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Ⅲ. 군사조직
  • 1. 경군
  • 2) 2군 6위제의 성립
  • (1) 6위와 2군의 설치

(1) 6위와 2군의 설치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태조대 개경 거주의 전문적 군인들은 최대로 잡아 6천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병력은 마군·보군·해군, 그리고 내군 등 네 가지 병종별로 구분되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왕조 개창기이자 전란기였던 태조대는 지방사회에 대한 정부권력의 침투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태조대의 경군조직은 무엇보다도 그같은 시대적 여건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태조의 후계자들은 지방사회에 대한 중앙의 정치군사적 통제력을 계속 강화시켜 정부직속군의 규모·편제 등을 정비하였다. 그 결과 성립된 고려조의 정형화된 중앙군제가 2군 6위제도였다. 2군 6위란 중앙군을 이루는 8개 부대의 총칭으로서 2軍은 鷹揚軍과 龍虎軍을, 6衛는 左右衛·神虎衛·興威衛·金吾衛·千牛衛, 그리고 監門衛를 가리킨다.

 후술하듯이 지위상으로는 2군이 6위보다 상위의 부대들이었다. 그러나 제 도적으로는 6위가 2군보다 먼저 설치되었을 뿐 아니라 편제 병력의 규모 또한 2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편제상으로 보면, 중앙군 전체병력(45,000명)의 93%(42,000명)가 6위에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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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2군 6위의 조직과 편제
<표 2>2군 6위의 조직과 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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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위를 주축으로 하는 이같은 중앙군 조직은 왕조 개창기인 태조대의 경군조직과 비교할 때 두가지 특징을 지닌다. 하나는 중앙군의 제도적 형식이 당의 중앙군제인 府衛制度(혹은 府兵制度)를 모델로 하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편제병력의 규모가 대폭 증강되었다는 점이다. 이같은 변화는 광종대부터 중국식 국가체제를 모델로 추진된 집권화정책의 한 결과로서 이해된다.

 2군과 6위가 정확히 언제 어떤 경위로 설치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高麗史≫백관지 머리말 부분에는 2군 6위의 설치 연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태조) 2년에 6위를 설치하였다. 목종 5년에 6위의 직원들을 배치하였다. 그후에 응양군과 용호군 2군을 설치했는데 2군은 6위보다 지위가 높았다(≪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西班).

 앞 절에서 비판했듯이 태조 2년에 6위가 설치되었다는 부분은≪高麗史≫편찬자의 어떤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목종 5년에 6위의 직원들을 배치했다는 부분은 “목종 5년 5월 6위의 군영을 짓고 직원과 장수들을 배치했다”고 한≪高麗史≫兵志의 기사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기록 가운데에서는 응양·용호의 2군이 6위보다 나중에 설치되었다고 한 부분만이 사실이었던 셈이다.

 그러면 6위와 2군은 언제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설치된 부대들이었을까. 먼저 6위가 실재했음을 전해 주는 최초의 기록은 목종 원년에 개정된 文武兩班及軍人田柴科(문무양반과 군인들에 대한 보수규정)에서 발견된다. 그 규정을 살펴보면 ‘六衛長史‘가 田地 45결과 柴地 22결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065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따라서 적어도 목종 원년에는 이미 6위의 부대조직이 편성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전시과규정은 목종이 즉위한지 불과 2개월 만에 개정된 것이다. 때문에 6위는 적어도 목종이 즉위하기 이전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목종의 전왕은 성종(981∼997)이었다. 성종은 당제를 모델로 하여 중외의 행정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함으로써 고려조 나름의 집권적 통치체제의 항구적 기반을 마련한 군주였다. 중앙의 3성·6부의 설치, 지방의 鄕吏職 개편과 12牧 설치를 비롯한 행정구역의 정리, 상주외관의 파견 등은 모두 성종대에 처음으로 시행한 제도들이다. 그러므로 당의 중앙군제를 본뜬 고려의 6위제도 또한 성종대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면 6위가 설치된 보다 정확한 시기를 성종 14년(995)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해에 성종은 당나라식의 지방행정제도를 본따서 종래의 12州牧을 12軍으로 개편하고 각 군마다 牧使 대신 節度使들을 파견·배치함으로써 지방사회에 대한 군사행정적 통제를 획기적으로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정부는 이들 절도사들을 통하여 지방사회로부터 대량의 병력자원을 새롭게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결과 중앙군의 병력편제 또한 확대 개편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해서 설치한 중앙군 편제가 아마 6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종 14년 6위가 설치되기 전까지는 중앙군이 어떤 방식으로 편제되어 있었을까. 태조대의 경군조직이 그 때까지 그대로 지속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성종 14년이면 태조가 죽은 지 약 50년 후인데다가 중국식 관제의 도입과 집권화 시책은 이미 광종대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高麗史≫에는 성종 9년의 기사 가운데 ‘절충부 別將’과 같은 부병제식의 무관직을 지닌 한 개인이 언급되고 있는데0660)≪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9년 9월. 이것은 당시의 중앙군 병력이 이미 「衛」 단위로 편제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부병제와는 전혀 무관한 방식으로 편제되었던 태조대의 경군조직이 최초로 「衛」단위의 편제로 조정되기 시작한 시기는 빠르면 광종대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태조대 특유의 정치제도가 처음으로 중국풍의 그것으로 개편되기 시작한 시기가 광종대였기 때문이다. 광종은 중국 後周의 통치제도를 본따 왕권을 강화시켜 나간 군주였다. 그는 과거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문관 우위의 관료체제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확립하는 한편 태조대 이래의 공신급 무장들의 대부분을 모반 혐의로 처형하였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徇軍部를 軍部로, 內軍을 掌衛部로 개정하였다. 또한 지방의 주·군에서 풍채좋은 장정들을 선발하여 중앙의 시위군 병력을 크게 증강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당대에 이미 국왕의 직접적인 통치권이 지방사회에 침투하기 시작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0661)鄭景鉉, 앞의 글(1992), 89∼90쪽.

 광종대의 정치적 분위기가 이와 같은 것이었다면 경군의 편제방식에도 어떤 변화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통일전쟁기였던 태조대에는 경군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투의 수행에 있었지만 왕권강화를 도모한 광종대에는 왕실의 경호가 경군의 일차적 임무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태조대 이래의 勳舊宿將들이 대거 처형당하고0662)≪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지방에서 선발된 장정들이 중앙의 시위군으로 새로 편입하는 등 경군의 인적 구성에 있어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광종은 군사부문에 있어서의 이같은 사태변화를 어떤 새로운 제도로서 수습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비록 미숙한 형태로나마 중국식의 중앙군제 즉 府衛制度를 도입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된다. 그러므로 태조대의 경군조직은 광종대에서 성종 초에 걸쳐 중국식 부위제도를 지향해 부분적으로 개편하다가 성종 14년에 이르러 마침내 6위제도로 정형화하였던 것으로 요약된다.

 이번에는 2군(응양군과 용호군)의 설치경위에 대하여 살펴 보자. 2군이 언제 어떻게 해서 설치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 다만 이들 2군이 6위보다 나중에 설치된, 그러나 6위보다는 상위의 부대들이었다는 기록만이 전한다.0663)≪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西班.

 한편≪高麗史≫를 살펴 보면 현종 8년(1017)조의 기사 속에 2군 소속의 특정 무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보인다.0664)李基白, 앞의 책, 68쪽. 따라서 2군은 목종 5년(1002) 이후 현종 8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高麗史節要≫목종 12년(1009) 정월조 기사에는 ‘親從將軍 庾方’이 라는 인물이 보이는데 친종장군이란 응양군과 용호군 소속 장군들의 별칭이었다.0665)≪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西班 鷹揚軍. 때문에 2군의 설치시기는 일단 목종 5년에서 11년 사이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 볼 수 있다.0666)洪承基, 앞의 글, 38∼39쪽.

 그러나 목종대에 2군이 설치되었으리라는 추측에는 다소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하나의 군사조직이 새롭게 창설 운영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인적, 행정적, 재정적 뒷받침이 요구된다. 게다가 2군은 왕을 측근에서 경호하고 의장하는 부대들이었다. 그러므로 고려정부가 6위 이외에 별도로 이같은 친위 부대들을 새롭게 편제했을 때에는 그렇게 해야할 만한 객관적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왕을 경호하는 병력을 크게 증강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라든지 혹은 군사조직 전반의 개편사업의 추진과 같은 정책적 변화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목종대에는 6위 이외에 추가로 2군을 설치할 특별한 사정이 없었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목종대의 기사 속에서 「친종장군」이 보이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2군의 장군들이 친종장군이라 불리기도 한 것은 親從-국왕에 대한 護衛侍從-이 바로 그들의 고유임무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응양군 장군이니 용호군 장군이니 하는 것은 그들의 소속부대에 따라 부여된 명칭들이었다. 하지만 친종하는 장군들은 2군이 설치되기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2군 설치 이전 이들 친종하는 장군들의 명칭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 임무에 따라 친종장군이라 일컬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2군이 창설되면서 종래의 친종장군들이 응양군 장군이니 용호군 장군이니 하는 소속부대 별 명칭으로도 일컫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추론해 보면, 목종대 기사에 친종장군의 구체적 예가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근거로 당시에 2군이 설치되었다고 판단하기는 곤란하다.

 고려정부가 기존의 6위 이외에 별도로 2군을 설치한 것은 그렇게 해야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같은 사정은 목종대가 아니라 현 종대의 역사속에서 보다 적절히 지적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종은 그 원년에 거란군의 대규모 침입을 당하여 나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이 때 현종은 그를 수행하던 50여 명의 禁軍이 도중에 거의 다 逃散하는 바람에 賊徒들의 피습을 당하는 등 시종 신변불안으로 전전긍긍하는 피난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0667)≪高麗史節要≫권 3, 현종 원년 12월·2년 춘 정월. 거란군은 이듬해 정월 개경을 함락한 직후에 고려정부와 강화를 맺고 퇴각했으나 개경의 궁궐과 민가, 그리고 모든 공문서들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0668)≪高麗史≫권 95, 列傳 8, 黃周亮. 사태가 그러했다면 막대한 수의 개경주민들이 살상되거나 행방불명되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개경 일원에 거주하는 군인들을 기반으로 한 국왕 시위군 병력 또한 거의 다 상실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앙군 조직에 있어서의 이같은 피폐상이, 현종 6년(1014) 상장군 최질, 김훈 등이 諸衛의 군사들을 선동해 정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의 하나로서 작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고찰해 볼 때, 고려정부가 기존의 6위 이외에 별도로 두 개의 시위군 부대 즉 응양군과 용호군을 신설했을 법한 가장 적절한 시기는 목종대가 아니라 현종 초 거란군의 침략을 당한 직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高麗史≫에서 응양군과 용호군의 칭호는 현종 8년과 9년조의 기사에서 최초로 언급되고 있다.0669)李基白, 앞의 책, 68쪽. 반면 그 이전 시기의 역사기록에서는 2군의 칭호가 보이질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2군 소속 장군들의 별칭이 친종장군이었고 친종장군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 언급이 목종대 기사에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친위군부대가 별도 신설되었어야 할 현실적인 조건에 비추어 볼 때, 2군이 편제된 시기는 목종대보다는 현종대였을 가능성이 크다.0670)李基白, 위의 책, 80∼81쪽.

 고려 전기 2군 6위의 중앙군 조직의 성립과정에 대한 이상의 고찰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고려 건국기이자 통일전쟁기였던 태조대의 경군은 그 규모가 최대 6천여 명 정도였다고 추정되며 그 병력은 전투목적상 보군·마군·해군, 그리고 내군 등의 네 가지 병종별로 구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광종대부터 중국식의 집권적 통치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하고 지방사회의 병력자원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강화되어 나감에 따라 중앙군의 편제는 서서히 당나라의 부병제도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개편되어 나갔고 병력규모 또한 점진적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그러한 추세는 성종대에 접어들어 획기적으로 진전되었으며, 성종 14년 고려정부는 중앙과 지방에서 확보한 4만 2천 명의 대규모 병역자원을 토대로 외형상 당나라 12위 군제의 축소판인 6위 군제를 성립시켰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현종 초 거란군의 침략으로 중앙군 조직이 지리멸렬해지고 특히 친위군 병력 즉 친종병력의 대부분이 상실되자 고려정부는 국왕의 친위군을 재정비 강화해야 할 상황에 직면하여 기존의 6위와는 별도로 그리고 보다 상위의 친위군 부대들로서 응양군과 용호군을 添設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고려 전기 중앙군 조직의 정형인 2군 6위의 군제는 대체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성립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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