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Ⅲ. 군사조직
  • 2. 주현군과 주진군
  • 1) 주현군과 농민
  • (2) 주현군의 성격

가. 병종과 배치

軍 事 道 保 勝 精 勇 一 品


春 州 道
東 州 道
交 州 道
133
-
-
776
971
477
572
650
305
[1,481]
[1,621]
[782]
[133] [2,224] [1,527] [3,884]






廣 州 道
南 京 道
安 南 道
仁 州 道
忠 州 牧 道
原 州 道
淸 州 牧 道
公 州 道
洪 州 道
嘉 林 道
258
133
159
194
175
241
122
538
326
338
98
546
864
292
187
291
357
203
708
553
497
251
536
529
282
227
372
520
248
850
527
713
201
[1,340]
[1,526]
[733]
[608]
[838]
[1,118]
[573]
[2,096]
[1,406]
[1,548]
[550]
[2,582] [4,749] [5,005] [12,336]






蔚 州 道
梁 州 道
金 州 道
密 城 道
尙 州 牧 道
安 東 大 都 護 道
京 山 府 道
晋 州 牧 道
陜 州 道
巨 濟 道
固 城 道
南 海 道
134
57
188
245
665
591
54
277
373
-
26
(行首幷)17
145
147
278
427
1,307
953
801
404
229
50
53
17
181
173
431
532
1,241
1,018
647
730
448
128
109
64
[460]
[377]
[897]
[1,204]
[3,213]
[2,562]
[1,502]
[1,411]
[1,050]
[178]
[188]
[98]
[2,627] [4,811] [5,702] [13,140]






全 州 牧 道
南 原 道
古 阜 道
臨 陂 道
進 禮 道
羅 州 牧 道
靈 光 道
寶 城 道
昇 平 道
150
205
54
-
-
454
-
322
240
1,214
800
610
341
211
848
401
412
184
867
636
545
200
152
922
368
513
415
[2,231]
[1,641]
[1,209]
[541]
[363]
[2,224]
[769]
[1,247]
[839]
[1,425] [5,021] [4,618] [11,064]
西



黃 州 道
谷 州 道
安 西 大 都 護 道
豊 州 道
甕 津 道
214
295
450
333
107
320
293
874
455
210
277
291
838
235
612
[811]
[879]
[2,162]
[1,023]
[929]
[1,399] [2,152] [2,253] [5,804]


開 城 府 道
承 天 府 道
江 華 道
長 湍 道
52
50
199
134
240
160
54
343
190
113
171
303
[482]
[323]
[424]
[780]
[435] [797] [777] [2,009]
총 계 [8,601] [19,754] [19,882] [48,237]

<표 2>

 ≪高麗史≫兵志 州縣軍條는 구성원의 兵種에 따른 배치상황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정리한 것이 위의 일람표이다.0752)李基白,<高麗 州縣軍考>(≪歷史學報≫29, 1965;≪高麗兵制史硏究≫, 1968, 204∼205쪽)에서 옮김. [ ]의 합계는 李基白의 계산임.

 <표 2>에 따르면 주현군은 보승군과 정용군 그리고 1품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표 2>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들 외에도 주현군에 넣어야 할 것으로 2·3품군이 있다. 1품군이 주현군에 속하였다면 당연히 이들도 주현군으로 취급하여야 할 것이다.

 우선 기록에 「村留」라고 하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2품군과 3품군은 村을 단위로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2·3품군이 兵志 州縣軍 기록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중앙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생각되며, 그렇다면 2·3품군은 주·부·군·현의 治所에는 배치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屬縣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뒤에 언급되지만 속현에는 보승군 등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한편 보승군·정용군·1품군이 촌에까지 그 부대조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표 2>를 보면 보승군 등은 5도 및 경기 내의 보다 세분된 도를 단위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 도는 주현군의 배치를 위하여 구획된 軍事道라고 해야 할 것이다.0753)末松保和는 이를 五道의 道와 구분하여 「下部道」라고 하였다(<高麗四十二都府考略>,≪朝鮮學報≫14, 1959, 580쪽). 이 군사도는, 기록의 누락이라고 여겨지거나 혹은 예외에 해당된다고 생각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留守官·都護府使·牧使·知事·防禦使·縣令 등이 파견된 京·州·府·郡·縣 등과 일치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일단 보승군 등은 지방관이 파견되는 행정구역을 단위로 배치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보승군 등이 경·주·부·군·현의 치소에만 배치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표 2>에 보이는 병력의 수가 각 군사도 내 병력의 한계라는 점에서 보승군 등이 속현에도 배치되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었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京에서 村에 이르는 모든 수준의 지방행정단위에 주현군이 배치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주현군이 지방의 양인·농민·장정으로서 이 조직망에서 빠질 수 있는 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전국적인 군사조직이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주현군이 지방관이 파견되는 행정구획을 단위로 파악되었다는 것은 중앙정부의 주현군에 대한 파악과 통제가 직접적인 것이었음을 말한다고 하겠다. 단 그 일부인 2품군과 3품군이 중앙에서 파악하고 있는 통계 속에서 빠져 있다는 점은 같은 주현군이라도 중앙으로부터 받는 통제의 정도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려 준다.0754)州縣軍의 兵種과 配置에 대한 이상의 서술은 李基白, 앞의 책, 203∼208쪽에 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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