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Ⅲ. 군사조직
  • 1. 경군
  • 1) 태조대의 경군
  • (1) 태조대 경군의 규모

(1) 태조대 경군의 규모

 고려 전기의 중앙군은 전형적으로는 2軍 6衛라 총칭되는 8개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2軍은 鷹揚軍과 龍虎軍으로 그 병력규모는 3천 명이었고, 6衛는 左右衛·神虎衛·興威衛·金吾衛·千牛衛, 그리고 監門衛 등으로 그 병력 규모는 4만 2천 명이었다.

 고려시대 군사제도의 연혁을 기록한≪高麗史≫兵志에 의하면 2군은 6위보다 상위의 부대들이었지만 그 설치 시기는 6위보다 나중이었다고 한다.0633)≪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西班. 그리고 군주의 행적을 기록한≪高麗史≫世家에 의하면, 중앙에 6위가 설치된 것은 태조 2년의 일이었다고 한다.

(太祖) 2년 春 正月 도읍지를 松嶽의 남쪽으로 정하여 궁궐을 짓고, 3省 6尙書 9寺 등을 두고, 市廛을 세우고, 坊里를 가르고, 5部를 구분하고, 6衛를 설치하였다(≪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2년 정월).

 그러나 고려의 중앙군이 태조 2년(919)부터 6위로 편제되어 있었다고 하는 위의 기록은≪高麗史≫편찬자의 잘못으로 판단된다. 6위의 중앙군제는 당나라의 12衛兵制를 바탕으로 한 병제였다. 그러나 태조대라고 하면 왕조의 창업기인 동시에 전란의 시대라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아직 중국식 제도들을 수용할 만큼의 안정되고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고려 건국기의 名儒 崔承老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태조대는 “禮樂文物이 오히려 결핍된 것이 많았고 무릇 百官과 官司의 품계와 격식이며 내외의 규정과 의식이 아직 정해져 있지 못했던 시기”였다고 한다.0634)≪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이러한 시기에 고려가 당나라 병제를 도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태조대의 역사는 출병과 전투에 관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위의 실재를 방증할만한 구체적 단서는 전혀 없다. 만일 6위가 설치되어 있었다면 출전 무장들 가운데 반드시 6위의 武職을 지닌 인물이 있을 법도 한데 도무지 그런 사례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0635)鄭景鉉,<高麗前期 武職體系의 成立>(≪韓國史論≫19, 서울대 국사학과, 1988), 134∼142쪽. 또한 고려에 3省 6部 9寺와 같은 중국식 정치기구들이 설치된 것도 사실은 태조대가 아니라 성종대의 일이었다.0636)邊太燮,≪高麗政治制度史硏究≫(一潮閣, 1971), 3∼8쪽.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보건대, 태조대의 중앙군은 6위와는 무관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태조대 開京을 본거지로 하고 있던 정부직속군, 곧 京軍은 어떻게 조직되어 있었을까.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간접적이고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주요전투에 출동한 중앙군의 규모라든지 지휘관의 직함 등에 관한 기사들을 참고해 보는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태조대 경군의 전체적 규모와 편제를 파악하는 데 가장 유리해 보이는 기사는 고려와 후백제와의 최후 최대의 결전이었던 一利川 戰役(태조 19년 9월)에 관한 기사일 것이다.≪高麗史≫세가 태조 19년 9월조에는 당시 戰場에 집결한 태조측 병력의 규모와 부대 편성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표 1>과 같다.

부대편성 병력구성 筆頭의 지휘관 병력규모
左 綱 馬軍 10,000
步軍 10,000
甄萱(망명한 후백제主)
支天軍大將軍 能達

20,000
右 綱 馬軍 10,000
步軍 10,000
金鐵
補天軍大將軍 三順

20,000
中 軍 馬軍 20,000
步軍 1,000
步軍 1,000
步軍 1,000
黑水 등 遊牧族
의 勁騎 9,500
王順式(溟州豪族)
祐天軍大將軍 貞順
天武軍大將軍 宗熙
杆天軍大將軍 金克宗

庾黔弼





32,500
援 軍 騎兵 300
諸城軍 14,700
 
15,000
합 계 87,500

<표 1>≪高麗史≫에 전하는 太祖軍의 편성

 이 표에 의하면, 일리천(지금의 善山지방의 낙동강 줄기) 전역에 출전한 태조측 병력은 좌강·우강·중군·그리고 원군 등 크게 네 개 부대로 편성되어 있었고 전체 병력수는 8만 7천 5백 명이었다. 그런데 태조측 병력 가운데에는<표 1>의 병력구성 항목이 보여주듯이, 중앙의 정부직속군 뿐 아니라 지방의 유력 호족들의 응원군과 북방 유목민들의 기병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원군을 구성한 1만 5천 명과 중군 소속의 흑수 등 말갈의 기병 9천 5백 명은 성격상 정부직 속군이라 보기 어려운 병력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제외한 6만 3천 명(마군 4만명과 보군 2만3천 명)이 당시 고려 경군의 총 병력수였던 셈이 된다.0637)洪承基,<高麗初期 中央軍의 組織과 役割-京軍의 性格->(≪高麗軍制史≫, 陸軍本部, 1983), 30쪽.
鄭景鉉,≪高麗前期 2軍 6衛制 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2), 21∼23쪽.

 다시<표 1>의 내용 가운데 경군의 편제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의 주의를 끄는 부분은 3군 소속 각 보군병력의 필두 지휘관들에게 한결같이 某某軍大將軍이라는 식의 직함이 주어져 있었던 점이다. 支天軍大將軍, 補天軍大將軍, 祐天軍大將軍, 天武軍大將軍, 그리고 杆天軍大將軍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여 기서 언급된 지천군이니 보천군이니 하는 명칭들은 어쩌면 태조대 중앙군 소속의 보군부대 명칭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6만 3천 명 규모의 태조대 경군은 세 개의 마군부대와 다섯 개의 보군부대들로 편제되어 있었던 것으로 상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태조대 경군의 규모와 편제에 관한 이같은 상정은 후백제와의 결전 당시 태조측 병력에 대한≪高麗史≫의 기록을 너무 쉽게 믿거나 피상적으로 받아들인 데서 비롯된 하나의 성급한 일반화일 것이다. 왜냐하면 태조대 경군의 병력규모가 6만 3천 명이었다는 주장은 당대의 여러가지 객관적 여건에 비추어 볼 때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며, 지천군 등의 5가지 명칭들을 당시 경군의 제도화된 부대명칭들이었다고 해석하기에는 몇 가지 미심쩍은 문제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경군의 병력수 문제부터 검토해 보자. 앞서 언급했듯이,<표 1>로부 터 경군규모를 계산하면 6만 3천 명이 된다. 그 중 마군(기병)이 4만 명이고 보군이 2만 3천명이다. 그러나 경군의 개념을 개경 주둔의 정부직속군이라고 전제할 경우 태조대의 경군 병력수가 6만여 명이었다는 주장은 쉽사리 수긍 될 수가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전쟁사에는 출전병력의 규모가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기록된 예가 허다하거니와0638)H. Delbrück, History of the Art of the War within the Political Framework, Vol. 1:Antiquity, trans. W.J. Renfroe, Jr. (London:Greenwood Press, 1975), 30쪽 이후 참조. 일리천 전투에 출전한 고려측 병력수에 대한≪高麗史≫의 기록도 그러한 경우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 구체적 이유들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6만여 명이라는 병력수는 태조대 개경 일원의 인구사정상 도저히 불가능한 숫자였다.≪高麗史≫가 전하는 이 병력수를 사실로 받아 들인다는 것은 당시 개경에 군인 가족만 30여 만 명이 밀집해 살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려시대 수도권 인구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조 세종대의 수도권 지역(漢城 및 城底 10里 일원)에 총 2만여 호가 살고 있었다.0639)≪世宗實錄≫권 148, 地理志, 京都漢城府. 이 사실은 고려시대 수도권 인구의 대략을 추정하는데 매우 유리한 기준이 될 수 있다. 1호당 가족수를 4.5명으로 보면, 2만 호의 인구수는 9만 명 정도가 된다.0640)고려시대 1戶당 평균 가족수는 未詳이다. 조선 후기의 경우에는 1호당 가족수가 평균 4.5명 정도였다(四方 博,≪朝鮮社會經濟史硏究≫, 東京:國書刊行會, 1976, 43쪽). 그렇다면 고려시대 수도권 인구수, 그것도 태조대 수도권의 인구수는 그보다는 훨씬 적었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개경 일원의 인구가 남녀노소 합쳐 9만 이하였다는 것은≪高麗史≫에 기록된 바 태조대의 경군 병력수(6만 3천)가 매우 과장된 전설적 숫자임을 말해 준다.

 둘째, 태조대 정부직속군 가운데 무려 4만 명이 기병이었다는 기록 또한 사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4만 명의 기병이 출전하였다는 것은 4만 필의 戰馬가 있었음을 의미하고, 4만 필의 전마가 있었다는 것은 그 어미말과 새끼말, 그리고 다른 종류의 말들까지 합쳐 당시 십 수 만 마리의 말들이 있었음을 전제한 주장이다. 고려 초기에 개경을 중심으로 하여 북으로는 黃州, 동으로는 鐵原, 남으로는 淸州 등에 걸치는 지역에 열 군데의 馬場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개경, 貞州, 江陰 등 제일 중요한 마장 세 군데에만 2명씩의 牧監將校와 십 수 명의 看守軍들이 파견되어 있었다.0641)≪高麗史≫권 83, 志 37, 兵 3, 看守軍. 이 점으로 미루어 보면 고려 초기에 마장 한 군데에서 기르고 있었던 말의 수효는 아무리 많아도 수 백 필을 넘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한반도는 풍토적으로 말 사육에는 부적합한 지역이었다. 산지가 많아 목초지가 부족한데다가 겨울에는 말들이 뜯어 먹을 풀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또한 고려 의종 때 정해진 전국 목장에서의 畜馬飼料規定을 가지고 계산해 보면, 전마 4만 필의 사료용 콩만도 매달 2만 5천 가마가 소요될 것이었다.0642)鄭景鉉, 앞의 글, 26쪽. 자연경제단계의 당시 농업생산력의 수준에 비추어 볼 때 그 만한 분량의 콩 생산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조대 경군 가운데 마군이 4만 명이었다는≪高麗史≫의 기록은 문자 그대로 믿기 어렵다.

 셋째로 일리천 전역에 출전한 고려 경군이 6만여 명이었다는≪高麗史≫의 주장은 전술적 관점에서 고찰해 보아도 매우 부자연스럽다. 태조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天安으로 내려 와서 忠州 방면으로 우회한 다음 鷄笠嶺을 넘어 선산의 일리천으로 기동하였다. 태조가 이와 같이 천안에서 대우회 기동을 한 것은 아마도 충주지역의 호족들을 비롯해 낙동강에 연한 舊新羅系 호족들로부터 군사들과 군량미를 지원받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0643)鄭景鉉,<高麗太祖의 一利川 戰役>(≪韓國史硏究≫68, 1990), 3∼7쪽.≪高麗史≫의 기록대로라면 태조는 그의 정부군 6만 3천 명과 북방 유목종족의 기병 9천 5백 명을 이끌고 천안에서 계립령을 거쳐 선산의 낙동강(일리천)까지 대략 180km를 행군해 간 것이다. 그런데 후삼국시대의 지방 및 산간의 도로사정이 매우 황폐되어 있었음을 감안해 볼 때, 그 병력은 일렬 종대의 대형으로 행군해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0644)鄭景鉉, 앞의 글(1992), 29쪽. 약 5만 명의 기병과 2만여 명의 보병이 일렬 종대로 행군할 경우 그 대열의 총 길이는 무려 200km 정도에 이른다. 그렇다면, 7만여 명에 달하는 태조군의 행군대열 길이는 그들의 행군로 길이보다도 더 길었던 셈이 된다. 이것은 전술적으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0645)鄭景鉉, 위의 글, 29∼30쪽.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문제점은 일리천 전역에 출동했다는 병력수가 그 이전의 통상적인 출전 병력수에 비해 갑자기 열 배 정도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일리천 전역 이전,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는 여러 차례의 전투가 있었고 그 중에는 태조와 甄萱이 직접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여 격돌한 경우들도 있었다. 그러나≪高麗史≫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이들 전투에 출동한 양측의 병력 규모는 대부분 5천 명 미만이었고 만 명의 병력이 출전한 경우는 단 한 번 뿐이었다.0646)鄭景鉉, 위의 글, 32쪽. 물론 이같은 대략적인 병력수들은 그것이 다소 과장된 것임을 암시하지만, 여하튼 그러한 통상적 출전병력수에 비추어 볼 때 일리칠 전역에서의 6만 3천 명은 너무나 비약적으로 증강된 병력수인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사에서 주요 전투에 출동한 피아의 병력수가 과장되게 기술되어 있는 경우는 허다하며, 그와 같은 현상은 일반적으로 고대 사서일수록 더욱 심하다.0647)H. Delbrück, 앞의 책, 30쪽. 옛날 사람들일수록 만 단위 이상의 대규모 숫자에 대한 정확한 관념이 부족할 뿐 아니라, 승리를 미화하고 패배를 변명하기 위해 피아의 병력수를 쉽사리 침소봉대하고 쉽사리 믿어버리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일리천 전장에서의 태조군 부대편성에 관한≪高麗史≫의 기사내용은 비교적 상세한 편이다. 그러나 전장에서의 병력수에 관한 기록은 그 내용이 상세하다고 해서, 혹은 보다 옛날의 기록이라 해서 무비판적으로 믿어버릴 것은 아니다. 일리천 전장에서의 태조군의 부대편성에 관한 기록은 이미 고려 인종대에 편찬된≪三國史記≫에도≪高麗史≫와 같은 정도로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는데 거기에 기록된 태조측의 총 병력수는 무여 총 10만7천5백 명이었다.0648)≪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이같이≪高麗史≫나≪三國史記≫의 병력수 기록들이 모두 과장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것은 각각의 근거 자료가 전설적인 것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0649)고려 태조대에서 목종대까지의 實錄 원본은 현종 초 거란군이 개경을 함락했을 때 모두 불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현종은 黃周亮으로 하여금 각지를 방문하고 자료를 수집케 하여, 태조대에서 목종대까지의 역사를 다시 편찬하였다고 한다(≪高麗史≫권 95, 列傳 8, 黃周亮).

 그렇다면 태조대 경군의 실제적인 병력수는 어느 정도였을까.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고려의 병력수가 후백제의 그것에 절반 정도였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은 태조 19년(936)에 견훤이 그 아들에게 말한 내용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늙은 아비가 신라시대에 후백제를 세워 지금에 이르렀다. 병력수는 北軍(고려군:필자주)의 두배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불리했으니 이것은 하늘이 고려를 도왔기 때문이다(≪三國遺事≫권 2, 紀異 2, 後百濟 甄萱).

 실제로≪高麗史≫의 기록을 보더라도 고려와 후백제와의 전투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후백제측이 좀 더 공세적이었다. 태조가 神劍軍과의 결전을 위해 북방 유목종족의 기병까지 동원하고 다시 천안에서 충주방면을 경유, 옛 신라지역인 일리천으로 크게 우회 기동한 것도 근본적으로는 후백제에 대한 병력의 상대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일리천 전역 당시 신검의 후백제군은 아무리 많아도 2만 명을 넘지는 못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이 전투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은 접전 직후 8천 9백 명의 병력손실(전사자 5,700명, 포로 3,200명)을 당하자 곧바로 궤멸되었기 때문이다.0650)≪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9년 9월. 이것은 태조측에 의해 주장된 전과라서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여하튼 신검이 9천 명 정도의 병력 손실을 당하자 더 이상의 저항을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는 것은, 이 전투에 동원된 후백제군의 총 병력규모가 손실병력의 두 배, 즉 2만 명을 넘지는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리고 이 병력 가운데에는 지방 각지에서 모은 농민군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태조대 고려의 경군병력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만 명 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고려 건국기 개경의 인구사정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고려시대 개경 일원의 인구는 최대 2만 호를 초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설령 2만 호의 인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 2만 호가 모두 전업적인 군인의 家戶 곧 軍戶였다고 상정할 수는 없다. 군호는 전체 호수의 1/3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0651)≪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신우 9년 8월. 고려 전·후기를 막론하고 농민들의 열악한 생계 형편에는 별 변화가 없었을 것인 만큼 고려 전기의 軍戶 편성 또한 三家一戶의 원칙에 의거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조대 경군의 규모는 최대로 잡아 6천 명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이론적 추정치는≪高麗史≫가 전하는 태조측 군대의 통상적인 출전병력 규모가 넉넉잡아 5천 명 정도였다는 사실과 엇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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