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2. 군현제도
  • 3) 촌락의 구조

3) 촌락의 구조

 농민들의 생활근거지인 촌락은 앞에서 살핀 군현체제 내의 행정단위로서의 지역들인 주·부·군·현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밑에 있는 행정조직의 하부 단위이다. 따라서 촌락은 당시 민중들의 삶이 집약되어 있는 곳으로서, 전근대사회 촌락의 내부적인 조건이나 변화양상은 당대 사회구조의 성격 및 그 변화와 직결되므로 이에 대한 연구는 당시의 사회성격을 이해하는 중심 과제가 된다. 그러나≪高麗史≫와 조선 초기에 편찬된 여러 지리지, 즉≪慶尙道地理志≫·≪世宗實錄地理志≫·≪新增東國輿地勝覽≫등에는 고려시대의 촌락에 관해 극히 영세하고 단편적인 기록이 실려 있으므로 고려시대 촌락의 윤곽은 거의 밝혀져 있지 않다.

 최근 고려시대 사회구조와 그 기축으로서의 사회경제적 연구성과가 축적되면서 고려사회에 관한 새로운 조망이 가능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촌락에 대해 새로운 차원에서의 접근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0471)이 방면에 관한 李佑成의 업적은 고려시대 촌락연구의 기초를 다져 놓았고, 이후 연구에서는 대체로 이 설을 추종 내지 보완하는 입장이다.
李佑成,<麗代 百姓考-高麗時代 村落構造의 一斷面->(≪歷史學報≫14, 1961), 32∼39쪽.
―――,<高麗時代의 村落과 百姓>(≪高麗社會諸階層의 硏究≫, 成均館代 博士學位論文, 1974;≪韓國中世社會硏究≫, 一潮閣, 1991).
李泰鎭,<禮泉 開心寺 石塔記의 分析-高麗前期 香徒의 一例->(≪歷史學報≫53·54, 1972), 51∼53쪽.
武田幸男,<淨兜寺五層石塔形止記の硏究>(≪朝鮮學報≫25, 1972).

 그 결과 고려시대의 「촌」이란, 첫째 촌을 국가적 수취를 실현하는 매개체로 이해하고, 둘째 고려시대 수취의 단위가 되는 촌은 자연촌이 아니라 몇 개의 자연촌이 합쳐진 지역촌이라는 것이다. 즉 고려의 촌이 신라의 지역촌과 조선의 面里制의 과도적 단계로서 신라에 비해서는 다소 성장하였으나 여전히 지역촌체제였으며, 이러한 촌락의 지배자는 富農 중에서 선임된 村長·村正이며 이들이 바로 백성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국가적 수취의 단위가 되는 「지역촌」의 개념문제와 고려시대 촌락의 역사적 성격과 내부 구조의 변동양상 및 국가와 민중의 매개체로서 역할한 촌락의 기능 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고려시대 민중 지배의 매개체로서 국가가 조세와 역역의 수취를 위하여 인위적으로 설정한 촌의 성격을 구명하려 한 연구 등이 있어,0472)朴宗基,<13세기 초엽의 村落과 部曲>(≪韓國史硏究≫33, 1981) 및<高麗時代 村落의 機能과 構造>(≪震檀學報≫64, 1987), 41∼74쪽. 전자는 종래 촌락에 관한 주요 연구들의 연구범위가 주로 고려초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려중기 이후에 나타나는 촌락의 구조 및 발달과정에 대해 서술하고 있고, 후자에서는 촌락을 종래의 지역촌이라는 용어 대신 「行政村」이라는 용어로써 대체하여 사용하고 있다. 즉 행정촌은 조세의 징수와 치안의 유지 등 국가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필요에서 作爲的으로 구성된 촌락으로서 이미 중국 촌락연구에서는 연구자들간에 하나의 기본개념으로 통용되어 오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가 고려시대 행정촌제의 시행배경, 행정촌의 존재양상과 행정촌제가 고려의 사회구조속에서 차지하는 史的인 위치를 검토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주목될 만하다. 이에 앞서 고려의 촌락을 행정촌으로 이해한 연구로 李鍾旭,<新羅帳籍을 통하여 본 統一新羅의 村落支配體制>(≪歷史學報≫86, 1980)가 있다. 이상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고려시대 촌락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을 듯하다.

 고려시대의 촌은 거의 대부분 신라 帳籍에 보이는 沙害漸村 등과 유사한 자연촌락이었다고 이해된다. 이러한 자연촌락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몇 개가 합쳐진 일종의 지역촌을 이루기도 하여, 그것이 행정파악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고려시대 촌락의 이해를 도와 주는 자료의 결핍으로 자세한 내막은 잘 알 수가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신라는 人丁의 다과에 의해 9등급으로 나눈 戶等制를 실시하고 토지를 丈量하며 가축, 과수 등에 이르기까지 조사해서 촌락을 파악하여 조세·공부·요역을 부과 징수하였다.0473)姜晋哲, 앞의 책, 290∼292쪽. 여기에서는 戶나 口가 아니라 촌락 그 자체가 수취의 단위가 된 듯하다. 특히 남녀의 연령을 6등급으로 세분하여 그 동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수취의 주목적이 노동력지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촌락에는 농민들의 토지인 烟受有田畓 이외에 전체 경지의 4.9%에 해당하는 官謨田畓, 內視令田畓, 麻田 등이 있었는데, 이것은 촌민의 집단노동으로 경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村主는 촌락마다 있는 것이 아니며, 촌주가 없는 촌락은 이웃 촌락의 촌주를 매개로 해서 군현지배에 예속된 것 같다. 또한 촌주는 여러 촌락 중에서 가장 큰 촌락의 유력자가 선임된 듯하며, 이것은 관료로서가 아니라 촌민으로서 파악되었는데, 바로 이들이 일반 백성이 아닌 특수한 백성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매개로 군현은 3∼4명의 촌주를 이용하여 촌락을 지배하여 지방행정을 수행하였던 것이다.0474)旗田巍,<新羅の村落>(≪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415∼462쪽) 및 姜晋哲, 위의 책, 292∼293쪽. 그리고 李佑成, 앞의 책(1975), 36∼53쪽 참고.

 村長·村正에 의하여 운영되는 고려시대의 村政을 말하려면, 우선 고려시대의 촌의 구조와 유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촌이 지방조직의 하부 구조가 되는 중요한 매개고리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사료를 거의 발견할 수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이웃 나라인 중국의 향촌제도를 참고하면서 신라·조선의 촌락사회와 대조하여 그 중간에 위치했던 고려의 촌락을 그려 보기로 한다.

 중국의 鄕村制度는≪晋書≫職官志에서 밝혔듯이0475)≪晋書≫권 24, 志 14, 職官. 西晋時代에 이미 실시되었고,≪舊唐書≫식화지에서0476)≪舊唐書≫권 48, 志 28, 食貨 上. 알 수 있듯이 행정적으로 鄕里制가 편성되었으며, 그 편성은 일정한 호수를 기준으로 하였다. 이 향리의 기원은 멀리 先秦시대까지 소급되는 것이며 晋代를 거쳐 唐에 이르러 위와 같이 행정적 편제로 개조된 것으로 본다. 균전제와 부병제를 양대기간으로 하는 당대의 율령정치는 이 향리의 편제를 토대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로부터 중국의 지방제도를 모방하여 주부군현을 설치하면서도 향리의 제도는 실시하지 않았다. 지방제도의 상층 부분은 일단 중국식 군현체제를 갖추게 되면서도 그 하부에 있어서는 그대로 자연촌락을 온존시키고 있었던 것이 양자 간의 차이점이라 하겠다. 신라시대에 향리제가 없었다는 것은 신라장적에 의하여 알 수 있으며, 다음의 고려시대도 역시 향리제가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고려시기에 이르기까지 지방조직의 하부 단위는 여전히 里가 아니고 村이었던 것이다. 신라장적에 나타나는 사해점촌·살하지촌 등 촌락이 자연촌락이라는 것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0477)旗田巍, 앞의 글.

 이러한 촌락들의 지배양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한 사람의 촌주 지배범위가 한 개의 자연촌락이 아니라 몇 개의 자연촌락을 포함한 일종의 「연합촌」이라야 하고, 둘째 국가의 수취관계가 촌주로써 대표되는 일정한 「지역단위의 촌」을 대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촌을 자연촌과 구별하기 위하여 「연합촌」 혹은 「지역촌」이라고 불러 오고 있다. 이 지역촌의 촌주는 위로 군현에 대하여 지방 자치세력을 대표하고 밑으로 몇 개의 촌락을 통솔하는 지배자적 권위를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촌주는 물론 촌락(자연촌)의 출신이다. 그러나 여러 촌락 중에서 가장 유력자가 촌주로 되었을 것이다. 신라장적에 村主位畓이 있는 사해점촌이 다른 세 개의 촌락에 비하여 인구와 전지가 제일 많다는 사실은 이것을 설명해 준다.0478)李佑成, 앞의 책(1991), 42∼44쪽. 어떻든 촌주가 각 촌락마다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지역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군 단위로 보아서 촌주는 3, 4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지역촌은 성질상 중국의 「鄕」가 비슷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鄕」에 대한 기록으로 앞서 인용한≪晋書≫에서 보았듯이, 한 개의 현에 최소 2향으로부터 최대 4향을 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지역촌에 해당되는 조선시대의 「面」도 1군현 내에 보통 4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신라의 지역촌이 당시 군현 내에서 3∼4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졌던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다시 이 촌들은 문성왕 18년(856)에 주조한 竅興寺鍾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어떠한 차등에 의하여 상촌(제일촌), 제이촌, 제삼촌의 식으로 순위를 정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0479)<新羅竅興王寺鍾銘>(李蘭暎 編,≪韓國金石文追補≫, 亞細亞文化社, 1968).

 그후 고려 초에 오면 촌주의 등급 표시가 없어지는데, 태조 24년(941)에 세워진 慈寂禪師碑의 陰記에서 확인된다.0480)<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朝鮮金石總覽補遺≫, 朝鮮總督府, 1923). 여기에서 촌주들이 자신들의 지역표시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촌주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촌이 국가의 수취관계상 하나의 단위로 인식되며 인위적으로 설정되었을 뿐, 자연촌과 같이 유구한 형성과정을 통하여 독자적인 촌락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 고유한 명칭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국가가 그 수취관계의 편의를 위하여 군현단위로 촌의 등차를 정하여서 상촌·제이촌 등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0481)李佑成, 앞의 책, 45∼47쪽.

 신라장적을 보면 신라의 촌정은 하나 하나의 자연촌을 단위로 실태가 기술되어 있고 관모답이 각 자연촌에 균등하게 설정되어 있어서 국가의 관심이 여전히 이 자연촌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자연촌에 비하면 지역촌은 국가 대 촌락 간의 매개적 역할 이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 개의 고유명칭을 가질 정도의 독자성도 성숙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 지역촌이 중국의 향과 비슷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끝내 향으로 성립되지 못했으며, 그 칭호에 있어서도 자연촌과 혼미상태에 빠져 있어서 독립적으로 그 정체를 잘 드러내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지역촌은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존속되는 반면에 자연촌은 꾸준히 성장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里」로 바뀌어지는 것 같다. 다음의 사료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

① 淸道의 서촌 仇佐里는 민호가 101호이고 전지가 306결인데 府(밀양도호부)의 임내인 豆也保部曲을 越境하였고 부(밀양도호부)의 서촌인 來進里와 相入하였다(≪世宗實錄地理志≫慶尙道 密陽都護府).

② 越境處, 河陽縣의 남촌인 阿士也里는 민호가 30호이고 전지가 31결인데 府(경주부)의 임내인 仇谷部曲의 동촌 多文里에 월입하였다. 영천군의 북촌인 古新驛里는 민호가 4호이고 전지가 22결인데 부(경주부)의 임내인 竹長部曲의 남촌 只等伊里에 월입하였다(≪世宗實錄地理志≫慶尙道 慶州府).

 위의 기록을 볼 때 주변 군현내에 촌이 있고 촌내에 里가 있었음이 명백하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이르러 「里」가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은 우리나라 村制史上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미 「里」가 자연촌의 구각을 깨뜨리고 역사상에 등장한 이상 종래의 촌, 즉 지역촌도 그대로 존속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 성종 16년(1485)에 완성된≪經國大典≫에서도 촌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面」이 대신 등장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0482)≪經國大典≫권 2, 戶典 戶籍. 이 面里制度는 중국의 향리제에 상당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지방조직이 행정적 편제로 완성된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사료를 통하여 고려시대의 행정촌에 대한 규정과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종래의 이러한 고려시대 촌락에 대한 이해와는 달리 고려시대 촌락의 구조에서 행정촌제의 모습을 찾으려는 연구가 나왔는데 이 논리에 무리가 없다면 고려의 집권화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0483)朴宗基, 앞의 글(1987), 57∼60쪽에서 고려시대 행정촌제의 시행의 배경 등을 정치적인 면에서는 집권화과정과의 관련에서 찾고, 또한 촌락발달의 불균형을 해소하여 효과적인 촌락지배를 실현하기 위한 것에서 파악하기도 하고, 고려건국 직후부터 개경지역에 실시된 坊里制에서 행정촌제의 시원문제를 찾으려고 하고 있다. 촌성 배출지로서의 촌은 일반 자연촌과는 달리 토착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하고 있어 고려정부는 이들 세력을 재편하지 않고서는 원활한 민중지배가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이 같은 맥락에서 성종대 새로운 촌락지배층으로서 촌장·촌정제의 설정은 행정촌제가 고려 초기부터 시행되었음을 알려 주는 상징적인 조치로 이해하고 있다.

 고려시대 행정촌에 대한 법제적 규정은≪經國大典≫의 기사가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京外는 5戶를 1統으로 하고 지방의 경우 5統, 즉 25戶를 里로 삼아 里正을 두고 있다. 또한 1面마다 勸農官을 두되 「地廣民多」일 경우 헤아려 더 설치하고, 京에는 一坊마다 管領을 두고 있다. 이는 곧 서울에는 5호 1통을 기본조직으로 하고 지방에는 5통 25호의 리를 기본조직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떻든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經國大典≫이 반포될 무렵인 조선 전기 성종 때의 지방 군현에는 25호를 단위로 하는 행정촌이 법제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행정촌이 조선시대에 비로소 등장하는 것으로 파악한 경우도 있다.0484)有井智德,<李朝初期の戶籍法について>(≪朝鮮學報≫39·40, 1966). 그러나 그 시원문제에 있어서 직접적인 사료의 부족으로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고려시대의 행정촌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행정촌의 시원은 당연히 고려시대로 소급하여 모색해야 한다는 견해가 이미 발표되어 있다.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고려시대 행정촌제의 내용을 더 상세히 검토하기로 하자.

 ≪經國大典≫의 내용은 조선건국 이래로 당시까지 시행되어 왔던 문물제도 전 한에 관한 것을 세조대에 비로소 하나의 제도로서 법제화시킨 것이다. 행정촌제인 리에 관한 규정 역시 조선 초기 이래 운영되어 오던 것을 이 시기에 비로소 법제화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이보다 앞서 편찬된≪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이미 이 무렵 지방군현에는 里制가 하나의 뚜렷한 형태로서 드러나 있다.

 이로써 몇 가지 특징을 정리하면 첫째,≪世宗實錄地理志≫에서 나타낸 동촌과 남촌이 구체적인 촌락 명칭이기 보다는 막연한 방위명을 표시한 方位村으로 보이며 이러한 방위촌이 이후 점차 동면, 남면 등의 방위면으로 변화하게 되고 구체적인 지역명을 갖는 면은 중기 이후에야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0485)① “今上十一年己酉(1429) 割忠州東村里凡五 以屬之”(≪世宗實錄地理志≫忠淸道 延豊縣).
② “越境處, 儒城東村郎山里 越入縣南面”(≪世宗實錄地理志≫忠淸道 懷德縣).
③ “越境處, 陜川南村於等火里 草溪多乎帖里 越入新繁西村“(≪世宗實錄地理志≫慶尙道 宜寧縣).
결국 주지하듯이 조선시대의 면제는 실제 조선 중기 이후에야 성립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이유로≪經國大典≫에 리와는 달리 면의 규모에 대하여 구체적인 내용이 명시되지 않은 것을 들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이는 조선 전기에 면제의 성립이 불완전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기록과 같이 면의 하위 단위인 리에 관한 제도적인 성립은≪經國大典≫편찬 시기의 규정과 같이 조선 전기에 이미 확립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둘째,≪世宗實錄地理志≫에서 “忠州東村里凡五”와 같이 충주지역의 동촌은 여러 개의 里로 편성되어 있다.0486)위의 주 70) ① 참조. 당시 충주 동촌의 구체적인 촌락의 수는 확인할 수 없으나 1429년 당시에 이미 충주지역의 촌락이 행정적으로 여러 개의 리로 재편성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 경우의 리는 이 시기 행정촌제의 구체적인 단위로 이해되며, 나아가≪經國大典≫의 리제가 늦어도 이 무렵부터 존재하고 있음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한편 조선 전기에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鄕 지역에도 역시 리제가 확립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0487)≪世宗實錄地理志≫忠淸道 淸州牧.

 이상과 같이≪經國大典≫의 리제는 늦어도≪世宗實錄地理志≫가 작성되는 15세기 초엽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 이는 기록상으로 조선시대의 행정촌제가 15세기 초엽에 분명하게 시행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0488)朴宗基, 앞의 글(1987), 60∼61쪽.

 한편 조선 초기 행정촌제는 이 보다 앞선 고려시기에 이미 제도적인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다음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공양왕) 2년 12월에 憲司가 글을 올리기를 “우리 나라 백성은 유사시에는 곧 군인이 되고 무사시에는 농민이 되므로 군과 민이 일치합니다. 근래에 각 도의 節制使가 앞을 다투어 통첩을 내려 도내의 군현과 경기의 농민으로 하여금 비록 유사시에도 여러 달 동안 서울에 머무르게 함에…鄕社里長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절제사) 예속되니 나라에 불리하고 백성에게 불편합니다”라고 하였다(≪高麗史≫권 81, 志 35, 兵 1, 五軍).

 위의 인용문 가운데 「節制使」는 이 보다 한 해 전인 공양왕 원년(1389)에 설치되었다가 4년에 폐지된다.0489)≪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節制使. 절제사는 「將兵之任」, 즉 각 도의 군정을 전담하였으며 이 기구는 특히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되었다.0490)≪高麗史節要≫권 34, 공양왕 원년 12월. 憲司는 상소문에서 각 도의 절제사들이 무사시에도 일반 농민 뿐만 아니라 심지어 鄕社里長까지 동원하여 몇 개월씩 서울에 머물게 하는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鄕社里長」의 존재다. 위 문맥의 전후관계로 보아 향사리장은 일반 농민과 같이 전시에 동원되는 존재가 아니라 이들은 별개의 임무와 기능을 맡은 존재로 생각된다.0491)朴宗基, 앞의 글(1987), 62쪽.

 이 외에도 향사리장에 관한 기록은 2년 후인 공양왕 4년에 절제사와 향사 리장을 파하도록 요청한 沈德符와 裵克廉의 상소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0492)≪高麗史≫권 116, 列傳 29, 沈德符. 이로 미루어 보면 향사리장은 헌사의 상소가 있었던 공양왕 2년 이전의 시기부터 존재하여 오다가 동왕 4년에 폐지된다. 따라서 이 제도는 중국에서 시행되고 있던 제도를 고려에서도 모방하여 이 무렵에 실제로 시행되었던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坊里制 형식의 행정촌제가 시행되었던 개경에 1리마다 社長을 두고 이들로 하여금 인재교육과 풍속교정의 임무를 맡기게 하자는 기록이 있다.0493)≪高麗史節要≫권 33, 신우 14년 창왕 즉위년 8월. 여기 「里社長制」는 바로 「鄕社里長制」에 비견된다. 다만 「이사장제」는 개경에서 시행되는 것을 전제로 한 데 비해 「향사리장제」는 각 도의 주군에서 시행된 것으로 되어 있어 양자 간에는 실시 지역을 놓고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향사리장제」는 고려 말 인재교육과 풍속교화를 위하여 설치되었던 제도로 생각할 수 있으며, 「향사리장」의 존재는 결과적으로 고려 말엽에 이러한 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될 수 있을 정도로 행정촌제의 토대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음을 입증하는 셈이 된다.0494)朴宗基, 앞의 글(1987), 62∼63쪽.

 결국 고려시대의 이러한 행정촌제가 조선 초기로 계승되어지며, 그 구체적인 모습은≪經國大典≫에서 리제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행정촌제로서의 조선시대 리제는 이와 같이 고려시대 촌락의 발전선상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에서 행정출제의 제도적인 기반을 고려시대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여기서 고려시대 촌락의 성격을 우리 역사 발전과정에서 파악해 보기 위해 신라와 조선의 지방조직 중에서 촌의 변천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0495)李佑成, 앞의 책, 48쪽의 도표를 그대로 실었다.

新 羅 時 代 朝 鮮 時 代
慶尙道地理志 經 國 大 典
郡    縣 郡 縣 郡 縣
村(地 域 村)
村(自 然 村)

 신라와 조선의 중간에 처한 고려는 어떠했는가. 우선≪高麗史≫지리지의 西京屬縣條를 참고해 보자.

① 江東縣은 인종 14년에 경기를 나누어 6현으로 만들 때 仍乙舍鄕, 班石村, 朴達串村, 馬雜村을 합하여 이 현(강동현)을 만들었으며 현령을 두었다.

② 中和縣은 (중략) 인종 14년에 경기를 나누어 6현으로 만들때 荒谷, 唐岳, 松串 등 9촌을 합하여 이 현을 만들었고 현령을 두었다.

③ 順和縣은 인종 14년에 경기를 나누어 6현으로 만들 때 楸子島, 櫻遷村, 龍坤村, 禾山村을 합하여 이 현을 만들었으며 현령을 두었다(이상≪高麗史≫권 58, 志 12, 地理 3, 西京 屬縣).

 위의 세 현 중에서 강동현은 한 개의 향과 세 개의 촌이 합해져서 이루어졌고, 중화현은 아홉 개의 촌을, 그리고 순화현은 한 개의 섬과 세 개의 촌을 합한 것이다. 이 때의 촌은 어떤 촌이었을까. 만일 자연촌이라면 세 개 정도를 합쳐서 현을 이루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신라장적에 나타난 4개의 촌 중 가장 많은 호수가 15호밖에 안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고려시대의 자연촌락이 다소의 성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의 이 촌들이 지역촌이었을까. 신라의 군현이 몇 개의 지역촌으로 구성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여기 몇 개의 지역촌이 합해져서 하나의 현이 된다는 추론은 전혀 무리가 없이 통할 수 있다. 다만 앞에서 신라의 지역촌은 자체의 고유한 명칭이 없다고 했는데 여기 班石村, 朴達串村 등의 명칭이 붙어 있는 것은 신라의 지역촌이 고려에 들어오면서 그 만큼 자기성장을 이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중국의 「鄕」이나 조선시대의 「面」과 같이 되지는 못했으나, 그 자체의 독자적 명칭을 가질 만큼 지역성의 고정과 전통의 형성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0496)李佑成, 앞의 책, 47∼49쪽.

 그러나 이것은 西京 주변과 같은 선진지역에서 볼 수 있는 국부적 현상일 뿐, 아직 전국 군현의 지역촌들은 별반의 변화가 없었다. 게다가 선진지역의 지역 촌에 있어서도 그 내부에는 자연촌락이 그대로 온존되어 있었고 조선시대와 같은 「里」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지역적 독자의 명칭이 생기기도 하고 새로운 현을 성립시킬 정도로 충실해지면서 그 내부에 아직 자연촌락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시대 촌락의 구조상 특징으로 볼 수 있다.0497)李佑成, 위의 책, 49쪽.

 한편 고려시대 촌락의 유형과 관련하여 종래의 일원적인 이해를 탈피하고 사료에 나타나는 명칭을 중심으로 洞·里·村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 견해가 있다.0498)이에 관한 상세한 분석은 朴宗基, 앞의 글(1987), 43∼53쪽.

 첫째, 洞은 고려시대 행정적인 촌락이기 보다는 차라리 당시 일반 민들이 里나 村 등 해당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들어 雅稱할 때 관습적으로 호칭되는 경우가 더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즉 리나 촌이 각각 개경과 지방의 통치조직 지방의 고유한 촌락의 단위명칭으로 편재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동은 개경과 지방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사실에서도 뒷받침된다는 것이다.

 둘째, 里는 대부분 개경에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이 지역에 고려 초부터 坊里制와 같은 행정촌제가 시행되었던 사실에서 비롯한다. 개경 이외의 지역에서도 리의 사례가 다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지배의 속성상 가능한 한 이러한 통치방식을 확산시키려는 고려정부의 의지와 결부시켜 볼 때, 고려의 지방촌락이 개경과 같이 행정적으로 편재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여 준다.

 셋째, 村은 대부분 지방 군현에 분포되어 있다. 이는 촌이 지방 군현의 기초적인 촌락 단위임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촌은 내면적으로 일반 자연촌락을 의미하는 촌, 이른바 자연촌과 이 위에 사회적 의미가 가미된 촌성 배출지로서의 촌의 두 가지 계열로 나누어진다.

 다음으로 고려시대의 촌정을 촌장·촌정의 직능을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의 기록을 주목해 보자.

民長의 칭호는 鄕兵·保伍의 長과 같다. 즉 民 중에서 富足者를 선발하여 민장으로 삼았는데, 그 취락(마을)의 大事는 그 고을 관부에 나아가서 고하고 小事는 民長에게 속하게 했다(≪高麗圖經≫권 19, 民庶 民長).

 이 기록에서 민장은 ① 중국의 향병 및 보오의 장과 같다는 것, ② 민간 부족자, 즉 부농 중에서 선임한다는 것, ③ 촌내에서 발생한 사건 중에서 큰 일은 관청으로 가고 작은 일은 민장이 직접 관장한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②는 촌장·촌정의 출자를 말하는 것이고 ①과 ③은 촌장·촌정의 직능에 관한 것이다. 특히 ③은 촌장·촌정에게 일부 판결권이 위임된 듯한 것으로 隋代의 鄕正을 연상하게 하고, 고려의 村政의 한 특징이 된다고 하겠다. 그런데≪高麗史≫에서 이와 비슷한 기사를 발견할 수가 없고 다른 문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결국은 ①에 대한 자세한 검토로 초점을 돌려야 하겠는데 보오는 중국의 隣保組織을 말하는 것으로 고려의 촌락이 자연촌락이었다고 생각하면 이 인보조직은 아직 도입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0499)李佑成, 앞의 책, 49∼50쪽. 여기서 말하는 향병과 보오는 村留二三品軍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0500)李佑成, 앞의 책, 51∼52쪽과 姜晋哲, 앞의 책, 299쪽에서는 여기서 말하는 항병·보오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이른바 村留 二三品軍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주군의 이속인 호장과 부호장이 1품군의 별장을 겸임했던 것으로0501)≪高麗史≫권 82, 志 36, 兵 2, 五軍. 미루어 촌장과 촌정은 촌유 2·3품군의 책임자로 볼 수 있다. 이로써 고려의 촌락민은 촌유 2·3품군이라는 이름 아래 촌장·촌정의 지휘를 받으며 집단적인 노역에 종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동원된 노역은 아마 주로 왕실·국가 등에서 직영하는 토지를 경작하기 위한 노동인 것 같다.0502)姜晋哲, 앞의 책, 299쪽.

 한편 촌장·촌정의 활동은 때에 따라 반드시 「촌」내에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다. 고려 말에는 일반병정의 番上에 「鄕社里長」, 즉 촌장과 촌정이 같이 예속되어 있었던 것이다.0503)≪高麗史≫권 82, 志 36, 兵 2, 五軍. 요컨대 촌락의 책임자가 신라시대에는 군사조직의 핵심이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그 명칭부터 권농관이라 하였듯 순전히 농사관계만을 맡았던 것인데 고려시대에는 향병의 장이면서 동시에 권농관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만 전자보다 후자의 비중이 컸던 것으로 생각되는 점에서 시대적 추이를 살필 수 있다.0504)李佑成, 앞의 책, 52쪽.

 그러면 이제 출정을 주관한 촌장과 촌정의 신분문제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民長」의 복식에 관한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기록을 보면,0505)≪高麗圖經≫권 19, 民庶 民長. 머리에는 문라건을 쓰고(文羅爲巾) 몸에는 검은 명주 갓옷(裘)을 입고 검은 각대에 가죽신을 신었다고 하고, 아직 貢에 들지 않은 進士와 복식이 서로 비슷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민장, 즉 촌장·촌정의 복식이 촌내에 있어서의 그의 지위와 권위에 상응할 만큼 상당히 호사스럽다. 촌민에게 尊奉을 받고 있다는 이 민장, 즉 촌장·촌정의 복식은 일반 백성들의 복식과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촌장·촌정은 주현 이속과 같이 향직에 참여하지는 못한 것 같다. 주현이속에게는 1품에서 9품까지의 향직이 수여되었으며, 직의 품계에 따라 국가로부터 전시 지급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촌장과 촌정은 아무런 품계가 없었으며 科田도 받을 자격이 없었던 것 같다. 전시과체제하에서 과전지급의 대상에서 제외된 이들 촌장·촌정은 촌내에 있어서 아무리 존봉을 받더라도 신분에 있어서는 일반민과 다를 바 없는 백성 그것이었다. 이속과 더불어 지방 토착세력을 구성하고 있으면서도 이속과 같이 신분화·직제화되지 못한 사람들이 바로 이 촌장·촌정들인 것이다. 그것은 국가조직의 공적 기구가 군현까지를 하한으로 삼고, 그 이하의 촌은 권력기구에 직결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떻든 촌락의 책임자가 관인이 아니고 백성이었던 것은 신라나 고려, 조선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에는 그들의 지위가 떨어져서 그들이 담당하고 있었던 권농관·이정 따위의 직책을 庶孽賤流 외에 아무도 취임하려는 이가 없었고, 촌락의 책임자이면서 실질상으로 촌락을 지도할 능력이 없게 되었다.0506)李佑成, 앞의 책, 53∼54쪽.

 그러면 과연 이러한 촌락의 규모는 어떠했을까. 어떤 의미에서 이 문제는 조세수취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이 고려시대 力役의 징발과 조세의 수취는 호구를 단위로 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호구를 편성하는 기준은 한결같지 않았다. 우왕 14년(1388) 조준의 상소에서 그러한 사례를 살필 수 있다.0507)≪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戶口.

우왕 14년에 대사헌 조준이 상소하길, “…원컨대 지금 마땅히 量田하여 그‘경작지를 살펴 경작지의 多寡로써 戶를 정하여 상·중·하 3등으로 하고 良賤生口는 분간하여 (호)적을 만드소서…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戶口).

 위의 기사는 ‘所耕多寡’ 즉 토지소유량을 기준으로 戶는 상중하의 三等戶制로 편성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人丁의 多寡’에 따라 호를 9등으로 편성하는 경우도 있었다.0508)“編戶 以人丁多寡 分爲九等 定賦役”(≪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그러므로 고려시대의 편호제는 「토지소유량」과 「인정의 다과」 가운데 어느 한가지 기준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결국 역역징발과 조세수취는 이러한 호등편성의 기준을 전제로 하여 호를 단위로 이루어지게 되 었고,0509)朴宗基, 앞의 글(1987), 66쪽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姜晋哲, 앞 의 책, 265∼271쪽에서도 이러한 입장에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데, 특히 호등편성의 이러한 두 가지 기준을 놓고 대체로 인정의 다과를 우선으로 보고 뒤에 그 기준이 토지소유의 실태로 바뀌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역역징발과 조세수취의 실현을 위한 기초조직으로서의 행정촌 역시 호를 단위로 편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고려 성종 5년(986)의 전국적인 호구 조사는 사실 이듬해 본격적인 행정촌제 시행의 계기가 되는 촌장·촌정층의 설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 그것을 잘 나타내 준다.

 개경의 방리제 역시 3등호제를 기초로 역역징발 등 제반 역제편성이 이루어지고 있다.0510)≪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충렬왕 17년·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이러한 운영방식은 지방군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고, 이 때의 호는 自然家戶가 아니라 일정한 기준에 의해 편제된 編戶로 간주하고 있다.0511)朴宗基, 앞의 글(1987), 66쪽. 이러한 편호의 기준에 대한 내용과 관련한 예를 들면 중국의 경우, 唐의 ‘鄕里制’는 100戶 1里, 5里 1鄕으로 하고 있으며,0512)≪唐令拾遺≫戶令 第九, 開元七年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의 리 규모는 5호 1통, 5통 25호이다.

 다음의 자료는 대부분 개경지역의 것이기는 하지만, 화재지역의 호에 대한 기록이 里(洞) 단위로 되어 있어 행정촌의 규모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坊里制 아래의 리의 규모를 짐작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① (충선왕) 5년 정월 경술에 郭沙洞의 민가 11호가 불탔다(≪高麗史≫권 53, 志 7, 五行 1).

② (고종) 40년 4월 경술에 長峯里의 40여 호가 불탔다(≪高麗史≫권 53, 志 7, 五行 1).

③ (고종) 37년 5월 계미에 良醞洞의 민가 100여 호가 불탔다(≪高麗史≫권 53, 志 7, 五行 1).

④ (충숙왕 11년) 3월 정미에 地藏坊里의 300여 호가 불탔다(≪高麗史≫권 53, 志 7, 五行 1).

⑤ (의종 12년) 여름 4월에 新倉館里의 320여 호가 불탔다(≪高麗史節要≫권 11).

⑥ (충렬왕 5년 3월) 竹坂洞의 인가 300여 호를 철거하여 新宮을 짓는데 역부가 무릇 4천 명에 달하였다(≪高麗史≫권 29, 世家 29, 충렬왕 5년 3월).

 ①∼⑤는 리나 동의 화재에 관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화재의 피해를 입은 호의 규모가 최소 10여 호에서 최대 320여 호에 이르고 있다. 이 경우 호는 자연가호이다. 위의 기록에서 리나 동이 전소된 경우도 예상할 수 있으나 대부분 화재의 피해를 입은 가호의 수를 기록하고 있으므로 실제로 리를 구성하는 호의 규모는 이보다 컸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⑥은 신궁을 짓기 위해 동의 민가 300여 호를 철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경우 신궁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적어도 궁이 들어선 죽판동의 민가는 거의 대부분 철거되었을 것이 예상된다. 따라서 죽판동의 300여 가호는 실제로 리·동을 구성하는 호 전체의 규모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④의 지장방리 300여 호, ⑤의 신창관리 320여 호는 이 관계 기록으로서는 최대의 것이다. 이로 볼 때 고려시대의 里(洞)는 자연가호 300여 호를 단위로 하는 규모였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겠다.0513)朴宗基, 앞의 글(1987), 67쪽.

 한편 고려 말의 기록이지만 개경지역의 경우 자연가호를 일정한 기준에 의하여 대·중·소의 3등 편호제로 재편성하고 있다. 또한 효과적인 역역징발을 위해 이러한 편호방식을 외방의 민호에게도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대·중·소호 가운데 대호를 기준호로 삼아 중호는 둘, 소호는 셋을 각각 합쳐 기준호인 대호로 편성하고 있다.0514)≪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이에 근거하여 1리의 자연 가호 300호를 편호로 환산할 경우 최대 300호(300호 모두 대호일 경우)에서 최소 100호(300호 모두 소호일 경우)의 편호가 된다. 그러나 자연가호 300호가 모두 대호로 구성되어 있을 경우는 상식에 벗어난다. 즉 자연가호 300호 가운데는 실제 대호에서 소호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경우 산술적인 평균치인 중호를 기준으로 할 때 1리는 편호 150호의 규모가 된다.

 또한 우왕 때 李成桂는 安邊策의 하나로서 군사조직으로 100호를 1통으로 하는 이른바 「百戶統主法」의 시행을 주장하기도 하였다.0515)≪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五軍 우왕 9년. 그가 제안한 「백호통주법」은 이 때 처음으로 계획된 것은 아니다. 이미 공민왕 5년(1356)에 이와 유사한 내용의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말 당시 편호 100호 단위의 행정조직이 하나의 관행으로 운영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唐代의 행정촌인 1리가 100호라는 점과, 이 보다 훨씬 시대가 내려가는 조선시대의 리의 규모가 25호인 점을 감안하면 고려시대 행정촌의 규모는 대체로 편호 100호에서 150호 이내의 범위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0516)朴宗基, 앞의 글(1987), 68쪽.

 요컨대 고려시대 촌락의 성격은 고려시대 나름의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촌락, 즉 자연촌을 온존시키는 속에서 지역촌의 성향을 띠었고 역사의 진행과 맞물려서, 조선시대와 같은 완전한 里制인 행정촌은 아니었지만, 작위적인 편호제에 의한 행정촌의 모습을 서서히 띠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고려의 촌락은 그 규모가 어떠하든지 신라시대 촌락과의 계기적인 발전과정 속에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며, 조선시대 면리제를 성립시켜 주는 과도적 형태로서의 특징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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