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Ⅲ. 군사조직
  • 1. 경군
  • 3) 중앙군의 인적 구성에 관한 제설
  • (3) 경·외군 혼성제설

(3) 경·외군 혼성제설

 우리는 위에서 부병제설과 군반씨족제설 각각의 요지와 문제점들을 고찰해 보았다. 중앙군 가운데 지방에서 번상입역하는 농민군들이 포함되어 있었음은 거의 확실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부병제설의 입론이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중앙군 중에는 수조지로서의 군인전을 받으면서 전업적·세습적으로 군역에 종사하는 군인들 즉 「軍班氏族」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군반씨족제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45령의 중앙군 전체가 번상입역하는 농민군 혹은 군반씨족의 어느 한 부류의 군인들로만 편성되어 있었다고 일반화한 점에 있어서는 두 가지 설 모두 설득력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같은 일반화들은 근거가 불충분하거나 부적절할 뿐 아니라 당대의 객관적 여건, 이를테면 전국의 토지면적, 개경의 인구 및 주택사정, 그리고 농민들의 정치적 지위 등과 명백히 모순되기 때문이다.

 부병제설과 군반제설의 이같은 문제점 때문에 최근에는 양설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는 절충적 가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즉 2군 6위의 중앙군은 크게 개경에 거주하는 전업적 군인층(경군)과 지방에서 번상입역하는 농민군층(외군) 등 두 종류의 군인층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리라는 가설이 그것이다.0713)직·간접적으로 이러한 가설을 제시한 논문들로서는 張東翼, 앞의 글과 鄭景鉉, 앞의 글(1992)·앞의 글(1990) 및 吳英善, 앞의 글 외에 다음의 글들이 있다.
洪元基,<高麗·二軍六衛制의 性格>(≪韓國史硏究≫68, 1990).
鄭景鉉,<高麗前期 京軍의 軍營>(≪韓國史論≫23, 서울대 國史學科, 1990).
馬宗樂,<高麗時代의 軍人과 軍人田>(≪白山學報≫36, 1991).

 이러한 절충적 가설의 논거로서 다음 몇가지가 지적되고 있다. 우선 전시과 제도상으로는 분명히 마군·보군·감문군 등의 군인들이 소정의 군인전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앙군 전체에게 규정된 면적의 군인전을 주려면 전국의 농토를 다 합쳐도 태부족이었다. 이것은 군인전을 지급받는 군인들이 중앙군 가운데 일부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2군 6위의 중앙군은 편제상 그 병력 규모가 4만 5천 명이었다. 그러나 당대 개경지역의 인구사정이나 주택사정으로 보아 그렇게 많은 수의 전업적 군인들이 밀집해 살 수가 없었다. 이 점 역시 중앙군의 일부만이 개경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앙군이 경군과 외군으로 혼성되어 있었음은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다.

 중앙군이 경군과 외군의 두 계층의 군인들로 구성되었으리라는 점은 2군 6위 각 부대의 임무 분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2군 6위의 임무는 크게 두가지 범주로 구분된다. 하나는 좌우위·흥위위·신호위 등에 부과된 국경지대 경비(防戍)의 임무이며, 다른 하나는 응양군과 응호군, 금오위·천우위, 그리고 감문위 등이 전담한 친종과 근장·치안·성문수위 등의 임무였다. 전자는 다수의 농민군들이 윤번제로 수행할 수밖에 없는 군역이었던 반면 후자는 개경 거주의 비교적 특정한 계층의 군인들이 전업적으로 수행해야 할 군역이었다.0714)鄭景鉉, 앞의 글(1992), 97∼113쪽. 즉 중앙군에는 부역으로서의 군역을 짊어지는 군인들과 직역으로서의 군역에 종사하는 군인 등 크게 두 부류의 군인층이 있었다고 이해된다.

 중앙군의 이중적 구성설은 고려 전기 지방행정제도의 발전과정과도 잘 부합되는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고려 초기의 국가권력은 지방사회에 상주 지방관도 파견하지 못할 정도로 미약하였다. 그러나 중국식의 집권적 국가체제를 모델로 하여 통치제도를 크게 개혁한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12군 절도사제가 시행되는 등 지방사회에 대한 정부의 군사행정적 통제력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지방사회의 우수한 농민군들이 대거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들어오게 되었을 것이다. 성종 14년 경에 38령 규모의 중앙군 조직(6위)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사태의 진전을 배경으로 했을 것이다. 따라서 성종대의 6위는 태조대 이래 경성의 토박이 군인들(경군)과 새롭게 편입된 지방농민군(외군)의 두 가지 군인층으로 편성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고려 전기 중앙군의 인적 구성이 이중적이었음은 중앙군으로 선발된 군인들의 신분분석 결과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되었다. 2군 6위의 실제 병력규모는 편제상의 그것보다 거의 언제나 부족했다. 중앙군의 병력수는 전란을 겪고 나면 크게 줄어들었고 그같은 병력 부족의 현상은 평상시 도망군들이 속출함으로써 만성화되었다. 때문에 정부는 選軍都監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수시로 중앙군의 결손을 보충하기 위해 군인을 선발(選軍)하였다.0715)張東翼, 앞의 글, 444∼457쪽. 그러면 선군도감에서는 어떤 계층의 사람들을 선발하여 중앙군에 편입시켰던 것일까. 법제상으로 6품 이하의 양반 및 일반 양민(白丁)들의 자제가 모두 선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5품 이상의 자제라든지 향리, 왕족 및 공신의 후손들 심지어는 역을 부담하는 천인(有役賤口)까지도 선발되어 중앙군으로 보충되고 있었다.0716)張東翼, 위의 글, 458∼468쪽.

 이상의 논거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고려 전기 중앙군은 농민군 아니면 세습적 전문군인 중 어느 한 가지 종류의 군인들로만 편제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중앙군 안에는 농민군도 있었고 전문적 군인들도 있었다. 혹은 그 어느 쪽도 아닌 군인들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지만 고려 전기 중앙군을 구성한 여러 부류의 군인들은 그들이 짊어진 군역의 성격과 그 에 대한 국가적 보상 등의 면에서 기본적으로 두 종류로 대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군역을 직역으로 수행하는 대가로 군인 전시과를 받는 소규모의 특수 군인층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역을 국가적 부역으로 짊어지기 때문에 군인전시과를 받지 못하는 대다수 농민군인층이었다. 그리고 전자의 군인들은 개경 거주의 군인들(경군)이었고 후자의 군인들은 거의가 지방 거주의 군인들(외군)이었을 것이다.0717)‘京軍’과 ‘外軍’의 구분은≪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문종 원년조에 잘 나타나 있다.

 고려 전기 중앙군이 이처럼 기본적으로 상이한 두 종류의 군인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그들의 군역에 대한 보상제도 또한 각기 달랐을 것이다. 군반씨족을 비롯한 개경의 전업적 군인들은 전시과 제도상의 군인전을 지급받았고 그 군인전은 수조지였다.0718)李基白, 앞의 책, 144∼159쪽. 다음 기사는 강감찬이 군호에게 급여한 양전이 바로 수조지로서의 군인전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吏部尙書 강감찬이 아뢰기를 ‘臣이 開寧縣에 良田 12結이 있는데 청컨대 軍戶에게 주고자 합니다’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高麗史節要≫권 3, 현종 7년 12월).

 강감찬은 開寧縣(지금의 경북 상주지방)에 양전 12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토지를 軍戶에게 주기 위해 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개령현에 있는 강감찬의 토지가 국가로부터 받은 수조지였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토지를 받게 된 군호 또한 수조지를 넘겨 받을 수 있는 군인, 곧 개경 거주의 전업적 군인이었음을 말해 준다.0719)鄭景鉉, 앞의 글(1992), 152쪽.

 한편 윤번제로 입역하는 지방 농민군들에게는 군역의 대가로 무엇이 주어졌던 것일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점은 분명해 보인다.

 첫째, 이들 농민군들에게는 수조지 혹은 면조지로서의 군인전이 지급되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0720)李基白은 保勝軍과 精勇軍을 軍班氏族으로 간주하여 이들에게 收租地가 지급되었을 것이라 하였고(李基白, 앞의 책, 149∼150쪽 참조), 姜晋哲은 保勝軍과 精勇軍을 농민군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自耕免租地가 주어졌을 것이라 했다(姜晋哲, 앞의 책, 1980, 127쪽 참조). 중앙군의 이중적 구성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38령 규모의 보승군과 정용군이 곧 윤번입역하는 농민군들로 편성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0721)張東翼, 앞의 글.
洪元基, 앞의 글.
鄭景鉉, 앞의 글(1992).
그런데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에 대한 군인전의 지급은 그것이 수조지이건 면조지이건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액수의 세입결손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실행 불가능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정부가 번상입역하는 농민군들에 대해서까지 조세면제의 보상제도를 마련했다고 가정함은 당대 국가권력의 근본 성격에 비추어 보아도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농민군들의 군역에 대해서도 비록 열악한 수준의 것이지만 모종의 보상제도가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보승군과 정용군의 주임무는 윤번제로 반년 혹은 1년간씩 양계지방의 여러 州와 鎭에 들어가 수자리(방수)하는 일이었다.0722)李基白, 앞의 책, 138쪽 참조.
鄭景鉉, 앞의 글(1992), 173∼183쪽 참조.
남한지역의 농민군들이 북방 양계지방에 들어가 부담하는 방수역은 도중에 많은 군인들을 질병으로 죽게 할 만큼 혹독한 고역이었다.0723)鄭景鉉, 위의 글, 180∼183쪽 참조. 또한 수자리하러 간 군인의 가족들은 생계에 커다란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고려정부가 지방의 농민군에 의한 방수제도를 유지하려고 하는 한 그들의 과중한 군역부담에 대해서도 모종의 보상조치를 강구해야만 했을 것이다.

 실제로 국경지대의 주·진에 입거하는 군인들에게는 일정한 보상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는데, 다음의 두 기사는 그러한 사실을 보여 준다.

(문종) 27년 3월 州鎭 入居軍人들에 대해서는 관례대로 本貫의 養戶 2명씩을 급여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문종 27년 3월.

(인종) 22년 西京과 東西州鎭의 入居軍人들에 대해서는 본관의 잡역을 면제해 주기로 하는데 만일 이를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그 실무관리들을 처벌키로 결정하였다(≪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인종 22년).

 이처럼 문종대에는 주진 입거군인들에게 각자의 본향에서 2명씩의 양호를 배당해 주는 제도가 있었고 인종대에 이르러서는 그들 본향에서의 잡역도 면제하라는 정부조치가 있었다. 주진 입거군인들에게 그 본향의 잡역을 면제해 준다는 것은 그 군인의 가호에 대해 잡역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한편 주진 입거군인들에 대한 양호의 지급은 잡역면제 조치 훨씬 이전부터 하나의 제도로서 시행되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에 대한 대표적인 보상제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양호가 군인에 대하여 부담한 역은 무엇이었을까. 다음 기사는 양호의 임무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예종 3년 2월에 왕이 명하였다. ‘근래 州·縣의 官吏들이 왕실과 조정의 농토에 대해서만 사람들을 시켜 갈고 씨를 뿌리고 있다. 그러나 軍人田의 경우는 비옥한 땅인데도 불구하고 농사짓도록 힘써 장려하지도 않을 뿐더러 양호들이 양식을 나르도록 명령하지도 않고 있다. 때문에 군인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도망가고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우선 군인전부터 각각 佃戶를 배정하여 농사를 장려하고 양식을 나르도록 하는 일에 관해 해당 관서는 상세히 보고하여 결재받도록 하라’(≪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예종 3년 2월).

 이 기사에 의하면 양호는 입역 중인 군인에게 양곡수송의 역을 부담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언급된 군인들은 주진 입지군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양호에 의한 양곡수송이 불가능하고 불필요했기 때문이다.0724)李基白, 앞의 책, 104쪽. 그러므로 이 기사의 군인들은 개경 거주의 전업적 군인들이었거나 아니면 번상입역 중인 농민군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사의 양호 또한 개경 거주의 특수군인층의 양호들이었거나 아니면 지방 농민군들의 양호들이었을 것이다. 만일 전자였다면 그들은 군인수조지(전시과 제도상의 군인전)의 경작농민으로 이해함이 타당해 보인다.0725)李基白, 위의 책, 149∼152쪽. 그러나 후자였다면 그들은 입역 중인 농민군 가족의 농사를 돌봐 주어야 하는 일종의 생계보조자들이었다고 이해될 수 있다.0726)姜晋哲, 앞의 책(1990), 128∼130쪽. 그리고 이 경우라면 앞 기사의 「군인전」은 전시과 제도상의 특정한 군인전이 아니라 군인의 농토라는 일반적 의미의 군인전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문맥상 앞 기사의 군인·양호, 그리고 군인전이 과연 어떤 쪽의 것들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를 고려해 볼 때 후자의 해석이 보다 더 타당해 보인다. 첫째, 양호는 오직 군인에게만 배당된 생활보조자들이었다. 그러나 수조지는 군인에게만 급여된 것이 아니었다. 군인은 수조지에 의한 보수체계(전시과제도) 안의 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한 집단이었다. 그리고 수조지 경작농민의 부담은 그것이 군인들의 수조지이건 양반관료의 수조지이건 원칙적으로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에게만 양호라 하는 특정한 생활보조자들이 배당되었음은 양호들이 수조지로서 의 군인전과는 관계없는 존재, 달리 말하면 수조지를 받는 전업적 군인들과는 관계없는 존재들이었음을 시사한다.

 둘째, 州鎭 入居軍들은 남도의 농민군들이었다.0727)李基白, 앞의 글, 104쪽. 그들에게는 수조지가 급 여되지 않았다. 그러나 앞서 고찰했듯이, 그들에게는 1인당 2명씩의 양호가 제도상 배당되고 있었다. 이같은 사실 또한 양호가 수조지를 받는 군인들이 아니라 수조지를 받지 못하는 군인들, 곧 중앙군 소속의 농민군들과 관련된 농민들이었음을 의미한다.

 셋째, 양호란 그 의미상 佃戶(소작인)라기 보다는 생계부양자를 뜻한다. 양호의 정체를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이 점도 물론 고려되어야 한다. 앞의 두가지 논거에 비추어 보면 더욱 그러하다. 조선시대에는 번상입역하는 군인들에게 「奉足」을 배당하여 그들로 하여금 군역에 필요한 물자를 뒷바라지하게 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0728)閔賢九,<近世朝鮮前期 軍事制度의 成立>(≪韓國軍制史-近世朝鮮前期篇-≫, 陸軍本部, 1968), 34∼41쪽. 고려사회와 조선사회 사이에 정치·경제적 여건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다는 일반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조선시대의 봉족제도와 고려시대의 봉족제도 사이에는 유사성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0729)鄭景鉉, 앞의 글(1992), 154∼158쪽.

 따라서 양호란 고려 전기 중앙군 소속의 주진입거 혹은 번상입역하는 지방의 농민군들에게 배당된 생계보조자들로서 그들의 기본임무는 해당 군인들이 입역해 있는 동안 그 軍人戶의 농사를 보조해 주는 농민들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도 번상입역 중인 군인의 양호는 주진 입거군인의 양호와는 달리 해당 군인에 대한 양곡운반의 부담까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중앙군의 보수제도에 관한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비교적 소규모의 전업 적 군인들(경군)은 전시과에서 규정된 수조지로서의 군인전을 받는 반면, 윤번입역하는 대다수의 지방농민군들(외군)은 입역기간 중 양호라 불리는 농사 보조자를 배당받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고 이해된다.

 경·외군 혼성제설과 관련하여 설명되어야 할 마지막 사실은 보승군과 정용군이다. 고려 전기 중앙군이 경군(특수군인층)과 외군(농민군인층)의 두가지 군인층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연구자들은 한결같이 지방의 보승·정용군을 제위의 보승·정용군과 동일시하고 있다.0730)張東翼, 앞의 글.
洪元基, 앞의 글.
鄭景鉉, 위의 글.

 군반제설에 의하면 중앙군 전체가 전시과 제도상의 군인전을 지급받는 전업적 군인들이었고 그 주축은 보군과 마군이었다. 한편 병종상으로는 보승군과 정용군이 중앙군의 주축이었다. 그러므로 보군과 마군은 곧 보승군과 정용군의 구별일 것으로 간주되어 왔었다.0731)李基白, 앞의 책, 72·90쪽. 이 점은 군반씨족제설과 경·외군 혼성제설과의 매우 중요한 차이점의 하나이다.0732)府兵制說의 姜晋哲씨도 保勝軍과 精勇軍을 步軍과 馬軍의 구별로 보았다(姜晋哲, 앞의 책, 1980, 122쪽). 따라서 경·외군 혼성제설의 입장에서는 보승군과 정용군이 전시과 제도상의 보군 및 마군이 아니었음을 보다 적극적으로 논증할 필요가 있다.

 우선 보승군과 정용군이 각각 보군과 마군을 지칭하는 것이었을 개연성은 극히 희박하다.≪高麗史≫병지는 병력수를 병종별로 구별하여 표시할 때 언제나 보승군 항을 먼저 쓰고 그 다음에 정용군 항을 썼다. 이같은 기재방식은 양자간의 제도적 서열을 표시하며 보승군이 정용군에 비하여 상위의 군사들이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고려시대 지방의 농민군들 가운데에는 기병보다는 보군이 휠씬 더 많았다.0733)鄭景鉉, 앞의 글(1992), 131∼132쪽. 그러나≪高麗史≫병지 주현군조에 보고된 경기 및 남도지방의 병종별 군인 수효를 보면 보승군보다는 정용군이 두배 가량 더 많았다. 따라서 적어도 보승군과 정용군이 각기 보군과 마군의 별칭이 아니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보승군과 정용군이 각기 마군과 보군의 별칭이었던 것도 아니다. 의종대에 정해진 法駕衛仗에 관한 규정을 보면 용호군 소속의 기병 600명이 法駕를 衛仗하게끔 되어 있었다.0734)鄭景鉉, 위의 글, 132∼133쪽. 이들 용호군 소속의 기병은 틀림없이 군인전을 지급받는 마군 바로 그들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용호군에 소속된 2령의 군사들은 보승군도 정용군도 아니었다. 이같은 사실은 군인전 지급대상자로서의 마군 및 보군은 보승군 및 정용군과는 서로 다른 범주의 군인들이었음을 말해 준다.

 보승군과 정용군이 이처럼 전시과 규정상의 보군과 마군(혹은 마군과 보군)이 아닌 지방의 농민군들이었다면 보승군과 정용군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앞서 지적했듯이 보승군은 정용군 보다 어떤 면에서 상위의 군사들이었다.≪高麗史節要≫숙종 9년(104) 9월조에는, 왕이 長源亭에 행차하여 보승군만을 소집 열병하였다는 기사가 보이는데0735)鄭景鉉, 위의 글, 128쪽. 이 역시 보승군의 상대적 지위가 그만큼 높았음을 시사한다.0736)千寬宇,≪近世朝鮮史硏究≫(一潮閣, 1979), 28쪽. 그러나 보승군은 실제적인 전투력에 있어서 정용군보다 우위의 군사들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용맹성 때문에 선발된 군인들은 오히려 정용군들이었을 것이다. 「精勇」이라는 명칭 자체가 그 점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보승군은 향촌사회에서 비교적 그 家勢 가 부강한 농민들 중에서 선발된 군인들이었던 반면 정용군은 비록 신분이나 가세는 보잘 것 없지만 개인적 용맹성 때문에 중앙군으로 선발된 군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0737)鄭景鉉, 앞의 글(1992), 141∼142쪽.

 보승군과 정용군에 대한 이같은 해석은 고려 전기 중앙군이 개경 거주의 특수군인들(경군)과 지방 거주의 농민군(외군)으로 혼성되어 있었다고 하는 절충적 가설과 잘 부합된다. 전업적인 특수군인층과 번상입역하는 농민군인층의 기본적 차이는 각기 부담하는 군역의 성격과 그에 따른 제도적 보상의 차이였다. 전자의 군인들에게는 군역이 전업적 직역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수조지로서의 군인전이 주어졌던 반면 후자의 군인들에게는 군역의 윤번제에 의한 賦役이었기 때문에 양호의 지급이라는 비교적 소극적인 반대급부만 주어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려 전기 중앙군(2軍 6衛)의 군역제도에 대하여 府兵制說, 軍班氏族制說, 그리고 京·外軍 混成制說 등 세 가지 주요 입론들을 살펴 보았다. 총 4만 5천 명 편제의 2군 6위의 군사들이 어떤 부류의 군인들로 충원되어 있었으며 어떤 보수제도하에서 운용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이 세 가지 입론은 각기 주장이 달랐다. 부병제설은 중앙군 전부를 윤번입역하는 농민군들(군반씨족=부병)로 파악하였으며 전시과 제도상의 軍人田은 군역의 대가로 조세를 면제받게 된 이들 농민군들의 自耕地(民田)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군반씨족제설은 중앙군 전부가 개경 거주의 전업적이고 세습적 군인들(군반씨족)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전시과 제도상의 군인전은 이들에게 주어진 수조지였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경·외군 혼성제설에 의하면, 고려 전기 중앙군은 개경 거주의 비교적 소규모의 전업적인 특수군인층(京軍)과 윤번제로 입역하는 대다수의 지방 농민군(外軍=保勝軍과 精勇軍)으로 혼합 편성되어 있었으며, 전자에게는 전시과제도에 따라 수조지로서의 군인전이 지급된 반면 후자에게는 복역 중인 軍人戶의 생계보조자(養戶)가 군인 1명당 2명씩 배당되었다.

 경·외군 혼성제설은 부병제설과 군반씨족제설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면서도 몇 가지 구체적인 증거들을 새롭게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 가설은 다른 두 가설에 비해 보다 많은 관련 증거들을 보다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경·외군 혼성제설에 의한 史實 해석이 부병제설이나 군반씨족제설에 비해 보다 더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종래에는 일반적으로 군반씨족제설에 의해 고려 전기의 군사조직과 군역제도가 설명되었다. 그리하여 2군 6위의 중앙군은 곧 京軍으로 인식되었고, 州縣軍은 경기 및 남도지방의 보승군과 정용군을 주축으로 한 별도의 지방군 조직인 것으로 해석되어 왔었다. 그러나 경·외군 혼성제설에 따르면, 중앙군이 居京 군인 곧 경군만으로 편성되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군은 중앙군의 적은 일부였으며 나머지 대다수는 경기 및 남도지방의 농민군 곧 보승군과 정용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경·외군 혼성제설을 인정하는 한, ‘경군’을 2군 6위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바꾸어 말하면, 2군 6위의 군사조직을 경군조직이라고 지칭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또한 ‘주현군’도 하나의 지방군 조직으로서 이해될 수가 없다. 경기 및 남도의 보승·정용군이 중앙군 조직에 편제되어 있었다면 그들을 기간병력으로 하는 별도의 지방군 조직은 성립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高麗史≫병지의 편찬자들도 「주현군」을 반드시 지방군 조직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高麗史≫병지의 한 항목으로 명명한 주현군이란 기본적으로 ‘州와 縣에 산재해 있던 군인들’이라는 뜻이었다. 그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高麗의 兵制는 모두 唐의 府衛制度를 모방한 것이었다. 따라서 州와 縣에 산재해 있던 군인들도 생각컨대 또한 모두 六衛에 속하였을 것이요. 6위 밖에 따로 州縣軍이라는 것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참고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일단 ‘州縣軍’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였다(≪高麗史≫권 83, 志 38, 兵 3, 州縣軍).

 일찍이 군반씨족제설에서 비판된 바와 같이, 고려의 병제가 모두 당의 부병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는≪高麗史≫편찬자들의 歷史像은 사실과 크게 다른 것이었다.0738)李基白, 앞의 책, 4∼15쪽. 또한 국경지대인 양계지방의 州·鎭에 산재한 군사들은 6위 밖에 별도의 지방군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이른바 州鎭軍이 그것이었다. 때문에 앞서 인용된≪高麗史≫병지 편찬자의 의견 전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경기 및 남도의 州·縣에 별도의 지방군 조직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는 부분 만큼은 음미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고려 전기의 남도지방은 양계지방과 달리 독자적인 지방군 조직을 갖추고 있어야 할 군사적 이유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현에 산재한 보승군과 정용군은 중앙군 소속의 군인들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 전기 중앙군이 경군과 외군으로 편성되어 있었다는 가설 하에서는 ‘경군’과 ‘주현군’에 대한 해석이 종래의 그것들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지방군 조직으로서의 주현군에 대한 부정은 고려 전기 군사조직에 대한 전반적 구도를 크게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현군이 주진군과 같은 의미의 지방군 조직이었다는 통설은 몇가지 구체적 수준의 연구결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중앙군의 인적 구성이 2중적이었다는 사실만 가지고서는 그러한 통설을 부인하기가 불충분하다. 즉 경·외군 혼성제설의 관점에서 주현군 자체를 구체적으로 다시 검토하고 해석하는 일이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경·외군 혼성제설은 하나의 새로운 결론을 제시하는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는 가설이다.

<鄭景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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