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Ⅲ. 군사조직
  • 1. 경군
  • 3) 중앙군의 인적 구성에 관한 제설
  • (1) 부병제설

(1) 부병제설

 府兵制란 본래 6세기 중엽부터 8세기 초까지 중국에서 행해진 중앙군제도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당나라의 부병제도이다. 당은 경기지역을 위시해 전국 각 지방마다 折衝府라고 하는 군정기구를 설치하여 군인으로 선발된 自營農民들을 해당지역 절충부에 소속시키고, 지방의 절충부들은 다시 12衛를 주축으로 하는 중앙군에 소속시키는 군사조직을 운영하였다. 절충부는 府에 소속된 농민군들, 곧 부병들에 대한 군적관리·훈련·동원·지휘 등의 업무를 관장하면서 정기적으로 이들을 징발하여 1년에 한 두달씩 서울에 번상복무케 하거나 국경지대의 방어거점을 경비토록 하였다.

 당에서는 均田制를 시행하여 전체 농민이 골고루 소정의 농토를 분급받고 있었는데 그들 중 부병으로 선발된 농민들은 군역에 대한 보상으로 조세를 면제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병농민들은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농한기에는 훈련을 받고, 다시 자신들의 차례가 되면 일정기간씩 복역하는 방식으로 군역을 부담하였다. 대체로 이러한 성격의 병농일치의 집권적인 중앙군제가 당나라의 부병제(혹은 府衛制)였던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관료들은 고려시대의 중앙군제를 부병제였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즉 趙浚(1346∼1405)은 “우리 왕조의 5軍 42都府는 대체로 중국의 남북군과 당나라의 부위병이었다”고 했고,0691)≪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양왕 원년 12월. 鄭道傳(1342∼1398)은 “고려 전성기의 부병은 자못 당나라 병제의 취지를 살린 것”이라고 하였다.0692)鄭道傳,≪三峯集≫권 6, 經濟文鑑 下, 衛兵. 그리고 조선 초기에 편찬된≪高麗史≫병지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고려 태조는 三韓을 통일하고 비로소 6衛를 두었는데, 衛에는 38領이 있고, 領에는 각기 천 명씩이 있으며, 상하가 서로 유지되고 체통이 서로 연속하니 당의 부위제도를 방불하였던 것이다(≪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序).

 오늘날에도 고려 전기의 중앙군제는 기본적으로 부병제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즉 2군 6위의 중앙군은 軍班氏族이라 불리는 군인들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들 군반씨족은 “職業(?) 軍人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농민이었기 때문에 고려전기 중앙군제는 기본적으로는 당의 부병제와 비슷한 것”이라는 견해이다.0693)姜晋哲, 앞의 책(1980), 111∼132쪽.

 부병제설에서 가장 중요시한 논거의 하나는≪宋史≫의 다음 기사이다.

나라 안에 개인 사유지(私田)는 없다. 백성은 가족수에 따라 役을 부과받으며 16세가 넘으면 군역에 충당된다. 6軍 3衛는 항상 官府에 머물러 있다. 3년마다 선발되어 서북의 국경지대를 파수하는 군인들은 반년마다 교대된다. 군인들은 비상시에는 무장을 하고 役事가 있을 때에는 징발된다. 일이 끝나면 농사처로 돌아간다(≪宋史≫권 487, 列傳 246, 外國 3, 高麗).

 이 기사에서 6軍 3衛라는 부분의 의미는 다소 분명하지 않다. 6군은 6위를 가리키는 듯하며, ‘六軍三衛’는 그것의 술부인 “항상 관부에 머물러 있다”는 부분과 관련지어 판단할 때 6군(6위) 중 3위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6위 가운데 금오위·천우위, 그리고 감문위 등의 3위는 임무의 성격상 항상 경성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부대들이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6군 3위가 중앙군을 지칭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기사에서 언급된 군인들 혹은 그 일부는, 교대제로 국경 경비의 役을 부담하거나 수시로 부과되는 소정의 역을 마치면 자신들의 농사처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 농민군들이었다.

 제위의 군사들이 농민들로 편성되었음을 보이는 기록은≪高麗史≫에서도 확인된다.

(문종) 4년 10월 都兵馬使 王寵之가 上奏하였다. ‘傳에 이르기를 안전할 때에도 위태로운 때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했고 또 이르기를 적이 오지 않는다 하여 방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諸衛의 군사들은 국가의 爪牙이니 마땅히 농한기에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문종 4년 10월).

(고종 4년 10월) 安東·慶州·晋陜州·尙州·靈岩·羅州·全州·楊廣州·淸州·忠州 등 10道에 사신을 파견하여 諸州의 土貢을 독촉하고 또 겨울옷을 가지고 오겠다는 이유로 귀향했다가 오랫 동안 番上하지 않는 군인들에게 빨리 서울로 올라오도록 명령하였다(≪高麗史≫권 22, 世家 22, 고종 4년 10월).

 위의 첫 번째 기사 중 농한기에는 반드시 제위 군사들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구절은 그 군사들이 농민들이었음을 알려 준다. 만일 제위 군사들이 농민군이 아니라 전업적 군인들이었다면 이 구절은 그들의 훈련시기를 농작물 피해가 없도록 농한기로 한정하자는 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0694)李基白, 앞의 책, 275쪽. 그러나 이런 해석은 그 구절의 전후 문맥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두 번째 기사에서는 겨울옷을 가지러 남도지방의 고향으로 내려 갔다가 번상하지 않는 군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따라서 제위의 중앙군이 번상입역하는 농민군들로 편성되었으리라는 부병제설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부병제론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논거로서, 남도지방에도 보승군과 정용군이라는 이름의 군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高麗史≫병지 州縣軍條에는 경기 남방 5도 지역의 병역자원 일람이 기재되어 있다. 고려정부는 이들 각 행정도를 다시 몇 개의 軍事道로 구획한 다음 각 군사도별 병력자원을 보승군·정용군·일품군 등의 세 가지로 분류하여 각각의 兵員數를 파악하였다. 중앙정부가 남도지방의 보승군과 정용군의 현황을 직접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제위 소속의 보승군과 정용군이었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한다. 그런데 중앙군에 편제된 보승군(22,000명)과 정용군(16,000명)은 모두 38령(38,000명)인데 비하여≪高麗史≫병지 주현군조에 기재된 보승군(8,601명)과 정용군(19,754명)의 총수는 2만 8천여 명이다. 양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6위의 병력편제는 성종 14년(995)에 제정된 것이지만, 주현군조에 기재된 보승군과 정용군 수는 인종대에서 고종대 사이의 어느 시기에 조사된 것으로 추정된다.0695)李基白, 위의 책, 205쪽의 각주 3 참조. 그리고 인종대에 이미 군역제도가 크게 붕괴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0696)金塘澤,<別武班의 設置와 軍制의 變化>(≪高麗軍制史≫, 陸軍本部 1983), 241∼249쪽. 그러므로 제위 소속 보승군·정용군의 편제병력수와≪高麗史≫주현군조에 기재된 지방 소재 보승군·정용군 수효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지방농민군의 번상입역제도를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 부병제론자들의 반론이다.0697)姜晋哲, 앞의 책(1980), 122∼124쪽.

 과연 중앙군이 번상입역하는 농민군들로 편성되어 있었다면 국가는 그들의 군역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제도적 보상을 하였을까. 고려정부는 양반관료계급에 대해서 뿐 아니라 군인들에 대해서까지도 토지를 지급하는 방식의 보수 제도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즉 목종 원년에 개정된 「文武兩班及軍人田柴科」규정에 의하면 馬軍은 田 23결을 그리고 諸步軍은 田 20결을 받도록 되어 있다.069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이와 같이 문무관료들과 더불어 소정의 토지를 받도록 규정된 마군이라든지 제보군은, 물론 전국의 군인 일반이 아니라 중앙의 정부직속군이었다. 그리고 이들 특정부류의 군인들을 위해 제정된 전시과 제도상의 토지가 곧 군인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직속의 군인들에게 이러한 군인전이 지급되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가. 부병제설에 따르면, 그것은 군인들에 대한 토지 그 자체의 지급이 아니라 그들이 농민으로서 본래 소유하고 있던 농토(民田)에 대한 조세면제권의 지급이었다는 것이다. 즉 “군인전을 형성하는 모체가 되는 토지는 원래 군인들이 농민으로서 「所有」해 오던 그들의 민전이며 「免稅」를 조건으로 주로 이 민전 위에 군인전을 설정하여 「支給」이라는 의제적인 형식절차를 취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0699)姜晋哲, 앞의 책(1980), 114쪽. 부병제설의 입장에서는 중앙군이 자영농민층에서 선발된 군사들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논리상 군인전을 自耕免租地로 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정리해 본 부병제설의 요지는 다음 세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① 2군 6위의 중앙군은 자영농민층에서 선발되어 번상입역하는 농민군들로 편성되었다. 그들은 군반씨족이라 불리웠다. ② 경기 및 남방 5도에 산재한 보승군과 정용군이 곧 중앙군 소속의 보승군과 정용군을 형성하였다. ③ 중앙군에 대한 전시과 제도상의 군인전 지급은 해당 군인들의 본래 소유지(민전)에 대한 면세권의 지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요지의 부병제설에는 물론 납득할 만한 점들이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몇 가지 간과하기 어려운 문제점들도 내포되어 있다.

 첫째, 국가가 번상 입역하는 농민군들에게 면세권을 지급했다고 상정하는 것은 당대의 역사적 여건에 비추어 볼 때 개연성이 희박해 보인다. 왜냐하면 번상입역하는 농민군에 대한 조세면세권의 지급과 같은 조치는 봉건적인 국가권력의 속성상 상당히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재정형편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시대에도 번상입역하는 농민군에게 조세면제권과 같은 반대급부를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군인 1인당 면세지를 20결씩 잡으면 중앙군 전체의 면세지 만도 무려 90만 결이 되는데 이것은 고려의 농경지를 다 합친 것보다도 많은 면적이다.0700)고려말 공양왕 3년(1391)의 土地調査에 의하면, 전국의 농경지 총면적은 79만 8천 118결이었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공양왕 3년 5월). 고려정부가 그처럼 터무니없이 모순된 제도를 제정했을 것 같지는 않다.

 둘째, 군인전은 문무양반 및 군인전시과 체제의 일부였다. 그리고 각급의 문무양반 관료들이 이 전시과 체제에서 지급받는 소정의 토지는 그들 토지의 실제 경작농민들로부터 租를 받을 수 있게끔 되어 있는 收租地였다.0701)姜晋哲, 앞의 책(1980), 74쪽. 그렇다면 군인들에 대한 토지도 수조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병제설은 전시과체제 안에서 유독 군인전만을 군인들의 자경면조지로 해석하였다. 이것은 군인전을 받는 군인들이 번상입역하는 농민군인들이었다는 그의 결론과는 부합되는 개념이 지만 수조지 지급을 원칙으로 한 전시과 제도의 기본 성격과는 맞지 않는 하나의 무리하고 복잡한 가설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중앙군으로 편성된 군인들 가운데 번상입역하는 농민군들이 포함되어 있었음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앙군 전체가 그런 부류의 군인들로만 편제되었다는 확증은 없다. 현실적으로 국왕 경호와 도성 수비를 고유 임무로 하는 중앙군 가운데 전업적 군인들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국왕의 경호와 의장 혹은 도성지역의 경찰 등은 지방에서 번상입역하는 농민군들에게는 부여될 수 없는 성격의 임무들이었다. 따라서 개경에는 틀림없이 일정 규모의 전업적 군인들이 존재했을 것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들의 군역은 당대 신분제사회의 속성상 세습되고 있었으리라는 점까지 추리해 볼 수 있다. 그 말뜻으로 보건대 「군반씨족」이라 불리던 군인들이 바로 그러한 전업적이고 세습적 군인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체로 이러한 관점에서 입각해 부병제실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설명체계가 다음에 소개될 군반씨족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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