1971), 21·32쪽. 원래 대간제도란 왕조측이 자기 보완의 한 방법으로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의 간쟁은 국왕이 반성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그리하여 국왕의 행위나 정책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한 것이 사실이고 또 그것이 본래의 목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은 바라는 바의 목적론이요 당위성의 이론일 뿐 실제적인 권력관계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鄭諴의 閣門祗候職 제수를 둘러 싸고 야기되었던 당시의 국왕 毅宗과 대간 사이의 충돌에서0308)≪高麗史≫권 122, 列傳 35, 宦者 鄭諴. 잘 나타나듯이 고려시대의 역사적 현실은 국왕이 대간의 간쟁이나 서경문제를 德政的 자기반성의 계기로 삼은 예에 못지 않게 정사에 자기의 의사를 관철시키고자 대간과 서로 날카롭게 대립한 사실이 허다했던 것이다.

 다음 宰樞와의 관계를 보면 역시 유사한 양상이었던 것 같다. 이들도 대간의 직권에 의해 자신의 진퇴는 물론 직책의 수행상에서도 감찰을 받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양자는 이와 같은 규제·대립의 관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호 긴밀히 협조하는 다른 일면도 보이는 까닭이다. 우선 양자는 같은 臣僚의 입장에서 왕권에 대하여는 공동운명체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 같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고려왕조는 귀족제사회였으며, 대간직은 바로 그들 귀족의 중요한 官路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간에는 조직적인 면에서도 그같은 유대의 소지가 마련되고 있었다. 앞서 지적한 바도 있듯이 대·간의 장관을 재추가 겸임한다던가, 또는 간관이 성재가 있는 중서문하성의 하급관원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던가 한 데서 양자간의 밀접한 관계를 살필 수가 있는 것이다.0309)朴龍雲,<高麗時代의 臺諫과 宰樞文武兩班>(≪誠信女大論文集≫12, 1979;앞의 책, 227·234쪽). 여진과의 전쟁에서 일시 패한 尹瓘과 吳延寵의 죄를 청할 때에 성재들이 대간과 「더불어[與]」 상소·논핵하고 있고,0310)≪高麗史≫권 13, 世家 13, 예종 4년 11월·5년 5월.
≪高麗史節要≫권 11, 의종 5년 5월.
또 大 寧侯 璟과 鄭叙의 탄핵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재상들이 간관을 「거느리고[率]」 논죄하고 있는데,0311)≪高麗史≫권 90, 列傳 3, 宗室 1, 大寧侯 璟. 그같은 면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 생각된다.

 요컨대 대간은 왕권과 재추 각자와, 그리고 이것들이 서로 얽힌 속에서 규 제와 협력의 두 측면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치현실 위에서 어떤 면이 어느 정도로 작용할 것이냐는 그것이 처하고 있는 여러 여건에 의하여 달라졌겠거니와, 고려에서는 대간과 재추간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던 조직상의 특성이나 귀족제적인 사회체제로 보아 양자 사이에는 규제보다 협력관계가 강하였고, 그에 따라 왕권과의 관계에서는 그의 규제 기능에 주안점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지금까지의 검토에서 확인되듯이 고려에서는 권력구조상 왕권에 대한 제약적 요소가 강했다는 것이 큰 특징을 이룬다. 이것은 재삼 되풀이되는 이야기이지만 고려가 귀족제사회였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체제하에서 국왕과 재추·대간이 권력의 균형과 조화를 잡아가는 가운데 국가의 원만한 운영이 이루어졌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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