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1. 지방 통치조직의 정비와 그 구조
  • 2) 지방 통치조직의 구조
  • (3) 주목 중심의 도와 안찰사

(3) 주목 중심의 도와 안찰사

 고려시대에는 그 직책이 지속적인 兩界 兵馬使 및 각 주부군현에 배치된 외관과는 별도로 중앙의 필요에 따라, 중앙 관인을 지방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맡겨진 직능은 그때 그때의 편의상 일시적으로 부과되어, 그 임무가 끝나면 곧 그 직책도 자연히 해소되는 것으로서 직무 체통이 명확하게 설정되고 준수된 것은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고려시대 지방관에 의해 대변되는 중앙 집권의 조직적인 행정력이 여말에 이르도록 지방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0405)고려시대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河炫綱의 앞의 책을 참조할 것. 고려 일대를 통하여 수많은 관인들이 다양한 명칭을 띠고, 지방에 파견된 것은 위와 같은 사정의 한 예이다.0406)고려 때 파견된 다양한 지방관에 대해선 河炫綱의 위의 책 참조. 고려 후기 道制0407)사실 엄격히 따지면 道制라 부를 수 없다. 그러나 뒤에 행정구획으로 정착되는 선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편리한 대로 정해 본 것이다.와 按察使도 이 같은 전제하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 후기 도제의 특성은 州牧 중심이라는 점이다. 문종 10년(1056) 9월 갑 신조 기사에서 후기 도제의 편모가 등장하여0408)이때 山東南忠慶尙都撫問使·山南晋羅全淸廣公洪州七道撫問使·關西北關內三道撫問使·關內東道撫問使 등의 직명이 보인다(≪高麗史≫권 7, 世家 7, 문종 10년 9월). 선종 4년(1089)의 기사에서 후기 도제의 일면을 찾게 된다.0409)出推使를 파견했는데, 侍御史 崔思說을 全晋羅州道에, 尙書兵部員外郎 李瑋를 慶尙州道에, 閤門祗候 尹瓘을 廣忠淸州道에 보냈는데, 여기에서는 10道制의 잔재인 山東南·山南·關內 등의 명칭이 떨어져 나갔다(≪高麗史≫권 10, 世家 10, 선종 4년 12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중앙의 행정력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지방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이 필요할 때에 수시로 그 구획을 결정하여 여러 임시 외관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元이 洪茶丘를 監督造船官軍民總管으로 삼아 役을 동원할 것을 재촉하자, 왕이 樞密院副使 許珙으로써 全州道指揮使로 삼고 右僕射 洪祿遒로 羅州道指揮使로 삼은 것은,0410)≪高麗史≫권 27, 世家 27, 원종 15년 춘 정월. 이와 같이 어려울 때에 그 구획을 아주 좁혀서 명령계통 을 강화시키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시대 도의 용례는 매우 다양하였고,0411)고려시대 道의 용례는 ① 구체적인 방면을 나타낼 경우 ② 交通路로서의 경우 ③ 막연한 방향을 나타낼 경우 ④ 지방제도로서의 경우로 대별해 볼 수 있다. 그 개념도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관인의 파견 기록과 나란히 나오는 도명은 행정상의 명칭이라기보다는 교통로일 때가 많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관인을 파견할 때 늘 이용하던 것이 교통로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시 지방행정의 근간이 되어 오던 중요한 고을의 이름과 어울려서 자주 호칭되면서부터, 나중에는 점차 행정적인 면으로서의 성격을 띤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고려 후기의 안찰사는 중앙의 입장에서 영현을 순찰 감독하는 직책이었다. 안찰사는 사안에 따라 몇 개의 주목을 순찰 구역으로 정하고, 업무를 수행하였다. 안찰사의 업무로는 ① 수령 賢否의 黜陟 ② 問民疾苦 ③ 刑獄의 審治 ④ 租賦의 수납 ⑤ 군사적 기능 등을 들 수 있다.

 요컨대 안찰사는 왕명에 의해 지방행정의 감찰임무를 띠고 파견되던 관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기도 6개월이면 되었고,0412)≪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凡選用監司 명종 11년 9월. 5·6품의 微官이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0413)按察使를 道의 長官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邊太燮,<高麗按察使考>(≪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를 참조.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서 비록 제도상으로는 많은 지방세력이 중앙행정력의 통제 속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지방세력이 완전히 무력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우선 각 지방 행정단위에 지방관이 고루 파 견되지 못하였던 조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고려 전기는 물론이요. 고려 후기까지도 지방관이 배치된 지역보다는 배치되지 않은 지역이 훨씬 많았다. 따라서 지방관이 배치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지방 吏職이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고려 말기까지 지방에 수시로 파견된 임시직의 가장 큰 임무가 지방 이직의 감찰이었다거나 事審官制와 其人制度가 고려 말까지 존속하였다는 데에서 잘 알 수 있다.

 고려적인 지방제도가 해체되는 것은 고려 말기인 우왕 이후가 아닌가 한 다. 이 무렵에 와서야 비로소 수령의 임무가 지방 이직을 감찰하는 데에서 지방 행정의 담당자로 바뀐다거나, 상급기구로서의 道制가 이전의 감찰기능에서 행정기능으로 바뀌는 등의 사실에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뒤에 조선 초기의 지방제도 정비는 바로 이러한 방향에서 이루어져 갔다. 고려 정부는 국초부터 말기까지 지방제도 정비작업에 나섰지만, 실질적으로 고려 초기 이래의 지방 통치조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 못하였다는데 주요한 특징이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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