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2. 군현제도
  • 4) 향리와 기인 및 사심관

4) 향리와 기인 및 사심관

 고려시대 외관을 보좌하여 지방행정의 말단을 담당한 것은 보통 長吏 또는 外吏라고 불리우는 향리층이었다. 이들은 각기 그가 속한 지역에 따라 州吏·府吏·縣吏·部曲吏 등의 명칭을 띠고 있었다. 향리들은 대민업무의 실질적 종사자로서 조세와 역역의 징수를 비롯하여 간단한 소송을 처리하는 등의 여러 가지 일을 맡고 있었고,0517)향리의 여러 가지 구체적인 직임으로는 文書와 錢穀 등의 기술적 관리를 통하여 국가 행정에 사무적인 뒷받침을 하는 刀筆之任(李佑成, 앞의 책, 3쪽 및 李惠玉,<高麗時代의 鄕役>,≪梨花史學硏究≫17·18, 1988, 296∼309쪽, 그리고 羅恪淳,<高麗 鄕吏의 身分變化>,≪國史館論叢≫13, 1990, 144쪽) 외에도 지방 군사조직의 장교로서 그 직무를 겸하기도 하였다(≪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권 75, 志 29, 選擧 3, 鄕職 및 李基白,≪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161∼218쪽, 그리고 千寬宇,<閑人考>,≪近世朝鮮史硏究≫, 一潮閣, 1979, 35∼36쪽 참고). 그 직을 세습했던 것이다.0518)고려시대 향리신분의 세습성과 통혼권에 관한 연구로는 許興植,≪高麗社會史硏究≫(亞細亞文化社, 1981), 131∼254쪽과 李樹健,≪韓國中世社會史硏究≫(一潮閣, 1984), 138∼352쪽이 참고된다.

 특히 고려시대 귀족관인의 물질적 토대가 되었던 전시과 제도는 지방군현의 향리들이 일선에서 「收租權」에 따른 행정을 원활히 집행할 때 그 유지가 가능하도록 구축되어 있었다. 이같은 측면에서 볼 때 고려 귀족관인층의 지배체제가 확립 발전해 오는데 향리층은 큰 몫을 담당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전시과제도와 군현제도 등의 제도적 발전과정에서 향리층은 귀족관인층의 아류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중앙에서 파견한 常駐外官의 수가 제한되었고 지방 토착세력인 향리층이 다수 편제되었던 대읍 중심의 고려 군현제의 특징상 향리층은 전시대의 말단 행정담당자들에 비해 그들의 재량권도 많이 부여되었다. 그만큼 상주외관들의 감시 감독을 덜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읍에 다수의 속읍을 소속시킨 대읍 중심의 군현제 하에서 주읍의 향리들이 활동할 공간은 그 만큼 많이 확보된 셈이고, 외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읍의 경우 향리가 사실상 수령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결국 대읍 중심의 군현제도는 향리들이 구조적으로 활동하기에 편리한 터전이었으며, 그들의 세력기반을 구축하기에 좋은 여건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직역을 담당한 향리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일정한 경제적 기반이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토착성을 바탕으로 한 家業田을 계승함으로써 지방사회의 유력자로서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며, 吏職의 세습을 통해 향리층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몽고의 침입 이후 향촌사회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鄕役의 변화가 초래되었다. 즉 지방생산체제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과중한 조세부과는 실무담당자인 향리 직역의 苦役化 현상을 빚게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향리들의 면역 내지 피역현상을 촉구하는 격이 되었다. 따라서 이후 지방에 남게 된 향리들은 다만 身役을 의무로 수행하는 존재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역사적 추이 속에서 성쇠소장해 갔던 고려시대의 향리는 나말려초의 호족에서 기원하며,0519)李純根,<羅末麗初 「豪族」용어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聖心女大論文集≫19, 1987), 112∼116쪽. 그 전환의 시기는 성종 2년(983)으로 추정된다. 즉 고려 개국이래 堂大等·大等 등을 칭하면서 兵部·倉部 등 중앙정부에 비견될 만한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던 호족들이 성종 2년에 이르러 지방관이 파견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마련되는 향리직제 속에 개편·편입되었던 것이다.0520)朴龍雲,≪高麗時代史≫(上)(一志社, 1985), 132∼133쪽 참조. 그 과정에서 대호족은 중앙관으로, 중소호족은 지방향리로 각각 편제되었다고 한다.0521)江原正昭,<新羅末高麗初の豪族>(≪歷史學硏究≫287, 1964).
朴敬子,<高麗 鄕吏制度의 成立>(≪歷史學報≫63, 1974;≪高麗時代 鄕吏硏究≫, 淑明女大 博士學位論文, 1986).
이러한 시각은 고려의 건국이 흔히 호족연합정권이라고 보는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성종대에 이르러 상주외관의 파견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각 지 방은 城主·將軍이라고 칭하는 호족들이 저마다 성을 쌓고 독자적인 군사력과 지배조직을 갖추고 있으면서 통치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왕조의 지배권이 확립됨에 따라 이들 호족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중앙정부의 이러한 통제의 방편으로 창안되어 제 도화된 것이 바로 지방제도의 개편과 아울러 실시된 향리제도 및 기인과 사심관제도 등이라고 흔히 논급되어 오고 있다.

 성종 2년에 처음 12목을 설치하고 상주외관의 파견과 향리제가 실시된 때는 고려왕조가 창건된지 이미 65년이 경과한 시기이다. 그 기간 동안의 대민정치, 즉 조부·공역의 수취와 감면, 그리고 유민안집 등의 정책은 어떻게 실시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상주외관의 파견 유무만으로 곧 군현제의 시행 척도로 삼을 수만은 없다. 나말려초의 과도기, 즉 후삼국의 대치가 종식됨과 동시에 각지의 호족 중에는 중앙의 집권층에 접근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자들이 대부분이었을지언정 대립적 자세를 취한 자들은 별로 없었다. 그 주요인은 이들의 세력기반이 중앙 지배층과 대결할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하지 못하고 중앙권력 지향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을 정도로 대부분 미약하였던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고려왕조는 태조이래 나말려초에 전국적으로 발생한 유민의 안집과 조부·공역의 효과적 수행을 위해 이미 군현의 구조적인 개편과 함께 새로운 직제를 설치하기도 하고 堂祭와 州吏 등을 새로 차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당시 지방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성주·장군들에게 지방통치를 위임하여 효과적인 군현통치를 기하고자 하였다. 태조 18년(935)에 신라의 경순왕 金傅가 투항해 오자 신라의 수도를 慶州로 삼고 金魏英을 州長으로 삼는 한편0522)≪高麗史≫권 97, 列傳 10, 金富佾. 태조 23년에 이르러 광평성으로 하여금 경주의 堂祭 관리를 새로 임명케 한 것은, 그러한 사정을 보여 준다.

天福 5년 庚子에 廣平省吏 白文色이 羅號를 除하여 安東大都護府로 삼고, 邑號를 慶州司都督府로 하고, 慶州堂祭 拾을 크게 改差하였다(許興植 編,<東都歷世諸子記>≪韓國中世社會史資料集≫, 亞細亞文化社, 1972).

 위 기록에서 백문색에 의해 改差된 10명의 당제의 실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뒷날 호장과 같은 존재들이 아니었던가 한다. 위의 당제가 설사 호장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중앙의 관인에 의해 지방의 행정기구와 관리 등이 개편·통제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태조 당시의 지방 행정관리의 존재는 비단 경주 뿐이 아니고 김해와 밀양 등지에서도 排岸使0523)≪三國遺事≫권 2, 紀異 2, 駕洛國記.와 府吏0524)≪新增東國輿地勝覽≫권 26, 密陽都護府 祠廟 城隍祠. 등이 존치하고 있었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고려 태조는 건국 초창기부터 귀순한 성주·장군에게 본읍, 혹은 타읍 을 녹으로 사여하여 지방통치를 실시함으로써, 귀순한 성주·장군 및 새 왕조의 창건을 지지·협찬한 제 세력의 이해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유민의 안집 및 조부공역의 수취와 관련한 제 시책을 펴나가고자 하였다. 이들은 최승로의 외관설치의 건의상소에서 “향호가 매양 공무를 가탁하여 백성을 침해하고 있다”는 지적의 대상인 향호이다. 이들 향호는 중앙에서 통일적으로 외관을 파견하지 못하고 성주·장군에게 군읍을 녹으로 사여한 군읍통치의 위임시대에 일선에서 지방행정을 담당하고 있었던 자들, 즉 성주·장군의 자손들로서 「堂祭」·「堂大等」·「豪右」·「豪家」·「豪富」 등으로 불리우면서 뒷날의 호장과 같은 존재로서 본읍의 향직 담당자였다. 이들 당제 등 향직담당자의 改差는 향호층에 대한 중앙정부의 일정한 통제를 행한 것으로서, 태조 이래 王親權勢之家에 해당하는 금유·조장의 파견과 함께 지방통치의 근본 목적인 조부공역의 부과 징수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향직의 담당자인 향호들이 매양 공무를 가탁하여 백성을 침해하여 지방민들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할 지경이고 외읍사자인 금유·조장이 권력을 남용함으로 인해 원성의 대상이 되자 성종 2년 금유·조장의 혁파와 12목의 실시를 통해 전국적으로 통일된 군현제의 실시와 더불어 향리직제에 대한 통일적인 지배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성종 2년에 주·부·군·현의 이직을 개정하여 병부를 사병으로 하고, 창부를 사창으로 하고, 당대등을 호장으로 하고 대등을 부호장으로 하고 낭중을 호정으로 하고 원외랑을 부호정으로 하고 집사를 사로 하고 병부경을 병정으로 하고 연상을 부병정으로 하고 유내를 병사로 하고 창부경을 창정으로 하였다(≪高麗史≫권 75, 志 3, 選擧 3, 銓注 鄕職).

 위의 기사를 도표화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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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吏職 개편의 특징은 먼저 신라식 유제의 청산에 있다. 즉 당대등이나 대등과 같은 신라식 명칭을 호장, 부호장으로 고친 것이다. 한편 종래에는 위의 사료를 바탕으로 향리제의 기원을 성종 2년으로 인식하여 왔지만0525)朴敬子, 앞의 글, 71쪽에서도 향리제도의 성립은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는 성종 2년에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확언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관련시켜 볼 때 이직 개정은 향리제의 시작을 명시해 주는 자료라기 보다 이전의 이직을 통합하는 의미가 더 큰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직 개정과 더불어 고려정부는 12목을 지방의 거점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성종 6년(987) 8월 12목에 각각 經學博士와 醫學博士 등을 파견하여 諸生들을 훈육시켜 훌륭한 인재로 양성하여 그들을 관료로 등용하겠다는 뜻을 내외에 천명하였다.0526)≪高麗史≫권 2, 世家 2, 성종 6년 8월. 이것은 의학과 경학 등의 교육을 통하여 12목을 지방 거점도시로 육성시키는 동시에 지방 토착세력의 자손, 즉 향호 당대등의 자제들을 관인신분층으로 흡수하려는 정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왕조의 이와 같은 정책은 지방의 토착세력까지 왕성인 개경으로 모두 흡수할 수 없었던 고육책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첫째, 지방의 토착세력인 향호세력을 관인신분층으로 흡수하여 왕조의 세력기반으로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요, 둘째, 대읍 중심의 군현조직의 형성·발전으로 인해 향리들의 광활한 활동무대가 확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종 9년(958)부터 실시된 과거제도는 지방 토착세력에게는 확실히 불리한 제도였다. 이에 따라서 지방 토착세력, 즉 당대등을 포함한 향리세력들이 큰 반발을 일으켰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들의 불만과 저항을 해소하기 위해서 성종은 우선 12목에 경학·의학박사 등을 파견하여 그들의 자제들을 교육시켜서 관료로 발탁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이로부터 향리자손(貢生)을 중앙관인으로 뽑는 「鄕貢進士」의 제도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0527)≪掾曹龜鑑≫권 1, 吏職名目解. 고려시대에 나타나는 ‘鄕吏三丁一子入仕’의 규정은 여말선초에 나타나는 ‘鄕吏三丁一子免役’의 규정과는 달리 향리에 대한 일정한 우대정책에서 나온 것이다.0528)金皓東,<朝鮮前期 京衙典 「胥吏」에 관한 硏究>(≪慶南史學≫1, 1984).

 성종 2년에 주부군현의 이직개편에 이어 동왕 6년 9월에 “諸村의 大監·弟監을 촌장·촌정으로 삼았다”고0529)≪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鄕職 성종 6년 9월 무진. 한다. 향리와 촌장은 다같이 군읍의 말단 행정을 담당하였던 계층이며, 그 연원도 대략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주부군현의 향리와 제 촌의 촌장은 그 기능면에서 각각 완전히 다르다. 신라의 소읍 단위의 군현제도를 재정비하고 새로운 대읍중심의 군현제도를 창설함에 따라 촌장세력들의 역사적 활동은 종식을 고하였다. 대읍 중심의 군현제도의 성립으로 인해 대읍지방의 토착세력(향리)들은 성장기반이 더욱 확고하게 된 반면에 속읍지방의 토착세력(촌장)들은 몰락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종 9년(1018)에 이르러 주현의 대소를 丁의 다과에 두고 그에 따른 향리 의 정원을 책정하고, 향리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고려시대의 주부군현 중에 최고 1,000丁 이상으로부터 최하 20丁 이하에 이르기까지 등차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성종 2년 2월에 제정되었던 주부군현의 공해전시의 지급규정에서도 나타난다. 주부군현의 등차에 따라 공해전시의 지급액을 차이가 있게 책정해 놓은 것은 관리, 특히 향리촌의 정원을 달리 책정해 놓을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현종 9년에 이르러 주부군현의 호장으로부터 말단 史에 이르기까지 각각 정원을 제정하였다. 이 때 제정된 향리의 정원수에 대한 것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州·縣別
  鄕吏層
丁別
一般州府郡縣 東西防禦使·鎭將·縣令官
戶 長
副戶長
兵倉正
副兵倉正
史 類 戶 長
副戶長
兵倉正
副兵倉正
史 類
1千丁 이상
5百丁  〃 
3百丁  〃 
1百丁  〃 
1百丁 이하
12인
9인
7인
-
5인
8인
8인
8인
-
4인
64인
44인
36인
-
22인
84인
61인
51인
-
31인
8인
-
-
6인
3인
8인
-
-
8인
4인
36인
-
-
38인
22인
52인
-
-
52인
29인

顯宗 9年 鄕吏定員表

 위 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주부군현의 등급에 따라 향리의 정원도 최고 84인으로부터 최하 31인에 이르기까지 달리 책정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호장·부호장의 정원이 12인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지닌다. 다수의 속읍을 대읍에 영속시킨 채, 외관의 극소화와 향리의 수적 극대화가 이루어진 대읍중심의 군현제 하에서 대읍의 호장·부호장을 비롯한 향리세력들이 만약 종적인 결합을 한다면 큰 정치적 집단이 될 수 있었던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한편 일반 주부군현의 등급에 따른 향리정원의 규정과 별도로 ‘동서 제방어사·진장·현령관’의 등급과 향리정원 등을 위의 주부군현과 거의 비슷하게 규정해 놓았다. 이렇게 그 양자를 구분해 놓은 것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 방위 체제의 구축을 위함이 틀림없다. 다만 이 당시의 향직제도를 포함한 군현제도의 정비는 거란의 침입과 연결시켜 농민에 대한 수취와 이들의 동원체제를 대폭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임이 분명할 것이다. 이것은 향직을 兵·倉正, 兵·倉史, 公須·食祿史 등으로 세분하고, 그 정원을 대폭 증원시킨 조치 등에서 파악할 수 있다. 향직 정비를 “지방세력에 대한 구체적인 통제책이 단행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것은 향리층에 대한 통제책보다 농민층을 지배하기 위한 강화책이요, 향리의 직임을 세분화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0530)千寬宇는 향직의 정비가 ‘향리통제’를 위한 것이나, 公須史·食祿史·客舍史·藥店史·司獄史 등 ‘史’급의 말단직이 첨가된 것을 보면 그만큼 향리의 직능이 분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閑人考>,≪社會科學≫2, 韓國社會科學硏究會, 1958;≪近世朝鮮史硏究≫, 一潮閣, 1979).

 현종 9년의 향리공복 제정은 향리계층이 귀족관인층의 아류로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高麗史≫여복지의 장리 공복조에 “현종 9년에 州府郡縣의 長吏공복을 제정했다” 하고, 호장으로부터 諸壇史에 이르기까지 각각 紫·丹·緋·綠·深靑·天碧衫 등의 彩衫을 입게 하 고, 또 靴笏 등을 착용케 하였다. 이것은 백관공복의 紫·丹·緋·緣과 구별된다. 이 구별은 귀족관인 신분층과의 차이를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吏職의 공복 제정은 이직에 대한 체계적인 통제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0531)河炫綱,≪高麗地方制度의 硏究≫(韓國硏究院, 1978), 26쪽.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향리의 공복제정은 농민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 요, 그들로 하여금 권위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조치의 일단이었을 것이다.

 향리층은 고려 문벌귀족사회가 확립 발전해 가는데 큰 몫을 담당해 왔다. 이들은 귀족관인의 아류 동반자로서 존재해 왔으며, 토착적 세력기반과 지방통치조직을 바탕으로 농민의 지배와, 그 자신들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2·13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전국적 농민항쟁의 와중에서 항쟁군의 중요한 공격대상의 하나가 지방의 향리층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언제라도 정치집단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왕조는 대읍에 수령을 보좌하는 판관, 사록, 혹은 장서기 등의 관원을 파견하여 상호장 등과 함께 군현행정을 처리하도록 하는 한편, 이들로 하여금 속읍을 순찰케 하여 주읍과 속읍의 향리들의 결합을 방지하고, 속읍의 행정을 감독케 하였던 것이다.0532)金皓東,<高麗武臣政權時代의 地方統治의 一斷面-李奎報의 ‘全州牧司錄兼掌書記’의 活動을 중심으로->(≪嶠南史學≫3, 1987) 지방관이 수행하여야 할 중요임무인 奉行 6條의 하나에 이직에 대한 감찰 조목이 설정되는 한편0533)≪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用守令. 그들로 하여금 지방의 호장을 직접 거망하여 給貼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0534)≪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鄕職. 및 이직에 대한 9단계의 단계적 승진규정의 제정은0535)위와 같음. 향리들의 세력화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던 것이다.

 한편 중앙정부의 향리에 대한 통제책으로서 주목을 끄는 것이 바로 기인제도와 사심관제도이다. 먼저 其人制度에 관해서는≪高麗史≫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국초에 향리자제를 選上하여 京城에 인질로 삼고, 또한 출신지의 일에 대한 顧問에 대비하게 하였으니 이를 其人이라 한다(≪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其人).

 여기서 기인제란 지방세력을 견제하고 회유하기 위한 집권적인 통제책의 하나로서 향리의 자제를 상경 시위하게 하는 제도임을 알 수 있다. 또 국초라 함은 태조 때를 의미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기인제의 기원에 관하여는 논자 간에 견해를 달리하고 있지만,0536)우리나라 기인제도의 변천과 그 성격에 대한 연구는 그 밖의 지방세력의 성쇠소장을 다룬 연구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일찍부터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중 기인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자 간의 상이함을 발견할 수 있는데, 즉 李光麟과 金成俊은 각각<其人制度의 變遷에 對하여>(≪學林≫3, 1954), 2∼5쪽과<其人의 性格에 대한 考察>(上)≪歷史學報≫10, 1958;≪韓國中世政治法制史硏究≫, 一潮閣, 1985, 49∼54쪽)에서 모두≪三國遺事≫권 2, 文虎王 法敏條에 실려 있는 車得公과 安吉의 이야기에 근거하여 그 시원을 삼국시대로 본 데 반해, 韓㳓劤은<古代國家成長過程에 있어서의 對服屬民施策-其人制起源說에 對한 檢討에 붙여서->(上)·(下)(≪歷史學報≫12·13, 1960)에서 그 시기는 고려 태조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밖에도 河炫綱,<地方勢力과 中央統制>(≪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의 논고가 있다. 고려 초에 확실히 향리의 자제를 기인으로 선정하였음에는 이론이 없다.≪世宗實錄≫세종 2년(1420) 3월 병신조의 기사 및≪掾曹龜鑑≫吏職名目解 安東金氏譜所引의 기사에는 호장의 자제를 기인으로 선상하였다고 하였으니 위의 사료에서 말한 향리는 향호의 후예인 호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질의 성격을 띠고 서울에 머무는 기인의 존재 필요성은 지방의 성주·장군들인 향호들에게 지방통치를 위임한 시대에 필요한 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문종 31(1077)년의 其人選上 규정의 기사를 보면 그간 기인제도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의 기사는0537)이 사료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金成俊, 앞의 글과 韓㳓劤,<麗初의 其人選上 規制>(≪歷史學報≫14, 1961) 등에서 상세히 언급되고 있다. 기인의 성격이나 역의 변질 양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기인은 1,000丁 이상의 고을이면 足丁이라 하여 나이 40세 이하 30세 이상의 사람을 뽑아 올려 보내게 하며, 1,000丁 이하의 고을이면 半足丁이라 하여 兵倉正 이하 副兵倉正 이상을 막론하고 부강정직한 사람을 뽑아 올려 보내게 하되 족정은 15년을 기한으로 하고 반정은 10년을 한정하여 입역케 하며, 반정이 7년에 이르고 족정이 10년이 되면 同正職을 허락해 주고 입역한 기한이 끝나면 관직을 더 준다(≪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其人).

 위 기사에서는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이 주목된다. 첫째는 기인의 신분문제이다. 문종대에 와서는 호장신분층이 기인선상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 같다. 병창정·부병창정 등이 지칭되고 있는 사실에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것은 고려 국초에 지방호족의 자제를 상경시킨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신분상의 변화는 기인의 역이 달라지는 데 연유하고 있다.

 둘째는 역의 내용이다. 고려 국초의 기인은 지방호족의 국왕에 대한 충성의 담보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다른 身役을 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문종대의 기인은 그 역의 내용은 분명하지 않으나 신역을 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문종대의 규정에 40세 이하 30세 이상이라고 연령을 밝힌 것은 신역의 부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천으로 지방 세력의 지위가 하락됨에 따라서 중앙에 선상된 기인을 노동의 인적자원으로 전용한 것 같다. 결국 문종대의 기인은 국초만 못하였지만, 여전히 역의 대가로 어느 정도의 대우는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일정기간 근무하면 동정직을 받게 되고 그 역을 마치면 加職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0538)河炫綱, 앞의 책, 91∼92쪽.
羅恪淳, 앞의 글, 159쪽.

 그러면 병창정 이하 부병창정 이상의 향리층에서 기인을 선정하는 규정은 언제 생긴 것일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료가 없지만 향호에게 지방통치를 위임한 상태에서 탈피하여 상주외관의 파견이 이루어지는 시기인 성종 2년의 주부군현의 이직개편이 있은 이후부터 문종대에 이르는 어느 시기가 아닌가 한다. 그것은 이 때의 이직개편으로 인해 지방세력이 중앙정부로 편입되면서 향리라는 명목을 가진 吏屬格으로 하락한 만큼 종래 강성한 지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발상에서 나왔던 기인제도상에도 일정한 변화가 있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다.

 그런데 기인 선상의 대상이 호장에서 병창정 이하로 바뀌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향리에 대한 통제의 강화라는 시각에서만 파악될 것이 아니라, 대읍중심의 군현제하에서 원활한 지방행정의 운영을 위해 호족의 후예였던 호장층에 대한 일정한 우대의 차원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과거 중에서 製述業·明經業에 응시할 수 있는 향리의 신분층을 부호장 이상의 孫과 부호정 이상의 子로 한정시킨 것과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기인은 중앙관서에서 이속격으로 잡무에 종사하면서, 諸業擧人의 選擧 때에 그 향의 赴擧者에 대한 신원조사를 맡아 보는 일이라든지,0539)≪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事審官 선발의 자문에 응하는 일,0540)≪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事審官. 당번을 나누어서 왕실을 시위하는 등의 일을 했다.0541)≪世祖實錄≫권 3, 세조 2년 3월 병신 集賢殿直提學梁誠之疏. 이러한 역의 대가로서 기인전의 지급0542)≪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및 동정직이 제수되었던 것이다.0543)≪高麗史≫권 75, 志 33, 選擧 3, 其人 문종 31년.

 고려 후기에 전국적으로 지방관 파견이 확대됨에 따라 토착적 세력을 유지하던 향리의 정치, 사회적 지위 전락과 더불어 기인역 또한 고역으로 변모하였다.0544)李光麟, 앞의 글, 7∼8쪽, 李成茂,<朝鮮初期의 鄕吏>(≪韓國史硏究≫5, 1970) 71쪽, 그리고 河炫綱, 앞의 책, 92쪽 참조. 예를 들면 고종 43년(1256)에 租賦의 감소에 따른 경비 보충을 위하여 閑地를 경작할 때 기인을 동원하고 있는 일이라든지,0545)≪高麗史≫권 79, 志 29, 食貨 2, 農桑. 충선왕 때 궁실의 수리·축조와 관부의 사령역을 맡아보는 일0546)≪高麗史≫권 83, 志 37, 兵 3, 工役軍. 등으로써 알 수 있다. 심지어 충숙왕 5년(1318)에는 기인의 役事가 노예보다 심하여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逋亡함이 끊이지 않을 정도까지 되었던 것이다.0547)≪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金成俊, 앞의 책, 74∼85쪽에서 기인역의 고역화 내지 천역화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열거하면서 비교적 소상히 서술해 놓아 참고된다.
이러한 기인역의 고역화 내지 천역화는 향리의 향역 변화의 실태와 흐름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려 말에 오면 기인이 身良役賤의 신세로 변모하게 되자, 기인제도의 존폐 논의가 있기에 이른다.0548)≪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其人 권 84, 志 38, 刑法 1, 職制·권 116, 列傳 31, 越浚 등에서 기인제도 존폐논의의 전말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적으로 긴요한 인적 자원이었기에 좀처럼 혁파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고려 말의 혁파논의에도 불구하고 기인제도는 조선조 광해군 때 大同法의 실시로 인해 사실상 기인의 역이 혁파될 때까지 비교적 질서있고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0549)조선 초기 기인제도의 운용과정에 대해서는≪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정월 병술·권 17, 태종 9년 4월 정축·권 31, 태종 16년 6월 병술,≪世宗實錄≫권 15, 세종 4년 3월 기묘·권 43, 세종 11년 2월 무자 등에 구체적 내용이 나타난다.

 기인제도와 더불어 호족세력을 무마 통제하기 위하여 고려정부에서 마련한 또 하나의 제도가 事審官制였다.0550)사심관제에 대해서는 일찌기 旗田巍를 비롯한 선학들에 의해 일련의 연구가 있었고, 그로써 사심관제의 기원, 임무와 역할, 그리고 그 성격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심관제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旗田巍,<高麗事審官について>(≪東亞≫8-2, 1935;<高麗の事審官>,≪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周藤吉之,<高麗朝の京邸京主人とその諸問題-唐末五代宋の進奏院邸吏および銀台司との關係において->(≪朝鮮學報≫111, 1984).
李純根,<高麗時代 事審官의 機能과 性格>(≪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洪承基,<高麗後期 事審官制度의 運用과 鄕吏의 中央進出>(≪東亞硏究≫17, 1989).
사심관제는 외관이 본격적으로 파견되지 못하였던 성종 무렵에 이르기까지는 지방통치에 있어서 핵심적인 기능을 수 행하였다. 사심관의 기원은 고려 태조 18년(935)에 신라 경순왕인 金傅의 來降記事에서 찾을 수 있다.

태조 18년 신라왕 金傅가 항복하여 왔다. 신라국을 없애고 慶州로 삼았다. 傅로 하여금 本州의 사심으로 삼고 부호장 이하 직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이때부터 여러 공신이 또한 이를 본받아 각각 그 본주의 사심관이 되었다. 사심관은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高麗史≫전 75, 志 29, 選擧 3, 銓注 事審官).

 그러나 김부에 대한 이러한 형태의 조치는 당시 귀부나 내항해 온 공신들에게 이미 베풀어지고 있었던 것이므로0551)韓㳓劤, 앞의 글(1960)에서 歸附豪族에 대한 대우는 단순히 나말려초라는 시기에만 독특한 것이 아니라 옛부터의 우리 나라 전통적인 대복속민 시책의 하나였으며, 특히 신라의 경우는 정치·사회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는 골품체제 형성과정과도 통하는 고대 국가영역의 중요한 확장원리로 이용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기원은 좀 더 소급될 수 있는 것이며, 다만 그것이 태조 18년 김부의 내항을 계기로 보다 구체화되고 제도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하면 사심이라는 역사적인 용어가 이 때 비로소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0552)이와 같은 새로운 해석은 李純根, 앞의 글, 187쪽에서 이미 제시되었는데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공신들도 이 제도에 따라 출신 本州에 대한 연고권을 바탕으로 그 권리를 공인받으면서 사심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본주란 본관의 주를 의미할 것인데 당시의 공신들은 거의가 호족출신으로서 중앙귀족화되어 있었지만, 그 본관에는 여전히 전통적인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어서 그 지방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앙정부에서는 이러한 공신들의 재지 세력기반을 이용하여 그 지방의 향리세력을 통제하려고 하였던 것이 결국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시기의 지방세력에 대한 유일한 통제수단이었다.

 그런데 고려의 지방통치는 수령-향리-지방민으로 이어지는 군현제도의 운영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실제로 지방통치에서 군현제도가 기본이 되어 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지방 통치체계의 수립은 적어도 성종대에 와서야 본격화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 지방출신으로서 그 지역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을 중앙의 관리로 복무하게 하면서 그 출신지역을 제압 지배하게 한 것이 사심관의 설치 목적이었고, 그것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볼 때 합리적인 처사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심관의 설치목적이 지방세력의 통제에 있었던 만큼 그 임무가 지방관과 유사한 사심관을 둠으로써 지방관을 도와서 지방에 대한 중앙의 지배권을 굳건히 할 수도 있었고, 나아가 지방관과 재지세력과의 연결을 미연에 방지하여 이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향리와 사심관의 결탁 또한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는 방지해야 할 일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실제로 사심관과 향리가 혈연을 토대로 결탁함으로써 많은 폐단을 일으켰다. 가령 현종 초에 친부나 친형제가 호장으로 있는 사람은 사심관에 임명되지 못한다는 것이 법제화된 사실을0553)이에 대해서는≪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事審官 “顯宗初年判 父及親兄弟爲戶長者 勿差事審官” 및 洪承基, 앞의 글, 236∼237쪽을 참고하기 바란다.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정부가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어느 정도 확립하게 되면서 그 사정은 바뀌었다. 현종 9년(1018)에 지방제도의 정비가 일단락된 것은 지방세력에 대한 중앙정부의 우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시점에서 중앙정부는 지방세력에 대한 지배방식을 일변하였는데, 즉 종래의 정치적 지배에서 경제적 수취로 서서히 바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사심관과 향리의 관계개선이 수반되었고 이로써 지배를 위한 긴장 관계에서 수취를 위한 상호보완적인 협조의 관계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양자 간의 친밀한 관계는 향리의 중앙진출로를 넓혀 줄 수 있었다. 즉 향리가 바로 이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사심관에게 쉽게 의탁하여 중앙으로의 진출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심관제도는 고려 중기 이후 특히 후기로 접어 들면서 향리의 중앙진출을 보장해 준 제도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0554)洪承基의 위의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결국 호장과 사심관이라는 이중적 지배구조가 공존하고 있었던 지방사회는 지방의 자치적이고 자율적인 통치권력과 중앙의 강제적이고 타율적인 통치권 력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있고, 또 이것은 그 지역 출신으로서 동일지역에 연고권이나 세력기반을 가졌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두 세력이 서로 분리·대응하면서 지방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현상에서 고려 초기 사심제의 성격을 발견할 수 있고0555)李純根, 앞의 글, 204∼205쪽. 여기에서 고려정부가 추구한 지방통치조직상의 특성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지방관제의 정비가 진행됨에 따라 사심관도 그 제도적인 정비를 보게 되었다. 성종 15년(996)의 기록이 참고된다.

성종 15년에 결정하기를 사심관은 대체로 500丁이상의 주에는 4명을 두고, 300丁 이상의 주에는 3명을 두며, 그 이하는 2명을 두도록 하였다(≪高麗史≫권 75, 志 26, 選擧 3, 事審官).

 위의 기사는 사심관의 정원을 규정하고 있다. 즉 사심관은 아무리 작은 군현이라 하더라도 최저 2명으로 복수 임명함으로써 일방적인 권력의 집중을 막으려는 고려정부의 정책적인 의도를 엿볼 수 있다.0556)旗田巍, 앞의 글 참고. 또한 사심관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종 14년의 전국 군현 총수는 약 600에 달하였다. 따라서 최저 2명으로 보더라도 사심관의 총수는 전국적으로 1,200명인 것으로 집계된다. 이것은 성종대의 중앙관료 대부분이 사심관에 임명되었다는 말이다. 반면 사심관이라는 역할을 매개로 하여 본주 출신의 호족을 중앙으로 편입시킴으로써 그들이 지녔던 호족적인 성격을 해소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0557)河炫綱, 앞의 책, 85쪽. 이처럼 사심관제는 지방제도의 강화와 더불어 점차 보완, 정비되어 갔던 것이다.

 사심관은 人民의 宗主, 流品의 甄別, 賦役의 均平, 風俗의 表正 등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0558)≪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事審官. 이러한 직능은 바로 지방관인 외관의 직능과 흡사하다. 따라서 일부의 주읍에만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고려 전기에 있어서 사심관이 지방통치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자못 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0559)사심관과 지방 외관의 직능을 비교 분석한 것은 李純根, 앞의 글, 213∼218쪽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외관과 사심관의 권한을 비교해 볼 때, 정치적·행정적 지배권의 상당한 부분을 외관이 장악했으며, 사심관은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많은 권한 중 사회경제적 측면에서의 권한을 유지해 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지방사회의 통치는 이제 중앙을 중심으로 한 직접적인 통치방식이 일단 성공하게 됨으로써 사심관의 권한은 해당지역의 연고권에 기초한 경제적 관리권을 통해 지방사회 지배에 관여하는 것을 중심으로 외관과 이중적인 지배구조를 갖추는 정도로 제한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사심의 역할과 기능면의 일대변화를 의미하며 동시에 고려시대 지방통치책이 가지는 구조적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0560)李純根, 앞의 글, 218쪽.

 한편 사심관이 지방통치책의 차원에서 특히 사회경제적 수취체계에 대한 관리에 주로 집중되어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일면 사심관에 의한 불법행위 자행의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 후기에 오면 권호들의 경제적 부의 축적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사심관이 ‘有害於鄕 無補於國’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짐과 함께 사심관의 폐지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사심관제는 충렬왕 9년(1283) 4월에 일차 폐지되었다가0561)≪高麗史≫권 29, 世家 29, 충렬왕 9년 4월 신해. 그보다 약 30년 뒤인 충숙왕 5년(1318)에 다시 혁파되었다. 이로써 고려시대의 지방통치는 종래의 지방관-향리-농민(지방군현민)이라는 장치와 사심관-향리-농민(지방군현민)이라는 기구의 이중적 조직에서 전자의 지방관제로 일원화되었던 것이다.

<金潤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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