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3. 지방의 중간 통치기구
  • 2) 경기
  • (2) 경기의 통치제도

(2) 경기의 통치제도

 현종 9년 경기의 성립과 더불어 종래의 개성부가 폐지되고 개성현과 장단현에 현령이 설치되어 각각 3현·7현의 속현을 관할하며 중앙의 상서도성에 직속케 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적·기현에 대한 통치제도의 일대 전환을 뜻하는 것이었다. 태조 2년의 개주는 성종 14년 개성부로 승격하여 부윤이 설치되는 동시에 적현 6과 기현 7을 관할하였다. 개성부의 장관을 부윤으로 삼은 것은 개성부가 唐 京兆府의 예와 같이 수도를 통치한 특별구역인 까닭이었다. 목종 원년의 전시과에서 모든 외관이 제외되었지만 유독 개성부윤만이 포함된 것은 그가 경관의 대우를 받았음을 나타낸다. 특히 개성부에는 적(경)기 13현이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것은 실질적으로 경기의 장관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때 개성부윤은 경중과 함께 수도 주위의 적기 13현도 아울러 통치하는 장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종 9년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畿輔 지역의 행정조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현종 9년의 경기의 통치체계를 도표로 만들면 다음<표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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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京畿의 통치체계(현종 9년)
<표 1>京畿의 통치체계(현종 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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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경기 12현은 개성현과 장단현의 현령이 각각 속현 3과 7을 관할하고 이들 양 현령은 중앙의 상서도성에 직접 예속되었으며, 이 때 경중의 5부는 이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현종 9년 경기제의 커다란 특징은 경기가 왕경 밖의 지방으로 화하여 경기의 수령이 지방관으로 전환한 점이다. 지금까지 赤畿는 京中까지도 포함하였는데 이제는 왕경이 독립하여 중앙정부의 직할이 되고 경기에서 제외된 것이다. 성종 때의 적기 13현이 현종 때 경기 12현으로 1현이 감소된 것은 경중을 지배한 적현인 송악현이 5부로 화하여 중앙정부 직할로 편입됨으로써 경기는 12현으로 되고 왕경의 외곽지역만을 표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경기의 수령인 개성현령과 장단현령은 이전의 경관대우를 받던 개성부윤과 달리 지방관으로 전락되고 경중 5부는 직접 중앙정부와 직결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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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개경
<지도 1>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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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종 9년 경기통치제의 또 하나의 특징은 경기가 하나의 장관으로 지배된 것이 아니라 개성현령과 장단현령 두 수령에 의하여 분할 통치된 점이다. 종래 개성부윤에 의하여 일원적으로 통치된 적기 13현이 이제는 두 현령에 의하여 나뉘어 지배케 된 것이다. 이들 경기지역은 중앙의 상서도성에 직접 예속되었으나 두 개의 외관에 의하여 분할 통치된 것이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경기의 主縣인 개성현령과 장단현령이 상서도성에 직예하였지만 고려 초기에는 모든 외관이 중앙정부에 직속된 통치체계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그런 면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었으며 다만 경기에는 따로이 界首官이 없었기 때문에 양현령이 직집 상서도성에 직결된 점이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경기의 통치제는 문종 때에 이르러 변화되었다. 즉 문종 16년(1062) 개성부로 개편되어 知府事가 설치되고 상서도성이 관장하던 11현과 西海道 平州의 속현인 牛峯郡 등 12현을 아울러 통할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종래의 개성현령이 知開城府事로 승격하는 동시에 장단현령은 폐지되어 경기 12현을 모두 관할케 되었다 이제 경기는 우봉군의 내속으로 그 영역이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지개성사에 의하여 일원적으로 통치케 된 것이다.

 이 문종 16년(1062)의 개성부는 전의 성종 14년(995)의 개성부와 같이 모두 개성부라 칭하였고 또 경기의 일원적인 통치기구인 점에서 동일하였지만 그 내용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성종 때의 개성부는 왕경까지도 관할하여 장관을 開城府尹이라 칭하고 경관의 대우를 받았는데 대하여 문종 때의 개성부는 왕경 밖의 경기를 통치하는 하나의 지방관으로 장관도 지부사라 칭하고 治所도성외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0571)개성부의 治所는 徐兢의≪高麗圖經≫에 “關城府 距城四十里”라 하여 왕성 밖 40리에 있었다 한다. 비록 개성부라 칭한 것은 동일하였지만 성종조에는 왕경을 관할하여 유일한 부윤이 설치된 특별구였는데 대하여 문종조에는 天安府·安東府 등 여러 부와 똑같은 지방기구에 불과하여 양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이제 경기는 한낱 府에 불과한 개성부의 지부사에 의하여 통치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기의 통치제도는 문종 23년(1069)의 경기 확대여하를 불구하고 변동이 없이 계속되었다.0572)≪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王京 開城府條에는 恭讓王 2년의 경기 확대에 관한 서술 중 細註로 문종 23년 정월 楊廣道·交州道·西海道에서 새로이 41州縣이 경기에 편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사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어 실제로 이 때 경기가 확대되었는지 의문이며, 비록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오래되지 않아 原京畿로 환원된 것 같다(邊太燮, 앞의 책, 251∼254쪽 참조).

 개성부가 다른 여타의 부차 동격의 지방기구였으나 그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이제 外官祿을 통해 개성부의 기구편성과 다른 부와의 관계를 표로 만들면 다음<표 2>와 같다.

文宗朝 外官祿0573)文宗朝 外官祿에서는 開城府외에 天安·南原·長與·京山·安東府가 있었으며, 또한 公州 등 11州使, 古阜郡 등 5郡使가 모두 등격이었다. 이 표에 안동부를 대비시킨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반 府의 하나로 택하였을 따름이다. 仁宗朝 外官祿0574)仁宗朝 外官祿에서는 구체적인 지방기구명이 아니라 ‘諸知州府郡事’, ‘諸知州府副事’로 되어 있고, 다만 判官은 개성·안동부 등 6부 등과 諸州·郡名이 수록되고 있으며, 法曹는 開城·安東 등 5부 및 春州 등 3주에 증치되어 있다.
開城府 府使
86석10두
副使
40석
判官
30석
法曹
13석 5두
知府事
86석10두
副事
40석
判官
26석10두
法曹
13석 5두
安東府 府使
86석10두
副使
40석
判官
26석10두
  知府事
86석10두
副事
40석
判官
26석10두
法曹
13석 5두

<표 2>開城府의 기구 편성과 他府와의 비교

 이것을 보면 문종조의 개성부는 다른 일반 부와 대체로 동등한 관원과 대우를 받아 동격이었음이 나타난다. 즉 개성부는 府使·副使·判官·法曹로 구성되고 외관록의 액수는 府使와 副使는 타부와 동일하나 판관만 1급이 많으며 특별히 법조가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개성부에 일반 주·부·군에 없는 법조가 특별히 존재한 것은 이 때 개성부가 경기를 다스리는 외관일 뿐 아니라 일종의 계수관의 기능도 대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종조 외관록을 보면 개성부가 일반 다른 부와 완전히 동격이 되었다. 이제는 개성부도 그저 ‘知州府郡事’의 하나로 표기되어 모든 주·부·군의 지사와 같았음이 나타나고 판관도 동액의 외관록을 받았으며 법조도 새로 증치된 그 밖의 부·주의 그것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므로 개성부는 비록 경기의 일원적인 통치기구였으나 그 밖의 부와 동등한 기구편성과 동액의 외관록을 받아 특별한 우대를 받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굳이 한 가지 특수성을 말한다면 문종대부터 법조가 설치되어 경기지역의 계수관의 역할을 담당한 점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경기가 개성부에 의하여 통치되었는데 京中 5部는 이에서 벗어 나 직접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았다. 개경은 현종 15년(1024)에 5部·坊里를 정하여 5部·35坊·344里의 제도를 만들었다 한다.0575)≪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王京 開城府. 5부에는 使 1인(4품 이상), 副使 1인(5품 이상), 錄事 각 2인(甲科權務)이 두어졌는데 그들은 文武班祿이나 外官祿에 들지 못하고 모두 權務官祿에 편입되어 그들의 지위가 낮았음이 나타난다. 방리에는 別監·里正이 있었는데 경성에는 도적을 잡는 경찰기관으로 街衢所가 있어 使·別監이 있었던 바 방리의 별감이란 이 가구소의 별감을 가리킨 것인지 확실치 않다. 요컨대 경중 5부는 경기에서 벗어나 직접 중앙정부의 통치를 받아 행정체계가 달랐음이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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