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3. 지방의 중간 통치기구
  • 1) 고려 지방 중간기구의 구조

1) 고려 지방 중간기구의 구조

 고려의 지방제도는 州縣制를 기본으로 구성되었다. 전국에 약 500개의 州·府·郡·縣이 설치되어 지방행정구획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100여 개의 군현에 外官이 설치되어 이웃 몇 개의 속현을 관할하며 중앙정부와 직결되고 있었다. 이들 외관이 있는 主縣 중 14개의 京·牧·都護府를 界首官으로 하여 鄕貢의 選上이나 外獄囚의 推檢 등 일부 한정된 기능에 대하여 중간기구의 기능을 행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방제도에 의한 지방 통치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으며 이에 따라 보다 정비된 중간기구의 설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고려의 지방 중간기구의 특징은 지역에 따라 다른 삼원적 구조였다는 점이다. 즉 고려는 개경 주위의 畿輔 지역을 京畿로 삼고 국방지역에 兩界, 일반 南道에 5道로 삼아 전국 8개 지역을 각각 다른 통치조직으로 구성하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고려가 지역에 따라 8개 중간기구를 경기·양계 5도라는 이질적 통치방법을 쓴 것은 후대 조선의 일원적인 8道制와 대비가 된다.0562)고려의 지방 중간기구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邊太燮,<高麗時代 京畿의 統治制>(≪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高麗按察使考>(≪歷史學報≫40, 1968;위의 책).
―――,<高麗兩界의 支配組織>(위의 책).
河炫綱,≪高麗地方制度의 硏究≫(韓國硏究院, 1977).
金潤坤,<麗代의 按察使制度 成立과 그 背景>(≪嶠南史學≫1, 嶺南大 國史學科, 1985).
金南奎,<高麗 兩界兵馬使에 대하여>(≪李弘稙回甲紀念 韓國史學論叢≫, 新丘文化社, 1969).

 고려의 일반적인 지방중간기구는 남부지방에 설정한 5도제였다. 여기에는 按察使(뒤의 按廉使)가 파견되어 민사적 행정기능을 주로 한 일반적인 지방통치 구획이 설정되었다. 그러므로 5도는 고려의 지방 중간기구의 기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防禦州·鎭이 설치된 북방의 국경지역에는 군사적인 兩界兵馬使가 파견되었으며, 왕경 주위의 경기는 개성부가 통치하는 특수행정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는 전국의 중간 행정기구를 세 가지 방법으로 병행하였으니, 이는 고려 지방제도의 특수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중간기구가 동시에 함께 성립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 중앙정부와 군현 사이의 중간적 통치구획이 일시에 성립된 것은 아니고 그들 사이에는 시간적 차이가 있었으며, 또 통치기구로서의 정비도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고려의 삼원적인 중간 통치기구가 획일적으로 성립된 것도 아니고 또 처음부터 정비된 행정적 가능을 갖춘 채 출발한 것도 아니었음을 뜻한다.

 중간 통치기구로 가장 먼저 정착한 것은 양계였다. 이것은 양계가 국방지대로 지방통제가 가장 긴급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성종 8년(989)에 東西北面에 兵馬使가 설치되었는데 처음에는 군사적인 軍職의 성격을 띠었다가 靖宗 초(1034∼1037)에는 행정관인 외직으로 화하여 양계의 중간 통치기구로 정립되었던 것이다.0563)≪高麗史節要≫권 3, 현종 10년 정월조에는 東北面兵馬使가 거란군의 개경침구에 대하여 3,200명의 군대를 보내 원조하였다고 하였는데,≪高麗史≫권 6, 世家 6, 정종 즉위년(1034) 11월조에는 八關會에 兩路兵馬使가 東西 2京·4都護·8牧과 함께 上表 陳賀하였다고 하였으며 드디어 정종 3년(1037)에는 “外任及東西兵馬官吏”라 하여 하나의 外職으로 간주됨이 나타난다(≪高麗史≫권 64, 志 18, 禮 6, 凶禮 五服制度). 이제 서북면과 동북면에는 군사적 기능을 주로 하면서 민사적 기능도 아울러 행사하는 병마사 기구가 설치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남부지역의 5道按察使制는 늦게 성립되었다. 안찰사는 정종 3년(1037)에 처음 기록에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이 때에는 전국 5도에 파견된 것도 아니고 또 순행 감찰의 기능이 있을 뿐 행정관의 역할을 담당한 것도 아니었다. 5도인 楊廣忠淸州道·慶尙晋州道·全羅州道·西海道 등의 按察使道가 마련된 것은 예종대(1105∼1122)이고 이 때는 전국에 안찰사가 파견되었으므로 12세기 초에 5도안찰사제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직도 미숙한 행정기구였으나 다음 인종·의종대로 내려 오면서 완전한 중간 통치기구로 정립된 듯하다.

 양계병마사와 5도안찰사가 비록 성립의 시기는 다르지만 결국 병렬적 중간 행정기구였는데 대하여 京畿는 또 다른 통치체제로 편성되었다. 경기는 「道」나 「界」를 칭하지도 않고 또 따로이 중간 통치기구를 둔 것도 아니라 州縣制의 하나인 開城府로 하여금 관할케 하였다. 개성부는 성종 14년(995)에 처음으로 설치되어 6개 赤縣과 7개 畿縣을 관할하였는데 현종 9년(1018)에 赤(京)縣·畿縣을 합하여 경기라 칭하고 開城縣令과 長湍縣令을 통하여 직접 尙書都省에 直隷케 하였다. 그후 문종 16년(1062)에는 다시 개성부가 설치되어 12현을 관할케 함으로써 경기의 통치제는 일단락을 지었다. 이제 문종 때에 이르러 경기는 하나의 知府事가 파견된 개성부가 지배하는 미숙한 중간기구가 성립된 것이었다.

 위의 양계·5도·경기는 성립시기에 차이가 있었을 뿐 아니라 통치기구의 조직에도 차이가 있었다. 보통 양계병마사와 5도안찰사는 동렬적으로 함께 호칭되고 그 기능도 비슷하였다. 명종 18년(1188) 制에 양계병마사·5도안찰사의 기능으로서 똑같이 民間利病의 咨訪, 守令賢否의 출척, 軍士의 撫恤 등을 든 것은 이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중간기구이지만 양자에는 차이가 없을 수 없었으니, 양계병마사가 군사적 직능을 주로 하면서 민사적 직능도 아울러 가졌는데 대하여 5도안찰사는 민사적 기능을 주로 하고 군사적 기능은 부차적이었다는 점이었다. 더욱이 양계병마사기구는 兵馬使 또는 知兵馬事 밑에 副使·判官·錄事 등의 관원을 갖추고 또 여기에 分臺御史 및 監倉使·分道將軍 등을 둔 것에 대하여 5도안찰사는 그저 營吏를 인솔할 따름으로 차이가 있었다. 양자는 같은 6朔 番代의 使任으로 함께 임명되어 같은 날 陛辭하여 임지로 출발하였지만 역시 양계병마사는 5도안찰사보다 지위가 높고 권력도 컸으므로 특별히 「藩鎭」·「營主」·「都統」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이에 비하여 5도안찰사는 그 지위가 낮았고 더욱이 경기는 하나의 외관에 불과한 知開城府事가 다스리는 지방구획으로 그 격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삼원적인 중간 통치기구의 설정은 고려의 현실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으나 역시 이는 지방제도의 미숙성을 나타낸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의 지방제도는 삼원적 구조를 일원화하는 추세로 점차 발전하였다. 먼저 하부구조인 양계의 군사적인 防禦州·鎭이 일반적인 주·현으로 전환되어 갔으며, 중간 통치 구획도 처음 東界 소속의 春州道가 안찰사로 되더니 다시 江陵道(溟州道)마저 南道化되어 강원도 지방이 모두 북계에서 벗어났다.

 고려 말에는 마침내 전국의 중간기구가 일원화되었다. 창왕 즉위년(1388)에 5도의 按廉使를 都觀察黜陟使로 격상시켜 兩府宰樞로 임명하고 敎書와 鈇鉞을 하사하여 파견하였는데 이듬해에는 京官口傳에서 정식으로 除授하여 專任官을 시켰으며, 공양왕 2년(1390)에는 다시 여기에 사무처인 經歷司를 설치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공양왕 2년에는 전년에 있었던 趙浚의 건의에 따라 京畿 左右道에도 각각 도관찰출척사를 설치하였고, 서북면·동북면에도 역시 도관찰출척사를 임명하여 전국이 획일적인 관찰사제로 통일되었다. 비록 고려 멸망 3개월 전에 옛 제도로의 복구로 중간기구도 다시 환원되었지만 고려 후기의 지방 중간통치기구의 일원화는 지방제도의 발전을 뜻하는 것으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고려의 특수한 삼원적인 지방 중간기구는 고려 말에 이르러 일원화되는 전진의 과정을 밟았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