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Ⅲ. 군사조직
  • 1. 경군
  • 2) 2군 6위제의 성립
  • (2) 2군 6위의 임무와 병력편제

(2) 2군 6위의 임무와 병력편제

 2군(응양군과 용호군)은 국왕에 대한 의장과 경호를 전담하는 친위군 부대들이었다. 2군의 상·대장군은 近仗 上·大將軍으로, 장군은 親從將軍으로 불리기도 했는데,0671)≪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西班 鷹揚軍. 근장과 친종은 의장과 경호를 뜻한다. 용호군은 충선왕대에 한동안 親禦軍이라 개칭된 일도 있었다.0672)≪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西班 龍虎軍. 또한 의종대에 제정된 의장 및 경호 규정에 의하면, 法駕儀仗 때에는 무장한 응양군 군사들과 용호군 소속의 기병들이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도록 되어 있었다.0673)≪高麗史≫권 72, 志 2, 輿服, 儀衛 法駕衛仗. 2군의 임무가 이같이 국왕을 측근에서 호위하고 의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두 친위군 부대의 지위는 6위의 그것보다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응양군과 용호군은 병력규모가 서로 달랐는데, 무관을 제외하고 보면 응양군은 1천 명(1領), 용호군은 2천 명(2領)의 병사들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군제에 관한 기록에서는 항상 응양군이 용호군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으 며, 西班(武班)의 우두머리는 제도상 응양군 상장군이 겸하도록 되어 있었다.0674)≪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西班 鷹揚軍. 그러므로 응양군은 2군 6위의 중앙군 가운데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는 친위군부대였음을 알 수 있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6위 중의 하나인 천우위 또한 국왕 호위를 담당하는 부대였다. 그런데≪高麗史≫에는 국왕의 의장 및 경호를 담당하는 군인들에 대한 또 다른 명칭들이 보인다. 控鶴軍·牽龍軍·中禁軍·都知, 그리고 白甲 등이 그것이다. 공학군은 외국사신이 왔을 경우 문서나 예물을 받들고 국왕과 사신 사이를 왕래하는 군인들이었다.0675)≪高麗圖經≫권 11, 仗衛 控鶴軍. 견룡군은 국왕 행차 때에 의장대열 속에서 말을 부리는 군사들이었다.0676)≪高麗圖經≫권 12, 仗衛 2, 左右衛 牽龍軍. 중금군, 도지, 백갑 등도 다소간의 차이는 있어도 국왕의 의장 혹은 경호를 맡아 보는 전문적 군사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명칭의 군인들이 조직 구성상 응양군·용호군, 혹은 천우위와 어떤 관계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일 공학군 등이 2군이나 천우위와는 무관한 별도의 친위군 부대들이었다면 그 각각은 나름대로의 무반조직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무백관의 관직제도 전반을 기술한≪高麗史≫百官志에는 2군 6위 외에 공학군이니 견룡군이니 하는 별도의 부대명칭들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 공학군·견룡군·중금군·도지, 그리고 백갑 등은 2군 소속의 군사들에게 부여된 보다 세분화된 임무별 명칭들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의종 24년(1170) 무신란 주동자의 한 사람이었던 견룡군 散員(정8품) 이의방이 거사 직후 응양용호군 중랑장(정 5품)으로 越階한 것도 견룡군이 2군 소속의 군인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0677)≪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李義方.

 2군보다 아래의 지위에 있는 중앙군 조직은 6위(좌우위·신호위·흥위위·금오위·천우위, 그리고 감문위)였다. 이들 6위는 다음<표 3>과 같이 앞의 3위(좌우위·신호위·흥위위)와 뒤의 3위(금오위, 천우위, 감문위) 사이에는 몇가지 기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우선 전자의 병력수(무관을 제외한 병사의 수)가 후자의 그것보다 압도적으로 많게 편제되어, 2군 6위 전체 병력수(45,000명)의 71%(32,000명)가 좌우위·신호위, 그리고 흥위위 소속의 군인들이었다. 구성 병력의 성격을 보면, 전자의 3위 군인들은 동일하게 保勝軍과 精勇軍의 두 가지 부류의 군인들로 편제된 반면 후자의 3위는 각기 상이한 부류의 군인들로 편제되어 있었다. 부대명칭에 있어서도 양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즉 전자(좌우·신호·흥위)는 모두가 고려 특유의 중앙군 부대명칭들인 반면 후자(금오·천우·감문)는 모두가 중국식 중앙군제에서 차용된 부대명칭들이었다. 6위가 이같이 크게 두 가지 범주의 부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들 각각의 임무를 이해하는데 유리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부 대 명 병 력 구 성 부 대 명 병 력 구 성
좌 우 위
신 호 위
흥 위 위
보승군 10령 정용군 3령
보승군 6령 정용군 5령
보승군 7령 정용군 5령
금 오 위
천 우 위
감 문 위
정용군 6령 역령 1령
상 령 1령 해령 2령
1령
계 32령(32,000명) 계 11령(11,000명)

<표 3>6위의 병력구성

 금오·천우·감문의 3위의 임무는 각각의 부대명칭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금오위는 漢代 이래로 도성 치안 및 경찰 임무를 맡는 중앙군 부대에 부여되었던 명칭이었다. 고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高麗史≫나≪東文選≫같은 사료에는 금오위가 도성을 순찰하고, 常道와 풍기를 문란케 하는 자들을 단속하며, 죄수들을 처리하는 일을 담당한 구체적 사실들이 나오고 있다.0678)≪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3년 3월.
≪東文選≫권 25, 盧之正金吾衛上將軍官誥.
≪高麗史節要≫권 9, 인종 9년 6월.

 금오위는 정용군 6령과 역령 1령 등 7령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정용군과 역령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금오위의 병력이 왜 이런 식으로 펀제되었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역령은 아마도 죄수들의 감시를 전담하는 군인들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하나의 추측일 뿐이다.0679)李基白, 앞의 책, 90쪽. 그러나 금오위의 임무의 성격상 그 조직에는 반드시 개경 거주의 전업적 군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며, 그들은 비록 말단의 지위이지만 문무관료들처럼 소정의 반대급부를 받는 군인들이었을 것이다. 문종 30년(1076)에 개정된 田柴科(문무양반 및 군인들에 대한 토지급여규정)에 보이는 ‘役步軍’이라는 부분이 ‘役軍 및 步軍’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경우의 役軍은 금오위 소속의 역령일 것으로 판단된다.0680)≪高麗史≫는 田柴科 지급대상자들의 직함이나 신분 명칭들을 하나 하나 띄어 쓰지 않고 연달아 표기해 놓았기 때문에 각각을 정확히 구분하기가 곤란한 부분들이 있다. 예컨대 “…典設役步軍…” 등이 그러한 부분인데, 이를 ‘典設役·步軍’으로 읽어야 할지 ‘典設, 役·步軍’이라 읽어야 할지는 그다지 분명치 않다.

 금오위와 마찬가지로 천우위 역시 그 명칭은 중국식 병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본래 천우란 국왕을 경호하는데 사용하는 칼로서, 중국에서는 천우도를 가지고 국왕을 호위하는 군사들을 千牛備身이라 하였다. 비신은 신변경호를 뜻하는 말이었다. 고려에서도 천우위장군의 별칭이 천우비신장군이었다. 또한 李奎報의≪東國李相國集≫에는 천우위가 왕을 숙위 시종하는 부대이기 때문에 그 군사들은 주로 고관자제들 가운데 용의가 수려한 자들로서 선발되었다고 전하고 있다.0681)≪東國李相國集≫권 33, 申宣冑讓千牛衛攝大將軍不允批答. 이와 같이 천우위는 국왕의 신변 경호를 담당하는 부대였던 것이다.

 천우위는 常領 1령과 海領 1령 등 2령의 군사들로 편제되어 있었다. 상령과 해령이 어떻게 다른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칭의 뜻을 가지고 추측해 보건대, 상령은 상시 시종숙위하는 임무를 맡도록 되어 있었던 군사들인 반면 해령은 해군의 기능을 가진 경호군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를테면 해로를 통해 입국하는 중국사신의 영접행사라든지 국왕이 강으로 행차하여 배를 타야할 경우 등에는 해령의 군사들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천우위 소속의 군사들은 그 임무의 성격과 출신성분으로 보아 개경 거주의 전업적 군인들일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 군역의 대가로 소정의 토지를 받았을 것이다.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고 복역하였던 중앙의 「海軍」은 아마도 이들 해령에 속하는 군인들이었을 것이다.0682)鄭景鉉, 앞의 글(1992), 106쪽.

 감문위의 임무는 명칭 그대로 도성문의 수위였다. 감문위 소속의 군인들은 편제상 1령이었으나 항상 도성의 각 문에 배치되어 있어야 할 감문군의 수효는 75명인 것으로≪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0683)≪高麗史≫권 83, 志 37, 兵 3, 衛宿軍. 도성문의 수위는 특별한 전투 기술이나 체력이 요구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감문위에는 본래의 감문위 소속 군인들 이외에 병들고 늙은 무의탁 군인들도 70세가 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배속되어 있었다.0684)吳英善,<高麗前期 軍人層의 二元的 構成에 관한 硏究>(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81), 19∼22쪽. 감문위의 군인들은 비록 그 상대적 지위는 가장 낮았지만 역시 일정한 토지를 지급받고 군역에 종사하는 전업적 군인들이었다. 문종 30년에 개정된 전시과는 모두 18등급으로 구성되는데 감문위 군사들은 이 중 17등급으로서 20결의 토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068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금오위·천우위·감문위의 경우와 달리 좌우위·신호위·흥위위 등 3위의 임무는 그 명칭만 보아서는 알 수 없다. 이들 3위는 중앙군 조직에 있어 편제병력의 규모가 가장 큰 부대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각각은 모두 보승군과 정용군의 두 부류의 군사들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 3위의 군사들이 기본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군역을 부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들 3위의 공통된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응양군과 용호군의 2군, 그리고 금오·천우·감문 등의 3위는 국왕 경호와 도성 치안을 위한 군사조직이었다. 그러나 고려정부로서는 그러한 군사조직 뿐 아니라 반드시 국토방위와 변경수비를 주목적으로 한 직속군대를 편성·운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려정부는 태조대 이래 줄곧 정부직속군을 북방의 국경지대(兩界地方)로 보내서 防戍토록 하였다.0686)≪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국경지대는 광범위한 데다가 防戍軍의 복무는 윤번제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방수를 기본임무로 하는 중앙군 부대는 자연히 그 병력 규모가 방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중앙군 전체 병력의 71%를 점한 좌우위·신호위, 그리고 흥위위 등의 군사들은 무엇보다도 국토방위를 위해 편성·운용된 병력들이었다고 판단된다. 靖宗 2년(1036) 7월 변경에 방수하러 간 ‘諸衛의 軍人들’ 가운데 자기농토(名田)가 부족해 궁핍한 자들에게 公田을 加給토록 한 왕명이 있었는데0687)≪高麗史≫권 81, 志 35, 兵 1, 정종 2년 7월. 여기서의 제위의 군인들은 필시 좌우·신호·흥위 등 3위에 소속된 군사들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다른 잡역에도 수시로 징발되었을 것이 나, 그들에게 부과된 주된 군역은 역시 국경지대의 방수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2군 6위 각각의 임무와 병력편제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2군은 금군, 곧 국왕을 호위하고 의장하는 친위부대들이었다. 그리고 천우위 역시 국왕을 측근에서 경호하는 친위군 부대였다. 2군은 친위군 강화의 목적으로 천우위가 설치된 이후에 추가로 창설된 부대들이었지만 지위의 면에서는 중앙군 가운데 가장 높았다. 금오위는 도성지역의 경찰부대였다. 그리고 감문위는 도성문과 주요 시설들을 수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결국 국왕경호와 수도치안을 담당한 이들 부대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하겠다. 반면에 병력규모의 면에서 중앙군 조직의 주축이었던 좌우위·신호위, 그리고 흥위위 등은 양계지방의 국경경비를 주임무로 하면서 유사시에는 전투병력의 기간을 형성하는 부대들이었다. 따라서 이 3위는 중앙군이긴 하지만 국토방위를 기본임무로 하는 부대들이었고 그런 점에서 그 밖의 군사조직과는 그 성격이 구별되었다.

 이처럼 2군 6위의 중앙군은 그 임무의 성격상 도성방위를 위한 부대들과 국토방위를 위한 부대 등 크게 두 가지로 조직되어 있었다. 각 부대의 병력은 1천 명씩(1령)을 기본단위로 하여 편성되었으나 그 규모는 각각 달랐다.0688)이 글<표 2>2군 6위의 조직과 편제 참조. 중앙군에는 2군 소속의 군사들처럼 특정한 제도적 명칭이 없는 군사들과 보승군·정용군·역령·상령·해령, 그리고 감문군 등 여러 종류의 군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임무의 차이에 따라 부대별로 배속된 군사들의 종류 또한 달랐다. 금오위 소속의 정용군 6령을 제외하고 보면, 보승군과 정용군은 국경방수를 주임무로 하는 좌우·신호·흥위 등의 3위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국왕경호와 도성 방비를 전담하는 부대들에 배속된 군사들은 그 임무의 성격상대부분 개경 거주의 전업적 군인들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0689)鄭景鉉, 앞의 글(1992), 107쪽. 그러나 윤번제로 북방의 국경지대에 들어 가 일정기간씩 방수의 역을 져야 했던 군인들(좌우위·신호위·흥위위 소속의 보승군과 정용군)은 어떤 부류의 군인들이었을까. 番上立役하는 이들 방수군은 그 군역의 성격상 반드시 전업적 군인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대 개경의 대체적인 인구사정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렇게 많은 수의 군인들이 개경에 밀집해 살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필시 양계 이외의 지방사회에 거주하는 일부 선발된 농민군들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려정부는 경기 및 남도지방(西海道·交州道·楊廣道·慶尙道·全羅道)을 여러 개의 軍事道(일종의 徵兵管區)로 나누어 각 군사도별 보승군과 정용군의 인원수를 직접 파악해 놓고 있었는데 이들이 곧 중앙군에 편성된 보승군과 정용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0690)李佑成,≪高麗社會 諸階層의 硏究≫(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74), 62쪽.
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고려대 출판부, 1980), 123쪽.
그러므로 2군 6위의 중앙군은 개경 거주의 전업적 군인들과 외방 거주의 번상 입역하는 농민군 등 크게 두 부류의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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