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3. 지방의 중간 통치기구
  • 2) 경기
  • (3) 경기 통치기구의 개편

(3) 경기 통치기구의 개편

 경기의 통치체제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커다란 변혁을 겪게 되었다. 忠烈王 때 開城府尹으로 승격하여 경기 뿐 아니라 왕경 5부까지 관장하게 되고, 恭讓王 때는 경기가 좌·우도로 확대되고 都觀察黜陟使가 설치되는 승격을 하게 되었다. 이제 경기의 통치제도는 격상되고 마침내는 다른 5도와 동등한 지방기구로 승격되기에 이른 것이다.

 문종 때 개성부사에 의하여 통치된 경기는 점차 관할 속현에 외관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인종조의 제도로 여겨지는 兵志 州縣軍條를 보면 경기는 開城府道·承天府道·江華道·長湍道의 4도로 편성되어 있는데,0576)≪高麗史≫권 83, 志 37, 兵 3, 州縣軍. 이 軍事道는 수령이 파견된 主縣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이 때 경기에는 개성부·승천부·강화현·장단현에 외관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인종조 외관록조에는 지개성부사 외에 知昇天府事·江華縣令·長湍縣令·牛峯縣令이 있어 경기에 5개의 주현이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경기에는 유일한 외관인 개성부 외에 속현이었던 승천(옛 貞州)·장단현·우봉현에 수령이 설치되고 강화현도 경기에 새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이들 외관 이외에도 토산·적성·파평·강음·송림·마전현에는 정식 현령은 아니지만 수령의 기능을 행사하는 監務가 설치되어 지배기구가 강화되어 갔던 것이다.0577)仁宗朝 外官祿條에는 牛峯縣令이 보이는데 지리지에는 예종 원년에 監務가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차이가 있다.

 이러한 경기의 통치체제는 몽고의 침입으로 일대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몽고의 침입으로 고종 19년(1232) 개경의 5부 人戶를 강화도로 옮긴 후 개경에는 留守兵馬使를 두었으나 결국 경도는 몽고군의 유린으로 황폐화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원종 11년(1270) 개경환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때 복구된 경기는 결코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원종 12년(1271)에는 都兵馬使의 요청에 따라 경기 8현에 祿科田이 설치되고 있으니,0578)≪高麗史≫권 27, 世家 27, 원종 12년 2월. 이제 경기제는 다시 개성부사 에 의하여 통치되는 옛 제도로 환원된 듯하다.

 그러나 이 경기 통치제는 결국 시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충렬왕 34년(1308)에 개성부에 다시 왕경 통치기구로서 부윤이 설치되어 도성 안을 관장하고 또한 따로이 개성현으로 하여금 성외를 관장케 한 것이다.0579)≪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王京 開城府. 지금까지 개성부사는 경기 8현을 다스리는 지방기구였으며 왕경 5부는 중앙정부의 직할이었는데, 이제는 다시 개성부윤으로 승격하여 경기와 더불어 경중 5부까지 관장하게끔 변한 것이다.0580)충렬왕 34년의 개성부윤 승격은 사실은 충선왕에 의하여 실행된 개혁이었다. 충선왕은 이미 충렬왕 24년 즉위 때 中京留守·開元府尹이란 관직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개성부로 하여금 왕경의 통치기구로 삼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 때 개성부는 給田都監을 병합하고 그 관원은 繕工職事까지도 겸대하여 그 기능이 확대되었다.0581)≪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開城府. 5부의 장관은 副令(종 6품)이었는데 이 때의 통치체계를 표로 만들면 다음<표 3>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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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충렬왕 34년의 경기의 통치체계
<표 3>충렬왕 34년의 경기의 통치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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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개성부윤의 경기 8현 및 5부의 통치체제가 일대 변혁을 일으킨 것 은 고려 멸망 직전인 공양왕 때였다. 즉 공양왕 2년(1390)에 경기를 좌·우도로 나누고 관할 주현을 확대하는 동시에 각각 도관찰출척사를 두었던 것이 다.0582)≪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王京 開城府. 이때 경기 좌우도에는 原京畿 13현에다 새로이 이웃 楊廣道·交州道·西海道에서 31현을 편입시켜 좌도 25현, 우도 19현으로 총 44현이 되었다.

 이미 공민왕 때부터 군사적으로 경기 좌우도의 제도가 있었으나 이제 공양왕 2년에는 정식으로 행정구획상의 경기 좌우도가 생기고 여기에 타도와 같은 도관찰출척사가 설치되기에 이른 것이다.

 경기의 확대와 道로의 승격, 그리고 도관찰출척사의 설치는 경기 통치제도의 발전을 표시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남도의 일반 행정조직과 달리 개성부에 의한 특수통치제를 실시한 경기가 5도와 같은 도관찰출척사의 도제로 변경된 것은 지방제도상의 전진을 뜻하는 것이었다. 공양왕 2년 경기 좌우도와 함께 양계에도 도관찰출척사가 설치됨으로써 고려 전국의 중간기구가 단일화되었다. 비록 경기 좌우도는 공양왕 4년 4월 諸道의 도관찰출척사가 혁파되고 按廉使로 환원될 때 개성부로 복구되었지만 조선 건국 후 다시 도관찰출척사가 설치되어 경기 통치제도의 발전은 그대로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고려는 경기에 대한 특수 행정기구를 그 말기에 이르러 도제로 승격, 단일화하여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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