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Ⅲ. 군사조직
  • 2. 주현군과 주진군
  • 1) 주현군과 농민
  • (1) 주현군의 성립

가. 광군

가) 광군의 성격

 0739)≪高麗史≫권 83, 志 37, 兵 3, 州縣軍條를 보면 高麗의 지방군 모두를 州縣軍이라고 칭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지방군이었다고 하더라도 5道에 배치되었던 지방군과 兩界의 그것은 구별되는 존재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항목인<州鎭軍과 國防體制>에서 자세히 언급하게 될 것이지만 주현군이란 5도에 배치되어 있었던 지방군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다.定宗 2년(947)에 契丹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光軍이 조직되었음은 다 아는 바와 같다. 하지만 광군의 조직이나 성격, 그 활동상 등에 관한 기록은 별로 없다. 광군이 만들어질 당시 병력이 30만 명이었다는 것, 그 통수부는 光軍司였으며 光軍都監으로 바뀌었다가 顯宗 2년(1011) 다시 광군사로 되었다는 것, 현종 초 慶北 醴泉에 있는 開心寺의 석탑을 쌓는 데에 광군이 동원되었던 사실 따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단편적인 사실들에 기초하여 광군에 대하여 검토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0740)李基白,<高麗 光軍考>(≪歷史學報≫27, 1965;≪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는 州縣軍의 한 기원으로서 光軍에 주목한 본격적인 연구이다. 이하 광군에 대한 서술은 이에 의거하게 될 것이다.

 우선 광군은 중앙군이 아닌 지방군이었다. 가령 예천에 있는 개심사 석탑을 쌓는 일에 중앙군이 동원되었을 까닭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처럼 광군이 지방군이었다면 그것을 농민으로 구성된 농민군이었다고 보아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무려 30만 명에 달했다는 광군이 항상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상비군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거란의 침입이라는 일시적인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만들어지고, 그 위급한 사태가 사라지자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은 현종 초에 광군이 개심사의 석탑 조성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군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동원될 수 있도록 계획되어 있는 상설적인 군사조직으로서 일종의 농민예비군과도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고 일단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광군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하여서는 그 임무와 지휘권의 소재, 그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 등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광군이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되었던 것인만큼 유사시 광군이 전선에 투입되었을 것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비록 광군이 전투에 동원되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현종 원년(1010) 거란의 2차 침입 때 康兆가 30만 군을 이끌고 출동하였다고 하므로 그의 휘하에는 광군이 속해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런데 광군이 농민들로 구성된 예비군이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광군이 전투에 동원되는 것은 대규모로 군사를 일으켜야 할 필요가 있는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는 것이 아니었나 한다. 다시 말하자면 광군은 전투보다는 노역을 담당하는 부대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한 것이다. 광군이 개심사 석탑을 쌓는 일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겠거니와, 더욱 추측을 가한다면 광군이 조직되었던 정종 2년부터 활발히 진행되었던 변경 지역에서의 축성에 광군이 동원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

 이처럼 노역을 주 임무로 하였던 光軍의 조직은 어떠하였으며, 그 지휘권은 누가 장악하였던 것일까.<開心寺 石塔記>에 따르면 그 조성 공사에 수레 18량, 우 1,000필과 함께 광군 46隊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광군이 대를 단위로 하여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군의 1대가 25명으로 편성되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광군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開心寺 石塔記>에 나오는 隊正 邦祐는 아마도 광군의 대를 지휘하였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방우를 포함하여 개심사 석탑을 세우는 데 있어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던 인물들은 예천 지방의 鄕吏들이었다. 이 사실은 석탑 건립에 동원된 광군이 향리의 지휘 아래에 놓여 있었음을 알려 주는 것에 다름아닐 것이다.

 고려 초에는 본격적인 의미의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하였다. 成宗 2년(983)에 겨우 12곳에 지방관을 둘 수 있었으며, 비교적 넓은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할 수 있었던 것은 성종 14년에야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는 성종대 이전에 중앙정부가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온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즉 지방의 통치는 그 지방의 豪族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정부가 농민들을 군역에 동원하기가 불가능하였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광군이 중앙정부의 징병에 의해 조직된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말해 당시 지방의 통치를 사실 상 맡고 있었던 호족세력에 의하여 조직된 것이 바로 광군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군의 부대 지휘권을 장악하였던 것도 지방의 호족들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후에는 그들의 후신인 향리들이 그 지휘권을 이어 갖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이처럼 광군의 부대 지휘권을 호족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광군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가령 광군의 설치와 함께 두어졌던 광군사는, 비록 그 임무에 대하여 전하는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전국의 광군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된 중앙의 관부였을 것이다.

 광군사가 유사시 광군을 전투에 동원하는 임무를 맡는 기관이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별 이론이 없을 줄 안다. 그런데 광군이 전투부대였다기 보다는 노역부대였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광군사의 기능이 비단 그에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王規의 난을 진압하면서 집권하였던 정종이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던 사실이 주목된다. 정종이 西京으로의 천도를 추진하였던 것은 그 노력의 일환이었거니와, 그렇다면 광군의 설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정종이 광군의 조직을 구상하였던 것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함이기도 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농민의 역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지배를 목표로 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담당할 관부가 바로 광군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종 이전에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와 같은 정종의 계획은 그대로 실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우선 지방의 호족들이 그에 반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호족들과 연결을 가지는 중앙의 貴族들도 역시 그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뿐만 아니라 그리 된다면 호족은 물론 중앙정부로부터도 노역을 부담했어야 할 농민들이 그에 반발하였으리라는 점도 쉽게 상상이 될 것이다. 결국 농민의 역역을 직접 장악하려는 중앙정부의 의도는 그대로 관철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호족들에게 광군에 대한 지휘권을 맡기는 간접적인 지배가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컨대 광군은 중앙정부와 지방의 호족에 의한 농민 역역의 공동지배 속에 이루어진 군사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나) 광군과 품군

 그렇다면 이러한 성격의 광군이 어떻게 州縣軍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일까. 광군사의 명칭이 광군도감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광군사로 환원되었다는 사실에서 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光軍司가 光軍都監으로 개칭된 시기는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현종 2년(1011) 이전일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광군이 지방의 군사조직이었다는 점에서 그 시기가 현종 2년 이전 지방의 통치조직이 정비되었 던 어느 때였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성종 14년(995)의 지방제도 개편이 크게 부각된다. 12軍(12節度使)의 설치는 군사적으로 호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0741)千寬宇,<閑人考-高麗 初期 地方統制에 관한 一考察->(≪社會科學≫2, 1958;≪近世朝鮮史硏究≫, 一潮閣, 1979, 24∼25쪽). 이 점을 고려하면 당시 성종이 호족의 지휘 아래에 놓여 있었던 광군을 중앙정부의 지배 하에 두려는 조치를 계획하지는 않았을까 헤아려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광군사에서 광군도감으로의 명칭 변경도 이러한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성종이 꾀하였을 구체적인 조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잘 알 길은 없지만 성종대에 折衝府의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 穆宗 원년(998) 전시과에 折衝都尉와 果毅 등의 관직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 등에 주목할 수도 있다. 절충부는 府兵制를 실시하였던 唐의 지방 軍府였으며, 그 장관과 차관이 절충도위와 果毅都尉였다. 이 사실은 성종이 당의 부병제를 모방하여 군사제도를 개혁하려는 뜻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성종 14년(995)에 중앙군의 핵심인 6衛가 조직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0742)李基白,<高麗 二軍 六衛의 形成過程에 대한 再考>(≪黃義敦先生古稀記念 史學論叢≫, 1960;앞의 책, 1968, 77∼79쪽). 이러한 점들을 아울러 염두에 두면 성종이 광군을 당의 절충부와 같은 것으로 개편하려고 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광군도감은 광군을 개편하여 6위 소속의 절충부로 만드는 일을 관장하고 처리하기 위한 관부였을지도 모르겠다.0743)하지만 이와 다른 견해도 있다. 일반 농민들이 光軍에 소속되었다면, 같은 농민이었지만 豪族 휘하의 私兵으로 있던 자들은 6衛에 속하게 되었고, 그것을 담당하였던 기관이 折衝府였다는 것이다(洪元基,<高麗 二軍·六衛制의 性格>(≪韓國史硏究≫68, 1990, 58∼60쪽).

 그러나 광군을 중앙정부의 지배 하에 두려던 성종의 시도-그것이 당의 부병제에 입각한 것이었든지 그렇지 않았든지 간에-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듯 하다.<開心寺 石塔記>에 보이듯이 현종 초에도 광군이 존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豪族(鄕吏)의 지휘 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성종 14년(995)의 지방제도가 목종 8년에 크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든지, 현종 2년 광군도감이 광군사로 복구되었다는 사실도 이를 시사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광군이 주현군으로 변모하는 것은 언제였으며, 주현군 중 어느 부대와 연결되는 것이었을까. 주현군은 保勝軍·精勇軍·一品軍과 村留하는 2·3品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향리들이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노동부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1품군이었다. 그러므로 광군이 주현군 중의 1품군으로 개편되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단≪高麗史≫권 83, 兵志, 州縣軍條에 의하면 1품군은 총 19,882명에 불과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광군 30만 명에 크게 못미치는 수이다. 아마 1품군에 속하지 않았던 나머지는 2·3품군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光軍이 적어도 현종 2년까지 존재하였음은 이해에 광군도감이 광군사로 복구되었음이나 역시 이 해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開心寺 石塔記>에 광군이 등장하고 있음에서 알 수가 있다. 한편 1품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현종 22년(1031)에 세워진 淨兜寺 5층 석탑의 造成形止記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광군이 주현군으로 개편된 것은 현종 3년에서 현종 22년에 이르는 사이의 어느 시기였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현종 3년 12군을 폐지하고 75道 按撫使를 두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지방제도의 개편이 시작되어 현종 9년에 지방제도의 골격이 갖추어졌다. 이러한 지방제도의 정비와 동시에 광군이 주현군으로 개편 정비되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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