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3. 지방의 중간 통치기구
  • 3) 5 도
  • (3) 5도안찰사제의 변화

(3) 5도안찰사제의 변화

 고려의 5도안찰사가 지방의 중간통치기구가 되었지만 그 제도는 아무런 변화없이 고려 말까지 계속됨으로써 모순이 나타나게 되었다. 안찰사가 수령을 통할하는 상급 행정관이면서 그 관품이 낮았고, 專任官이 아니라 행정기구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또한 6개월만에 교대하므로 임기가 짧은 것은 확실히 결함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고려 후기에는 5도안찰사제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정책이 진행되었다.

 첫째는 안찰사의 낮은 官秩에 대한 문제였다. 고려의 안찰사는 대체로 명문출신으로 등과한 문신이 임명되었으나 5, 6품의 관원이 임명되고 높아야 4품관으로 이는 권한이 큰 데 비하여 너무나 관질이 낮았다. 이것은 초기에 안찰사가 주현을 감찰하는 사행일 경우에는 무관하였으나 이제 수령을 통찰하는 상급 행정기구가 된 후에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령이면서 경·도호·목의 장관은 3품 이상이었고 주·부·군의 사는 5품으로 안찰사보다 고위일 경우가 있어 상하의 행정체계가 확립될 수 없었다. 창왕 즉위년(1388) 7월에 趙浚이 주·부·군의 知官이 모두 正順·奉順大夫(정3품)이고 방진·부윤·주목·도호의 외관도 역시 양부의 大臣·奉翊(종2품)의 達官으로 안렴사보다 높으므로 안렴사가 수령의 출척이나 군민의 일을 잘 시행할 수 없는 즉, 안렴사도 양부대신으로 임명해야 한다고 청한 것은 이와 같은 모순을 지적한 것이었다.0608)≪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用監司.

 이러한 조준의 요청은 받아 들여져 다음달 안렴사를 도관찰출척사로 승격하여 교서와 鈇鉞을 수여하고 재추로 임명하였는데 이 때 임명된 제도 도관찰출척사는 다음과 같다.0609)≪高麗史節要≫권 33, 창왕 즉위 8월.

楊廣道   都觀察黜陟使-政堂文學 成石璘

慶尙道   都觀察黜陟使-前平壤尹 張 夏

全羅道   都觀察黜陟使-前密直副使 崔有慶

交州江陵道 都觀察黜陟使-前密直商議 金士衡

西海道   都觀察黜陟使-密直提學 趙云仡

 이 때는 종래의 交州道에 공민왕 때 안렴사도로 된 江陵道가 합하여 하나 의 교주강릉도가 되어 5도로 되는 동시에 양부 재추가 도관찰출척사로 임명되어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이들 도관찰출척사의 권한이 컸음은 이들에게 교서와 부월을 하사하였는데, 이 때 내린 교서에서 제도 도관찰출척사로 하여금 대소의 군민관을 상벌하는데 특히 수령·장수를 처벌할 경우 양부 이상은 감금한 후 聽候하고 봉익대부 이하는 직단케 한 것으로 알 수 있다.0610)≪高麗史≫권 137, 列傳 50, 叛逆 6, 辛禑 5 신창 즉위 8월.

 둘째로 들어야 할 안찰사제의 결함은 그들이 전임관이 아니고 또 사무기구를 갖추지 못한 점이었다. 안찰사는 일종의 사행이기 때문에 정식 제수하지 않고 京官을 구전으로 임명하는 비전임관이었으며, 더욱이 안찰사에게는 수령 밑의 향리 조직과 같은 사무관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었으니, 처음의 순행관의 지위에 불과할 때는 문제가 없었으나 어엿한 중간기구로 된 이후에는 그 임무를 수행하는데 지장이 있었다. 이에 공양왕 원년에는 새로운 도관찰출척사를 종래와 같은 경관 구전이 아니라 따로이 제수를 함으로써 정식으로 전임관이 되게 하였다.0611)≪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按廉使 공양왕 원년. 또한 이듬해에는 이들 5도관찰출척사에게도 행정기관인 經歷司를 설치하고0612)≪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按廉使 공양왕 2년. 4품 이상의 經歷이나 5품 이하의 都事를 首領官으로 삼아 사무장의 일을 보게 하였다. 이제 안찰사는 제도상으로도 경관의 일시적인 사행이 아니라 정식 도의 행정장관으로 외직화되고 그 밑에는 정비된 사무기구가 갖춰지기에 이른 것이다.

 셋째의 결함은 안찰사의 6개월 교체제이다. 안찰사는 春夏番과 秋冬番의 반년 교대로 그 임기가 너무 짧았다. 처음 주현을 순행 감찰하는 사행일 때는 6개월로도 충분하였으나 목민관으로서 지방행정의 기능을 가지게 된 이후에는 그 임기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우왕 4년(1378)에는 헌사가 6개월 교체의 폐단을 들고 1년간으로의 연장을 건의하였는데, 그 폐단이란 안찰사의 임무가 매우 무거운 데도 불구하고 6월 교대로 公事를 실행하는데 마치지도 못한 채 바뀌게 되어 공사가 廢弛하게 되고 또 잦은 迎送으로 백성들의 폐해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였던 것이다.0613)≪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用監司, 신우 4년 12월. 이 헌사의 상언이 받아들여져 이듬해부터 1년 교체로 변경됨으로써 이 결함은 시정되었다. 즉 權近의≪陽村集≫에는 안렴사가 옛 제도는 춘추에 교대하였는데 우왕 5년(1379)에 대간이 1년 기한을 건의하여 廟堂(都評議使司, 즉 都堂)에서 秋期에 교대하게끔 바뀌었다 한다.0614)權近,≪陽村集≫권 15, 序類, 送交州道林按廉序. 이로써 6개월 교대의 안찰사는 1년 교대로 바뀌어 그 임기가 연장되었던 것이다.

 이제 고려 말에는 안찰사제의 결함인 큰 권한에 대한 관질의 卑下, 專任官이 아닌데 따른 행정기구의 미비, 그리고 6개월 교대에 따른 폐단이 시정되어 안찰사는 양부 대신으로 임명되어 도관찰출척사로 승격되었고, 정식 除授에 의한 전임 외직이 되고 사무기구인 경력사를 마련케 되었으며, 또한 6개월 교대에서 1년 교대로 임기가 연장되었다. 그러므로 고려 말에는 명실 공히 5도가 지방 중간기구로 행세하게끔 개편된 것이다.

 5도에 도관찰출척사가 설치된 것은 창왕 즉위년(1388)이다. 이때까지도 경 기와 양계는 별개의 중간기구로 구성되고 있었는데, 2년 후에는 경기 좌우도와 양계에도 똑같이 도관찰출척사가 설치되고 여기에 경력사가 부수됨으로써 전국은 똑같은 지방통치기구로 일원화되었다.0615)≪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王京 開城府. 그리고 공양왕 2년 12월에 韓尙質이 西北面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로 임명되어 이 때 양계에도 觀察使가 설치되었음이 나타난다(≪高麗史≫권 45, 세가 45, 공양왕 2년 12월). 이는 고려 지방제도의 발전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특수한 경기 통치제와 군사적인 양계병마사제가 일반적인 5도체제로 동질화되었던 것이다. 이 관찰사제는 고려 멸망 3개월 전인 공양왕 4년 4월에 다시 안렴사로 복구되었으나 이는 조선 건국 후 곧 다시 관찰사로 환원됨으로써 지방 중간기구는 계속 발전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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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2>5도 양계
<지도 2>5도 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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