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Ⅲ. 군사조직
  • 1. 경군
  • 3) 중앙군의 인적 구성에 관한 제설
  • (2) 군반씨족제설

(2) 군반씨족제설

 군반씨족제설의 요지는 2군 6위 군사들 모두가 세습적·전문적으로 군역에 종사하는 특정한 씨족, 즉 「군반씨족」 출신의 군인들로만 편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0702)李基白, 앞의 책, 141∼144·283∼289쪽. 이러한 주장은 개념상 ① 군반은 세습적·전업적 군인들이었다. ② 중앙군은 모두 군반으로 편성되었다는 등의 두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앞서 살폈듯이 부병제설에서는 군반을 중앙군으로 선발된 농민군으로 해석했었다. 그러나 군반씨족제설에서는 군반을 세습적·전문적 군인들로 파악하였다.0703)위와 같음. 군반을 그렇게 파악한 것은≪高麗史≫에 나오는 다음 기사 때문이다.

(文宗 18년) 兵部에서 아뢰기를, ‘軍班氏族의 帳籍이 작성한 지 오래되어 낡고 썩었습니다. 때문에 군인의 수효(軍額)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전의 방식에 의거해 그 장적을 다시 만들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請을 받아들였다(≪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5년 윤 5월).

 주지하다시피 고려시대에는 정부직속의 관인들을 그 직역의 종류에 따라 집합적으로 구분할 때에 「班」자를 사용하였다. 文班·武班, 그리고 南班 등이 그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군반‘이란 군역을 자신들의 직역, 곧 직업적 소임으로 하는 군졸집단에 대한 제도적 명칭이었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씨족이 帳籍, 곧 軍籍에 등재되고 있었음은 그들이 세습적 군인들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군반씨족제설에서는, 군반은 세습적·전업적 군인들로서 그 직역의 성격상 개경 거주의 군인, 즉 경군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45령(45,000명)의 2군 6위 군졸 전부가 개경 거주의 군반들이었던 것으로 주장한다. 즉 태조대의 경군병력은 4만 3천 명이었는데0704)李基白, 위의 책, 51쪽. 통일 후 이들이 세습적 군인신분층으로 굳어지면서 성립된 것이 바로 군반씨족이라는 것이 다.0705)李基白, 위의 책, 285쪽. 그리고 위 인용기사에서 군인의 수효가 부정확한 것은 군반씨족의 장적이 낡고 썩었기 때문이라 했으므로, 그 군인들(2군 6위의 중앙군)은 오직 군반씨족으로만 구성되었으리라는 것이다.0706)李基白, 위의 책, 141∼142쪽.

 그러면 이들 세습적·전업적 군인들로서의 군반씨족이 받은 군인전은 어떤 성격의 토지였을까. 부병제설에서는 군반을 중앙군 소속의 특정한 농민군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전시과 제도상의 군인전을 그들의 자경면조지로 해석했었다. 그러나 군반제설에서는 군반을 넓은 범위의 관인계급에 속하는 세습적·전문적 군인들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군인전을 문무양반의 그것과 마찬가지의 收租地였다고 주장하였다.0707)李基白, 위의 책, 144∼149쪽. 수조지란 그 농토의 실제 경작자들로부터 소정의 租를 받도록 되어 있는 농토였다. 군인전=수조지라는 이같은 해석은 군인전이 아무 단서조항 없이 문무양반 전시과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잘 부합된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중앙군의 주축은 보승군과 정용군이었다. 그리고 경기 및 남도지방의 각 군사도마다 보승군과 정용군이 있었다. 그런데 군반제설에서는 45령의 중앙군 모두가 개경에 거주하는 군반출신의 군인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제위의 보승·정용군과 지방사회의 보승·정용군은 명칭이 동일해도 소속이 다른 군인들이었다는 말이다. 즉 전자의 보승·정용군은 중앙군 소속의 군인들이었던 반면 후자의 그들은 주현군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통일적 지방군 조직’에 소속된 군인들이었다는 것이다.0708)李基白, 위의 책, 198쪽. 이처럼 부병제설에서는 전자와 후자를 동일시한 반면 군반제설에서는 양자를 별개로 보았다.

 군반제설에 의하면 중앙군의 주축인 보승군과 정용군이 전시과 제도상의 군인전을 받는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전시과 규정에는 ‘馬軍’·‘諸步軍’·‘監門軍’ 등의 군인들만 지적되었을 뿐 보승군과 정용군이라는 명칭들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군반씨족제설을 주장한 논자는, 군반씨족제설을 전제로 전시과 제도상의 步軍과 馬軍이 각각 보승군과 정용군에 해당되는 군인들이었으리라고 추측하였다.0709)李基白, 위의 책, 72∼90쪽. 이같은 논법에 있어서는 보군과 마군이 실제로 보승군과 정용군을 의미하는 것이었는가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가 논리상 매우 중요하다. 만일 보승·정용군이 실제로 보군·마군 또는 마군·보군의 구별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리하여 양자가 서로 차원을 달리한 병종 구분이었다면 군반씨족제설의 설득력은 아주 약해질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검토는 논의의 편의상 잠시 뒤로 미루겠다.

 요컨대 군반씨족제설의 개념적 핵심은 ① 2군 6위의 중앙군은 군반씨족이라 불리는 개경 거주의 전문적이고 세습적 군인들로만 편성되어 있었다. ② 그들 모두는 전시과 제도상의 군인전을 지급받았는데 그 토지는 수조지였다. ③ 제위 소속의 보승·정용군은 경기 및 남도지방의 보승·정용군과는 소속과 성격이 다른 군인들이었다는 등의 세 가지로 압축해 볼 수 있다.

 이같은 요지의 군반씨족제설은 추론과정에 있어서 합리적으로 이해되는 부분들이 있는가 하면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다. 중앙군의 가장 중요한 고유 임무가 국왕경호와 도성 수비였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그들 가운데 개경 거주의 전업적 군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군반씨족은 그 명칭의 의미라든지 그 용어가 포함된 기사의 앞 뒤문맥으로 보건대 윤번입역하는 농민군이라기 보다는 군역을 직역으로 세습하는 군인들로 해석함이 보다 더 합리적이다. 그리고 전시과 제도는 중앙의 官人들을 대상으로 한 수조권 지급형태의 보수제도였으므로 그 제도 속의 군인전 역시 수조지로 파악함이 타당해 보인다. 따라서 군반씨족제설의 절반 부분, 즉 군반씨족은 군역을 직역으로 세습하면서 그 대가로 소정의 수조지(군인전)를 지급받는 전업적 군인들이었다는 부분은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군반씨족제설의 나머지 절반부분, 즉 2군 6위의 소속군인 전부가 그러한 군반씨족 출신의 군인들로 편성되어 있었다는 일반화는 무리해 보인다. 그 논자는 군반씨족의 군적이 썩어 문드러져 군인들의 수효가 불분명하게 되었다는 앞의 인용기사를 근거삼아 2군 6위의 중앙군 전체가 군반씨족이었다는 일반화를 도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비약된 해석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한 일반화의 또 다른 간접적 근거로서 그가 지적한 것은 태조대 경군의 병력수였다. 그러나 그가 추정한 태조대 경군의 병력수 4만 3천 명도, 앞에서 비판했듯이 너무나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숫자였다.0710)李基白, 위의 책, 51쪽. 또한 부병제설에서 지적한 일부 중요한 논거-이를테면 번상입역하는 농민군들에 관한 기사들-에 대한 군반제설의 반론은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인다.0711)李基白, 위의 책, 276쪽의 내용과 張東翼,<高麗前期의 選軍-京軍構成의 理解를 위한 一試論>(≪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474∼475쪽의 내용을 비교해 볼 것. 군반제설의 가장 큰 난점은 특히 군인전 해석부분에서 두드러진다. 군반제설의 주장대로라면, 4만 5천 명에 달하는 중앙군의 군인전만도 90만 결이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고려시대 전국의 농경지 총면적은 약 80만 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0712)고려말 공양왕 3년(1391)의 土地調査에 의하면, 전국의 농경지 총면적은 79만 8천 118결이었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공양왕 3년 5월). 이 점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요컨대 중앙군 가운데 군반씨족이라 불리는 전업적이고 세습적 군인들이 있었음은 충분히 인정되나 45령의 중앙군 전체가 그러한 종류의 군인들로만 구성되었다는 주장은, 부병제설에서 중앙군 전체를 농민군으로 간주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성급한 일반화였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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