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2. 군현제도
  • 2) 특수행정조직-향·부곡·소·장·처·역-

2) 특수행정조직-향·부곡·소·장·처·역-

 고려에서 일반 군현의 하부구조로서의 특수 행정조직인 향·부곡·소·장·처 등의 기원과 존재형태, 그리고 그 성격에 관한 가장 대표적이면서 종합적인 기록은 다음의≪新增東國輿地勝覽≫의 내용이다.

이제 살펴 보건대, 신라가 州郡을 설치할 때 그 田丁이나 戶口가 縣에 미달하는 곳은 鄕을 두기도 하고 部曲을 두기도 하여 所在邑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때에는 또한 所라고 칭하는 것이 있었는데 金所·銀所·銅所·鐵所·絲所·紬所·紙所·瓦所·炭所·鹽所·墨所·藿所·瓷器所·魚梁所·薑所 등이 구별이 있어 각기 그 물건을 바쳤다. 또한 處와 莊으로 칭하는 것이 있었는데 각각 궁전과 사원 및 內莊宅에 나뉘어 소속하여 그 세를 바쳤다. 위의 諸所에는 모두 土姓吏民이 있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7, 驪州牧, 古跡 登神莊).

 위의 사료에 의거할 때, 첫째 향과 부곡은 전정이나 호구가 하나의 독립 고을이 될 수 없는 곳에 설치한 것이며, 그 소재읍에 각각 소속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향·부곡의 성립 시기는 신라가 주·군을 세울 때부터이며, 그리고 소·장·처의 성립기는 고려시기부터인 것으로 각각 기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셋째 생산기능에 있어서 향·부곡·처·장은 농업생산을 하는데 대하여, 소는 광산물, 해산물 및 특수한 수공업 생산물을 생산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구분하고 있다. 넷째 위의 여러 所에는 그곳의 土姓吏民이 있다는 것이다.0434)金炫榮,<고려시기의 所에 대한 재검토>(≪韓國史論≫15, 1986), 97∼98쪽. 그리고≪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향·소·부곡의 총수는 785개이고 그 가운데서 296개가 경상도 지방에 있었다. 더욱이 부곡은 전체수 406개 가운데 그 절반이 넘는 217곳이 경상도에 집중적으로 산재해 있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부곡의 전성기는 고려 이전의 신라시대로 추측되기도 하지만,0435)金龍德,<鄕·所·部曲攷>(≪白樂濬華甲紀念 國學論叢≫, 1955), 181∼182쪽. 신라를 포함한 삼국시대의 부곡 등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아마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주군현의 관할 밑의 지방행정체계 속에 포함되어 있었을 터이지만, 그 밖의 자세한 것은 거의 알 수가 없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향과 부곡은 전정이나 호구가 하나의 독립 고을이 될 수 없는 곳에 설치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성종 2년(983) 6월에 제정한 각급 지방행정단위에 대한 田柴 지급 규정에 의하면, 일반 주군현을 1,000丁 이상의 큰 것에서부터 20丁 이하의 작은 것까지 구분하는가 하면, 향·부곡의 경우도 1,000정 이상의 것에서부터 50정 이하의 것까지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향·부곡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많은 혼선을 야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서 일찍부터 다음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향·부곡=천민집단설이 제기되어 왔다.

① 본시 永州의 梨旨銀所는 …옛날에는 縣이었는데 중간에 읍민이 국명을 어겨서 폐하고 백성을 적몰하여 白金을 세로 물게 하였는데, 銀所라고 칭하게 된 지가 오래 되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27, 河陽縣 古跡).

② 毅宗 15년에 縣人 子和 등이 鄭敍의 妻를 誣告하고 縣吏 仁梁과 더불어 임금과 대신을 저주함에 자화를 강에 던지고 현을 강등하여 部曲으로 삼았다(≪高麗史≫권 57, 志 11, 地理 2, 陜州 感陰添).

③ 군현민과 津·驛·部曲人이 交嫁하여 낳은 자는 모두 진·역·부곡에 속하게 하고 진·역·부곡과 雜尺人이 交嫁하여 낳은 자는 똑같이 나누고 남는 수는 母에 따른다(≪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향·부곡의 발생 자체가 전쟁포로의 집단적 수용지나 또는 본래 일반 군현이었다 하더라도 반역 및 적에의 투항 등 국가에 대해 중대한 범죄가 발생한 군현을 강등하여 향·소 부곡을 삼는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그리고 향·부곡민은 죄인이거나 그와 같은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신분상 천인일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여 왔다. 그리하여 부곡인은 형벌상 奴와 동등하게 취급되었으며, 자손의 귀속문제에 있어서 천인의 취급을 받았고, 과거에도 응시할 수 없었으며, 승려가 되는 것도 금지되어 있는 등 여러 가지의 사회적 제약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울러 所民에 대한 처우도 대략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아 같은 천인으로 취급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통설에 대한 반론이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즉 향·부곡인=양인이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이들은 향·부곡인=천인설을 주장하는 논자들이 든 논거가 향·부곡민이 천인이었다는 적극적인 자료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령 ‘不許入國學’이나 ‘不許赴學’ 등의 규정은 그 주민 일반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향·부곡의 長吏에 국한시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인가 하면, “賤鄕部曲人等子孫”도 종래에는 ‘천한 향·부곡인 등의 자손’으로 해석하여 향·부곡인 천인설의 중요한 근거로 삼았으나 실은 이것도 ‘천인 향·부곡인 등의 자손’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고려시대에는 천민인 이상 姓氏가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향·부곡에도 군현과 같이 각기 「土姓吏民」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를 천민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이다. 실제로 14세기 후엽의 나주목 거평부곡을 중심으로 그곳에서 천민집단적 형체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논증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0436)李佑成,<高麗末期 羅州牧 居平部曲에 대하여>(≪震檀學報≫29·30, 1966). 따라서 향·소·부곡의 소멸이란 역사적 사실을 종래처럼 천민집단으로서의 신분 해방이란 입장에서만 보지말고 사회경제적 발전추세와 함께 任內 주민의 성장과 자각 및 고려 내지 조선왕조의 지방 통치체제와 수취체제

 의 발전이란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군현의 건치연혁이 다양하듯이 향·부곡도 그 생성과정이 다원적이었을 것이며, 그야말로 현이 될 수 없는 규모에 향·부곡이 설치되기도 하였고, 인구증가와 신생촌의 발생, 혹은 越境地의 발생에 의해 읍치의 외곽지대나 각 읍의 접경지역에서 군현보다 늦게 생성된 것도 있다고 보았다. 물론 이들은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피정복민이나 포로를 집단적으로 수용하는 경우와 반역향을 총체적으로 천민화하는 경우, 또 이민족을 집단적으로 일정한 지역에 거주시키는 경우에 의한 향·부곡의 발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 역시 대체적으로 사회변동이 크게 일어나고 군현제가 개편되는 무신집권기 또는 몽고 침입기 이후부터 점차 양인화의 길을 밟으면서 일반군현과 마찬가지의 존재로 변질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 이들 향·부곡·소는 모두 소멸되어≪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이미 고적조에 실릴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0437)李樹健,<直村考>(≪朝鮮時代 地方行政史硏究≫, 民音社, 1989).

 이러한 논쟁의 과정에서 부곡제를 점차 군현제와 연결시켜 이해함으로써 고려 군현제에 대한 확대된 시각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고려 군현제는 내부적으로 상층구조인 주·부·군·현 등 군현제 영역과 하층구조인 향·소·부곡·장·처 등 부곡제 영역으로 구성되는 다원적인 구조를 이루었음을 지적하면서 고려의 사회경제적 원리, 구체적으로 고려국가의 수취체계 일반과 관련시켜 접근하는 방식까지 나오고 있다.0438)朴宗基, 앞의 책. 실제 향·부곡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수취체계 하에 놓여 있었는가 하는 점은 그들의 사회적 존재형태를 가늠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기사는 향·부곡민들의 부담 내용을 보여 준다.

三司가 아뢰기를 “東京管內의 州·府·郡·縣·部曲 19곳은 작년의 오랜 가뭄으로 인해 民이 많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청하건대 令文에 의거하여 4分 이상의 손실에 대하여는 租를 면제하고, 6分 이상의 손실에는 租와 調를 면제하고, 7分 이상의 손실에는 課役을 모두 면제하되 이미 바친 자는 내년의 조세를 감해 주십시오.”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숙종 7년 3월).

 위의 자료를 통해 우리는 향·부곡민이 租·調·課役을 부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밖에도 향·부곡은 稅布와0439)≪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恩免之制 숙종 5년 3월. 잡물 및 徭貢을0440)≪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災免之制 숙종 7년 3월. 부담하고 있다. 각각 세목의 구체적 내용이나 상호관계에 대한 충분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지만 향·부곡민도 기본적으로 일반 촌락의 농민이 부담하는 기본 세목인 3세를 나란히 부담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국가에 대하여 동일한 수취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0441)具山祐,<고려시기 부곡제의 연구성과와 과제>(≪釜大史學≫12, 1988), 27∼28쪽.
朴宗基, 앞의 책, 120∼121쪽.
따라서 부곡민과 일반 군현민은 직역의 내용은 다를지언정 기본적으로 국가 수취체계 하에서 각각의 직역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동질적인 존재로 볼 수 있다.0442)朴宗基, 위의 책, 121쪽.

 고려의 수취체계 하에서 상호 이질적인 두가지 유형의 부곡인이 존재하였다. 즉 특정의 역에 집단적으로 동원되는 부곡인과 일반 군현민과 동질적인 존재로서의 부곡인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는 결국 동일 유형의 부곡인으로서 각기 다른 측면에서 이들의 특성을 밝힌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부곡인은 일반 군현민과 동일한 생산기능을 가지면서 부가적으로 국가직속지의 경작과 같은 특정의 역에 집단적으로 동원된다는 사실이 일반 군현민과 동질적인 존재이면서도 굳이 부곡인으로 구분되어 표기되는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 靈山部曲이나 居平部曲에 나타나는 부곡인은 대체로 일반 군현민과 동질적인 양인신분으로서의 존재로 규정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부곡인은 일반 군현민에 비해 보다 가혹한 역에 시달리게 되는 존재로 규정될 수 있다.

 다음으로 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그 기원에 있어서 소는 향과 부곡이 이미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던 경우와 달리 고려조에 들어와 처음 발생하였다. 그러면서도≪三國史記≫지리지에 보이는 成이나, 신라말 지방토호들의 개별적인 수공업장이 고려에 들어와서 소로 재편성되었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0443)金炫榮, 앞의 글, 99∼100쪽.

 고려 시기에 소의 성립시기 및 所民의 제부담에 관한 실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사료들로 다음의 것이 주목된다.

① 고려 때에는 소라고 불리어지는 것이 있었는데, 금소·은소·동소·광소·사소·주소·지소·와소·탄소·염소·묵소·곽소·자기소·어량소·강소의 구별이 있으며, 각각 그 물품을 바쳤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7, 京畿道 驪州牧 古跡 登神莊).

② 大司憲 柳寬 등이 상소하기를 前朝에 주부군현을 설치하고 또 任內에 향·소·부곡을 두었다. 1주 임내에 많은 것은 10여 현이 있었으며, 큰 현은 본관의 호수보다도 많았고 한 두 호장이 관리했다(≪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추 7월 을해).

③ 睿宗 3년 2월에 판하기를 “경기 주현은 常貢 외에 요역이 과중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받아 날로 점차 도망을 가고 유리걸식하니 主管所司는 계수관에게 그 공역의 많고 적음을 물어 작정 시행하라. 동·철·자기·지·묵의 잡소는 別貢을 징수하는 것이 너무 지나쳐 장인들이 괴로와하여 도피하니 所司는 각 소의 별공과 상공의 많고 적음을 작정하여 아뢰라”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위의 ①에서 소는 고려시대의 것이며, 지방의 특정 생산물인 광산물, 해산 물 또는 전업적 수공업품을 생산하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②에서는 향·부곡·소의 설치가 고려의 군현제 편제시기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이곳에서는 任內라는 용어에 주의해야 한다. 즉 임내란 글자의 뜻을 유념하면, 향·부곡·소는 국가가 직접 그 지역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주·부·군·현에게 맡겨진 영역임을 알 수 있다. ③은 특히 예종대에 접어 들면서 경기도 지역에 살고 있는 백정들의 유리현상이 속출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이 검토되고 있는 가운데 나타난 기록이다. 유이민 현상의 원인으로 주·현민의 상공과 요역의 과중을 들고 있으며, 소민들의 경우는 과중한 別貢을 통한 수탈을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다.0444)徐明禧,<高麗時代 「鐵所」에 대한 硏究>(≪韓國史硏究≫69, 1990), 4∼5쪽. 그런데 사료에 보이는 공역을 주현민이 부담해야 할 ‘공부 조달을 위한 역’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앞의 내용인 상공과 요역의 줄임말로 해석될 여지도 충분히 있다. 이러할 경우 주현이 부담해야할 공부가 현물만을 수납해야 하는 소와 다르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부·군·현·부곡·잡소의 금년 稅布를 반으로 면제하라”는 숙종 5년(1100)의 판을0445)≪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恩免之制. 통해 볼 때 소는 특정물품을 생산한다는 점에서는 일반 군현과 구별되어 기술되면서도 한편으로 일반 군현과 동일한 수취체계 하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0446)朴宗基,<高麗 部曲制의 構造와 性格>(≪韓國史論≫10, 1984;앞의 책), 82∼85쪽.

 그리고 소의 성립시기와 관련하여 위 사료에서 예종 3년(1108)에 소의 운영상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이에 대한 시정안이 검토되고 있는 점으로 보면, 적어도 예종 3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소 제도가 성립되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소의 성립 시기를 좀더 올려 잡아 태조 23년(940)을 기점으로 잡는 예도 있어 주목된다.0447)徐明禧, 앞의 글, 5쪽.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사료가 참고된다. “태조 23년에 이르러 비로소 주·부·군·현의 이름을 고쳤다”(≪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序文).

 한편 고려시대는 군현민 중에 국가에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그것을 명분으로 연대책임을 묻게 하여 철저하게 국가에 복속하게 하는 제도를 운영하려 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梨旨銀所의 경우 읍인이 국명을 어긴 점을 명분으로 은소로 삼은 것은 고려초기 소를 편제하는 기본방침이었던 듯하다.0448)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사료가 참고된다.
① 전조에 五道兩界의 驛子·津尺·部曲人은 모두 바로 태조대에 명을 어긴 사람들이니 모두 천역을 부담했다(≪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을사).
② 永州 梨旨銀所는 옛날에는 縣이었는데 중간에 읍민이 국명을 어겨서 폐하고 백성을 籍沒하여 白金을 세로 물게 하는 銀所라고 칭하게 된 지가 오래 되었다. 이제 그 土人 중에 那壽와 也先不花가 중국 궁정에서 사환으로 열심히 공로를 쌓아 그 공으로 본관을 올려 다시 현으로 삼았다(崔瀣,≪拙藁千百≫권 2, 永州 梨旨銀所 陞爲縣碑).

 고려시대의 소는, 전기에는 특수한 생산물을 생산하는 곳의 의미에 불과하 였지만, 후기로 오면서 향·부곡과 같은 임내로서의 확고한 지방 행정단위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소의 분포지역이 전국적이었다는 점은 확인되지만 고려의 양계지역은 군사적인 특수 행정지역이었기 때문에 극히 드물게 분포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비단 소 뿐만 아니라 향·부곡 등도 마찬가지였다.

 소의 생산물은 고려의 공부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고 소민의 부담은 주·현민들 보다 과중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소의 수취구조에 대해서는 앞에 제시한 예종 3년의 기사를0449)≪高麗史≫권 78, 志 32, 食貸 1, 貢賦 예종 3년 2월 判.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 여러 견해가 있다. 먼저 한 예를 들면, 그 기록을 통하여 볼 때 군현과 소에 대한 국가의 공부수취제도가 절차상 차이가 있다고 보고 주현은 主管所司, 즉 호부-계수관을 통하여 공부를 수취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소는 소의 공부를 특정관사인 所司에서 공부 부담액의 다소를 조절·결정하고 이를 다시 왕에게 상주하여 재가를 얻는 절차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군현을 매개로 하지 않고 국가와 소가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다.0450)北村秀人,<高麗時代の「所」制度について>(≪朝鮮學報≫50, 1969).

 다른 한 주장은 일반 촌락과 소의 수취체계상의 구별이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예종 3년의 사료에서도 주관소사와 소사는 같은 기관을 줄여 표현한 것이며, 경기 주현과 소간의 공부 부담상의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0451)朴宗基, 앞의 글(1984). 이와 다른 또 하나의 주장은 일반 군현이 상공을 부담하는 곳인데 대하여 소는 별공만을 특별히 더 부담하는 곳이라고 보고 있다. 상공의 경우는 중앙 각부가 계수관 혹은 군현을 통하여 각 촌민에게 부과하였는데, 별공의 경우는 중앙 각사가 직접 소와 연결하여 각종 별공을 거두어 들인 것으로 보고 있다.0452)金炫榮, 앞의 글. 그러나 이 견해는 일반 군현의 경우에도 별공이 징수되었다는 기존의 연구성과가 나와 있으므로0453)姜晋哲,<農民의 負擔>(≪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大出版部, 1980).
朴鍾進,<高麗前期 賦稅의 收取構造>(≪蔚山史學≫1, 1987).
재고의 여지가 있다.

 끝으로 한 예만 더 들면 위의 자료에서 “국가가 주·부·군·현을 설치하고 또 임내에 향·소·부곡을 두었다”라고 표기한 것을 고려해 볼 때 향·소 부곡을 설치한 주체는 국가이고 향·소·부곡을 관리하는 것은 주·부·군·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점을 유의해 보면 국가와 소가 직접 연결되어 수취관계를 맺고 있다거나 주·부·군·현에 임의로 소가 설치되기에 적당한 곳에 소를 설치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하면서, 결국 국가는 일반 군현과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 소를 지역에 맞게 설치하고 군현으로 하여금 관할하게 한 것으로 보고 있다.0454)徐明禧, 앞의 글.

 다음으로 고려시대 수공업 생산체제와 소의 관련성 문제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東國輿地勝覽≫에서는 금·은·동·철·사·주·지·와·탄·염·묵·곽·자기·어량·생강 등 15개 종류의 생산품을 생산하는 소를 거론하고 있다. 이를 유형별로 정리하면, 금·은·동·철과 같은 광산물, 비단·종이·먹·도자기와 같은 수공업 생산물, 소금·미역·생선과 같은 해산물, 차·생강과 같은 농산물로 분류된다. 즉 광산물, 해산물, 특수생산물과 같은 1차생산품과 수공업 생산물을 생산하는 곳이 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소를 수공업장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광의의 측면에서 고려시기의 수공업 생산체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0455)金炫榮, 앞의 글, 109쪽.

 ≪東國輿地勝覽≫의 편찬자가 금·은·동·철과 같은 광산물, 비단·소금·도자기·해산물·종이·먹·차·생강 등 현지성이 요구되는 생산물들을 생산하는 곳을 모두 소로 파악하고 있으나, 과연 그러한 곳들을 모두 소로 인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이곳들은 모두 각 지역의 특산물을 생산하는 곳으로 파악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행정단위로서의 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라는 것이 현지성이 요구되는 특산물이나 수공업제품을 생산하는 곳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소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현지성이 요구되는 특산물 또는 수공업제품의 생산지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소는 관영·민영 수공업과 함께 수공업 생산원료의 공급지로서 또는 수공업제품 생산지로서 고려시대 수공업 생산체제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0456)金炫榮, 위의 글, 110∼113쪽.

 요컨대 소는 반국가적인 행위 때문에 강제적으로 편성되어 그 주민들이 특정의 역에 집단적으로 동원되는 경우와 일반적으로 수령과 향리들이 특정물품의 생산을 위하여 주변 촌락민들을 요역의 형태로 생산활동에 동원시킨 경우의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이들의 보다 중요한 생산 활동은 군현민과 같이 역시 토지경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국가에 대하여 일정기간 부담하여야 하는 요역의 한 형태로서 특정물품의 생산에 참여하고 나머지 기간은 대부분 본래의 업무인 토지경작에 주력하였을 것이다. 소는 이러한 재정원칙 위에서 이루어지는 수취체계의 독특한 양식하에서 규정될 수 있는 역사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0457)朴宗基, 앞의 글, 94쪽.

 다음으로 莊·處에 대하여 주목해 보기로 한다.0458)莊·處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된다.
旗田巍,<高麗時代の王室の莊園-莊·處>(≪歷史學硏究≫246, 1960;≪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出版局, 1972).
李相瑄,<高麗時代의 莊·處에 대한 再考>(≪震檀學報≫64, 1987).
莊·處의 土地經營을 전문적으로 검토한 논문은,
姜晋哲,<高麗時代의 農業經營形態-田柴科體制의 公田의 경우->(≪韓國史硏究≫12, 1976;앞의 책, 1980)이 참고된다.
한편 장·처에 관한 부분적인 검토는 다음의 논고가 참고된다.
宋炳基,<高麗時代의 農莊-12世紀 以後를 中心으로->(≪韓國史硏究≫3, 1969).
金龍德,<部曲의 規模 및 部曲人의 身分에 對하여>(≪歷史學報≫88·89, 1980·1981).
朴宗基, 앞의 글(1984).
李樹健,≪韓國中世社會史 硏究≫(一潮閣, 1984).
具山祐, 앞의 글(1988).
장·처는 왕실을 비롯하여 궁원과 사인 등이 지배한 일종의 장원이다. 이는 신라의 녹읍과 연결되는 것으로 나말려초의 혼란 속에서 고려 왕실이 지방호족이 지배하고 있는 촌락의 일부를 취해 왕실의 직속령으로 삼은 것에서 비롯하며, 군현제를 정비하여 호족이나 그들의 족단을 군현제의 틀 속으로 흡수·편입하는 과정에서 莊이 전국적으로 설립되었다고 이해되어 왔다.0459)旗田巍, 위의 글 참조.

 그러나 장·처를 왕실직영지로서의 독자적인 존재로만 볼 수 없다. 즉 장·처도 국가적 수취체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말의 전제개혁론자 趙仁沃의 상소에 의하면 장·처전은 왕실의 직영지로선 국가의 재정정책과 무관한 존재이기보다는 국가적 토지분급체계 내에서 국가의 재정원칙과 관련하여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046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祿科田 신창 즉위년 7월. 엄격히 말해서 장·처전은 국가적인 토지분급제와는 무관한 궁원 및 사원 본래의 사적 소유지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정부가 料物庫 소속의 360 장·처전으로 선대에 사원에 시납된 전토를 모두 환수하려는 조치0461)위와 같음.는 장·처전이 궁·사원의 사유지와 달리 바로 국가적인 수취체계하의 존재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한편 장과는 달리 處는 충렬왕 때 왕실재정의 관리기관이었던 內莊宅의 재정이 고갈됨으로 인하여 내장택 대신 별도의 內房庫를 설치하고 토지겸병과 인구집중에 앞장서게 되면서부터0462)≪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科斂 충렬왕 15년 3월. 성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장·처민의 신분적 처지에 대해서는 견해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역사적 기록 속의 莊丁(戶)·處干을 결국 장·처의 주민으로 파악하려는 점에 있어서는 지금까지의 연구자들 간에 이론이 없다.

處干이란 남의 토지를 경작하여 租는 그 주인에게 바치고, 庸과 調는 관에 바치는 곧 佃戶이다. 당시 權貴들이 민을 많이 모아 處干이라 이름하여 3稅를 포탈하니 그 폐가 더욱 심했다(≪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7월 을유).

 여기서 장·처의 주민은 그들의 부담 가운데 조는 구체적으로 궁원·사원에 바치고 기타 요역·공물은 국가기관에 납부하는 처간으로 그 존재를 특징지어 볼 수 있을 듯하다. 결국 이들은 3세를 부담하는 셈이 된다. 아울러 처음에는 처간의 위치가 租만을 내는 존재에서 3세를 내는 존재로 변모하는 점에서 처의 지배력이 점차 성장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한편 莊戶의 부담에 대해서는 자세히 명시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지만, 궁원에 요역을 부담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하겠다. 그리고 처간이 「남의 토지」를 경작한다는 점에서 장·처의 주민이 자기 토지를 소유·경영하는 자영농민층이기 보다는 소작농 내지는 예속농민층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인옥의 상소에서와 같이 장·처전이 국가적 분급토지하의 존재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收租權의 입장에서 세의 귀속여부에 따라 수조권자인 왕실·사원은 田主로 보고, 실제 경작자이며 소유권자인 장·처의 주민은 佃客(佃戶)으로 간주하여 처간을 「남의 토지」 즉 왕실의 토지 경작자로 이해할 수 있다. 장·처의 주민은 결국 일반 촌락의 구성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리에서 이러한 생각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다만 그들의 소속이 국가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왕실이나 사원에 귀속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장·처전은 일반 민전과 동질적인 토지로 규정할 수 있고0463)姜晋哲, 앞의 책, 188∼191쪽 참조. 민전의 경작자와 마찬가지로 장·처전의 경작자도 결국 민전의 경작자인 일반 촌락민과 신분적으로 달리 규정되어야 하는 존재는 아닌 것 같다.046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租稅 현종 7년 정월·13년 2월.

 한편 장·처의 주민이 부담하는 일체의 요역이나 공물은 원칙적으로 국가기관, 구체적으로 군현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접어 들면서 일방적으로 장·처를 그들의 私領地로 삼으려는 현상이 빈번하게 된다.0465)≪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20년 9월 을해.

 장·처전의 생산과 조세수납에 관한 일반적인 행정은 莊·處吏들에 의해 수행되고, 그들은 그 밖의 향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국가로부터 일정한 토지를 지급 받는다. 결국 장·처는 왕실의 직영지이긴 하였으나 그들의 소유지는 아니며 장·처의 「吏」를 매개로 지배하는 단순한 수조지에 불과하였기에 그 현실적 소유주는 농민(장·처민)이었다. 이같은 장·처민들은 일정한 세를 그들의 지배자들에게 납부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민전의 소유자들이 국가에 대해서 부담한 세와 성질이 같은 것이며 다만 그 귀속이 다를 뿐이었다.0466)姜晋哲, 앞의 글 참조.

 다음, 驛站은 전근대사회의 교통통신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고 중앙집권적 통치를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고려는 일찍이 驛站制의 실시를 통하여 거의 전국적인 도로망을 가지고 있었다.≪高麗史≫병지 역참조에는 22개의 역도와 그에 소속된 525개의 역참명이 보인다. 이들 525개의 역참의 위치를 찾아 보면 그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역들이 360개이며, 그 위치를 비정할 수 있는 역들이 130개, 현재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역들이 5개이다.

 고려시대의 도로망은 군현제의 효과적 운영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고려시 대 도로망을 보면 계수관을 중심으로 한 간선 교통구(기본 도로망)와 그 밑에 여러 속군, 속현들을 거느리고 있는 지사부, 지사군, 현령관을 중심으로 한 지 선교통구(말단 도로망)가 형성되어 있었다. 즉 3경 4도호부와 8목을 중심으로 간선도로가 이루어지고 각각 그 밑에 지방관들이 파견된 5개의 지사부, 57개의 지주사, 29개의 현령관, 23개의 영·진들에 지선 도로망이 형성되었으며 그것은 다시 간선 도로망과 연결되어 있었다.0467)역과 관련하여 內藤雋輔,<高麗驛傳考>(≪歷史と地理≫34-4·5, 1934;≪朝鮮史硏究≫, 京都大 東洋史硏究會, 1961) 및 김은택,<고려시기 역참의 분포>(≪력사과학≫86-3, 1986)의 논문이 대표적인 것이다. 특히 후자는 고려시기 역참의 위치와 역참망의 분포도를 작성하여 고려역참제도의 전반적인 면모와 발전 정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高麗史≫지리지에 나타난 500개의 역참들을 연결하여 그 분포망을 그려 놓고 볼 때 22개 역도 분포의 북쪽 계선이 의주·안주·삭주·창주·연주·평로진·영원진·요덕·정주(정평) 등 천리장성의 계선과 일치한다. 이는 결국 22개 역도 분포망의 완성시기가 천리장성을 쌓은 11세기 중엽 이후에서 반몽고 투쟁으로 북방계선이 달라지는 13세기 초 이전시기라는 것, 즉 11세기 후반 기∼12세기라는 것을 의미한다.

 역참 분포망을 통하여 그 배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첫째 고려의 역참망은 봉건적 중앙집권 통치의 수단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 이유는 22개 역도의 525개 역참들이 모두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역참망을 형성하면서 사방으로 뻗어 나간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려의 역참은 수도 개경으로부터 서북쪽으로는 의주, 동북쪽으로는 정주(정평), 동남쪽으로는 동래현, 서남쪽으로는 진도현까지 여러 갈래로 이루어졌다. 이는 중앙에서 직접 지방관을 파견한 계수관과 지사부, 지사군, 현령관 등에 역참이 빠짐없이 배치되었음을 말해 준다. 둘째 고려시기 역참은 군사적 목적 실현에서 일정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고려의 전시기에 걸친 거란, 여진, 몽고, 왜구 등 많은 외래 침략자들과 부단히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특히 군사적 요충지였던 양계의 거의 모든 방어군, 진, 현령관들과 그 속현들에 역참이 배치된 것은 고려의 역참배치가 국가의 방위력 강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高麗史≫역참조에 양계지방의 역도와 역참을 5도(개성 이남)의 그것보다 먼저 기입해 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역참배치의 이러한 군사적 성격은 각각 10여 개∼40여 개씩 묶어서 이루어진 역도 편성에도 반영되었는데 이러한 역도들은 계수관 단위와 일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방 군사단위인 5도의 44군목도나 양계의 군사단위 편성과도 구별되었다. 이처럼 고려의 역도 편성이 군현단위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은 행정목적 보다 군사적 목적에 보다 큰 의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선의 역도에 비해 숫적으로도 2배나 앞서는 고려 역도가 군현단위로 편성된 조선의 역도와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고려의 역참배치는 국토의 지형조건과 교통조건, 말의 수송 능력들을 고려하여 평균 30∼45리, 좀 더 구체적으로는 약 38리에 하나씩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총 역참수가 525개이므로 역참로의 총길이를 가늠하면 2만여 리가 된다.0468)김은택, 앞의 글 참조.

 어떻든 역참은 정치·군사·경제상 요로에 설치된 역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는 역로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교량이 없는 하천에는 津이 있어서 도선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진에는 津尺이 있었는데 이들도 전체적인 도로망의 연결을 위해서는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역에 거주하면서 站役이라는 특정한 부담을 지고 있는 사람을 驛民이라고 불러 왔다. 이것은 요역의 한 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국명을 전달하거나 국가의 중대사 특히 군사적 긴급사항을 보고하는 따위의 일이었다. 이 밖에도 생산물의 운반이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또한 참역 이외에도 그들은 조세를 납부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역민이 개인적으로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적어도 역에 주어지는 公須田·紙田, 驛吏에게 지급되는 外役田은 바로 이 일반 역민들에 의해 경작되었을 것이다. 이 곳에서 경작하는 대신 조세를 바쳐야 했음이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들은 법제적으로 驛戶로 파악되어 왔다. 이 역호에는 그 밖의 촌락과 마찬가지로 역리가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일반 역민과 마찬가지로 참역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역민과 역리가 맡는 참역의 형태는 각기 달랐다. 역리는 노역의 직접 담당자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대개 한 역에 배치된 역리의 수는 역의 크기에 따라 2∼3명 정도였다.0469)≪高麗史≫권 82, 志 36, 兵 2, 站驛, 성종 2년 判. 이들은 「公館」에서 업무를 처리했다고 믿어진다. 하지만 역리 자체는 군현리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양자간의 공식적인 칭호부터도 달랐지만, 의복의 착용에 있어서도 차별을 두었던 것이다.0470)“드디어 驛의 이름을 고쳐 義興으로 하고 역리에게 冠·帶를 내려 주현의 리와 같게 하였다”(≪高麗史≫권 94, 列傳 7, 姜邯贊). 그러나 그들이 군·현의 吏와는 물론 구별되었지만 그래도 「長」이라고 공식적으로 지칭되었다. 따라서 역리는 일반 역민의 실질적인 「長」으로서 이들에 대한 노역의 분배·수취·감독 따위의 일을 주관하였을 것으로 보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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