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1. 지방 통치조직의 정비와 그 구조
  • 1) 지방 통치조직의 정비
  • (1) 국초(태조-경종대)

(1) 국초(태조-경종대)

 고려시대에 지방제도가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成宗代이다. 성종 2년(983) 2월에 처음으로 전국에 12牧을 설치하는 한편 今有·租藏을 罷하였다.0330)≪高麗史節要≫권 2, 성종 2년 2월. 太祖代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崔承老는 그의 上書文에서 “우리 聖祖(太祖)께서 (후삼국을) 통합한 뒤에 外官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저 초창으로 인하여 일이 번거로워 겨를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0331)≪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새 왕조의 초창기여서 일이 번거로워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이 시기 지방의 호족세력이 강대했던 반면 중앙 행정력이 극도로 미약했기 때문에 지방관을 파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태조는 다만 西京을 경영함으로써 왕실세력의 기반을 보완하거나 군사상의 목적으로 鎭과 都督府·都護府 등 특정지역을 경영하였을 뿐이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지 불과 석달만에 착수하였던 서경에 대한 경영은 처음에는 북방민족에 대한 국방상의 의의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부터는 국방면보다는 국내 정치상의 필요성, 즉 미약한 왕실 세력의 기반을 육성하려는 취지에서 활발히 추진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이에 따라 서경에는 본격적으로 행정기구가 설치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서경은 고려 왕실의 강력한 세력 기반이 되어 고려의 권력구조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0332)河炫綱,<高麗 西京考>(≪歷史學報≫35·36, 1967).
―――,<高麗 西京의 行政構造>(≪韓國史硏究≫5, 1970).
李根花,<高麗 成宗代의 西京經營과 統治組織>(≪韓國史硏究≫58, 1987).

 군사상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지방에 대한 시책은, 이 시기에 군사적 요지에 설치된 鎭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0333)李基白,<高麗 太祖時의 鎭>(≪歷史學報≫10, 1958;≪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또한 태조 때에는 도독 부·도호부 등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미 태조는 원년(918) 9월에 平壤을 도호부로 삼고, 堂弟 王式廉과 廣評侍郞 列評 등을 파견하여 그 곳을 지키게 하였고,0334)≪高麗史節要≫권 1, 태조 원년 9월. 태조 13년(930)에는 후백제와의 관계로 天安都督府를 설치하고 大丞 弟弓을 都督府사, 元甫 嚴式을 副使로 임명하였다.0335)≪高麗史節要≫권 1, 태조 13년 추8월. 그리고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후백제의 수도였던 完山(全州)에 安南都護府를 설치하였으며, 태조 23년(940)에는 신라의 옛 도읍인 慶州를 대도독부로 삼았다. 그러나 이 때 설치된 도호부나 도독부는 짧은 기간 존속하였을 뿐 제도화되지는 못하였다. 후대에 제도화되는 4도호부 또는 5도호부의 실질적인 기원은 광종대를 거쳐 경종대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된다.0336)李基白,<高麗 地方制度의 整備와 州縣軍의 成立>(≪趙明基博士華甲記念 佛敎史學論叢≫1966;앞의 책).

 군사상의 요충이나 왕실의 기반이 되는 서경과는 달리 호족의 지배력이 강한 지역에 대한 조치로는 태조 23년에 州府郡縣의 칭호를 고친 것을 들 수 있다.0337)≪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3년 춘3월.
≪高麗史節要≫권 1, 태조 23년 춘3월.
그 해의 지방제도 개편의 특징 중 하나는 대소 읍격에 관계없이 州가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0338)金甲童,<‘高麗初’의 州에 대한 考察>(≪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旗田巍는 고려 군현제의 특징으로서 府의 신설을 강조하다가, 최근의 글인<高麗王朝 成立期의 府와 豪族>(≪法制史硏究≫10, 1960)에서는 府가 신라 흥덕왕 때 이미 조성되었다고 하였다. 배종도도 같은 견해다(<新羅 下代 地方制度 개편에 대한 고찰>,≪學林≫11, 1989). 같은 해에 주부군현의 칭호를 고친 것에 대해서 태조의 군현 장악으로 적극적인 해석을 하려는 견해가 있으나,0339)邊太燮,<高麗 初期의 地方制度>(≪韓國史硏究≫57, 1987).
朴宗基,<高麗太祖 23年 郡縣 改編에 관한 硏究>(≪韓國史論≫19, 1988).
―――,<「高麗史」 地理志의 ‘高麗初’年紀 實證>(≪李丙燾九旬紀念論叢≫, 1990).
金甲童,<高麗 太祖代 郡·縣의 來屬關係形成>(≪韓國學報≫52, 1980).
일찍이 지적된 바와 같이0340)李基白, 앞의 글, 1966. 신라적 내지는 후백제적인 지방 행정체제를 명칭상으로나마 고려적인 것으로 개편하려는 데에 있었을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결국 태조 때의 지방통치 조직은 크게 호족의 지배력이 강한 지역인 주현지역과 군사상의 요충 지역인 진·도호부·도독부 지역, 그리고 왕실 세력의 기반이 되는 지역인 서경에 따라 각각 차이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惠宗·定宗은 지방에 대한 정책을 강구할 겨를이 없었다. 적대세력에 의하여 왕권이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었고, 그 재위 기간도 극히 짧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방에 대한 통제책은 광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광종은 즉위 이후 다소 안정된 왕권을 기반으로 지방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직접적인 사료는 아니지만 “정종 4년(949)에 광종이 즉위하여 원보 式會·원윤 信康 등에게 명하여 州縣 歲貢의 액수를 정하게 하였다”는 기사0341)≪高麗史≫권 78, 志 39, 食貨 1, 田制 貢賦.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광종이 지방 주현에서 바치는 세공 액수를 정하였다면 이 사무를 관장할 관원도 임명하였을 것이다. 이런 外職이 바로 고려 국초의 今有·租藏이 아니었던가 한다.

 금유·조장의 임무는 확실치 않지만 「租藏」이라는 관호에서 租賦의 징수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0342)邊太燮은 이와 함께 지방 향호도 통제했을 것으로 보았는데, 뒤에 金杜珍은 租藏은 조세징수, 今有는 지방세력을 통제하는 임무를 지닌 것으로 보았다(邊太燮,<高麗 前期의 外官制>,≪韓國史硏究≫2, 1968;金杜珍,<高麗 光宗代의 專制王權과 豪族>,≪韓國學報≫15, 1979). 그러나 檢務租藏이었던 柳邦憲의 아버지 柳潤謙이 지방 향호였고, “이제 가만히 보건대 鄕豪가 매양 公務를 빙자하고 백성을 침폭하니 백성이 견디지 못합니다”라고 한 崔承老의 언급으로 미루어 보아 지방 향호도 통제하였으리라고 보긴 어렵다(<柳邦憲 墓誌>,≪朝鮮金石總攬≫上, 朝鮮總督府, 1919). “금유·조장은 外邑使者의 號이다”0343)≪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라든지, 지방관 파견은 성종 때에 실현된다는 사실로 보아, 이들은 지방에 상주하는 외관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지방에 파견되어 부과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임시직이었다. 금유·조장이 설치된 시기는 자료엔 국초라 하였지만 앞의 주현 세공액을 정한 것과 관련해 보면 광종 때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서울로 운송되는 주현 세공의 수집처인 漕倉도 광종 때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고,0344)≪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漕運에 十二倉의 설치 기사가 보이는데, 이는 광종 때의 제도 정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최승로가 광종 때에 조정의 儀制가 자못 볼 만한 것이었다고 하고 있는 점도 참고가 될 것이다.0345)≪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이와 더불어 금유 조장이 설치된 지역은 12牧과 같은 지방 행정의 거점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12목의 설치 때에 혁파되는 것으로 보아 그런 추측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금유 조장이 수취 한 주현 세공액은 轉運使를 통하여 서울로 운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운사 역시 그 임무로 미루어 보아 광종 때에 설치된 것이 아닌가 한다.

 요컨대 광종이 즉위하면서 주현 세공액을 정한 것을 기점으로 금유·조장 과 전운사를 설치하며 지방의 租賦를 징수 보관하고 轉運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호족세력에 의해 지배되던 지방에 중앙 행정력이 침투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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