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Ⅲ. 군사조직
  • 2. 주현군과 주진군
  • 2) 주진군과 국방체제
  • (2) 주진군의 조직과 지휘계통

(2) 주진군의 조직과 지휘계통

 朝鮮 文宗 즉위년(1450) 藝文館 提學 李先齊가 올린 상서문에 양계 주진의 군사조직이 기재되어 있었던 고려의 「式目形止案」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0804)≪文宗實錄≫권 4, 문종 즉위년 10월 기묘. 이선제는 「식목형지안」으로부터 龜州·寧州(安北府)·猛州·麟州 등 4城에 배치된 주진군의 조직(<표 4>)과 西北界 41성 주진군의 상황을 뽑아 제시하였다(<표 5>).0805)末松保和,<高麗式目形止案について>(≪朝鮮學報≫25, 1962), 129∼130쪽에서 옮김.

  軍額
 單位
都領 中郞將 郎將 別將 校尉 隊正 抄軍 左軍 右軍 保昌 合(行)軍 白 丁 軍
計人
龜州城 (中郞將) 1 2 6 14 28 57 24 20 5 8 1,637 125 3,294
寧州城
(安北府)
(中郞將) 1 假中郞將 1 6 攝郞將 3 13 26 53 16 26 4 7 1,523 141 3,666
猛州城 (郞將) 1   1 5 11 22 8 8
(弩1)
2
(馬1)
4 630 89 2,072
麟州城 (中郞將) 1 2 7 18 39 79 34
(馬6)
34 4 7 2,230 36 821

<표 4>

① 諸城, 共 41
② 合 計
  a, 抄猛將相將校軍士 幷 14,491  計, 隊(馬軍 97幷) 538 行軍 13,460
  b, 左猛將相將校軍士 幷 13,475  計, 隊(馬軍 71隊,. 弩軍 48隊幷) 503 行軍 12,570
  c, 右猛將相將校軍士 幷 4,979  計, 隊(馬軍 16幷) 107 行軍 4,803
  d, 保昌將相將校軍士 幷 7,451  計, 隊 268 行軍 7,168
  以上, 抄猛將相將校軍士 幷 40,396
③ 雜 尺
  所 丁 1,268
  津 江 丁 624
  部 曲 丁 382
  驛 丁 1,585
④ 白 丁 軍 70,960人         計, 隊 2,895

<표 5>

 ≪高麗史≫범례에 따르면 志 편찬에 있어 기본사료가 되었던 것은≪古今詳定禮≫·≪式目編修錄≫과 諸家의 잡록 등이었다고 한다. 「式目形止案」은≪식목편수록≫과 상당한 관련이 있는 문서로 보인다. 양자의 명칭을 보거나 이선제가≪고려사≫및≪高麗史節要≫의 편찬 위원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그리고 이선제에 따르면 그가 제시한 북계 주진군에 관한 자료는 고려 전성기 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선제의 상서문에 인용된 주진군의 조직은 그에 대한 일차 사료라고 하여 좋을 만큼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0806)「式目形止案」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는 末松保和, 위의 글, 123∼126쪽이 참고된다.

 하지만 이선세가 「式目形止案」으로부터 인용하여 제시한 자료만으로 양계 주진군 조직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 내기 어려움은 물론이다. 따라서 그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그와 아울러≪高麗史≫兵志 州縣軍條의 주진군 관계 기록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北界와 東界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 다음의<표 6>과<표 7>이다.0807)李基白, 앞의 책, 246∼247·250∼251쪽에 실린<표>를 옮김.
<표>의 밑줄은 李基白의 계산이며,<>는 李基白이 수정한 것이다. 수정한 수로 계산하면<표>에 나타난 州鎭軍은 약 125,372명이 된다. 東界에는 神騎·步班·白丁隊가 보이지 않지만 그것들의 존재를 가정하고, 이를 北界에서와 비슷한 비율로 따지면 약 17,000명 정도가 된다. 이러한 계산에 의하면 주진군의 총병력은 대략 142,372명 정도로 볼 수 있거니와,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李基白, 앞의 책, 248∼249·252∼253쪽 참조.

 <표 4>의 주진군에 대한 기록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편의상 ㉮·㉯·㉰로 표시하였다. ㉮는 주진군의 지휘계통과 그들의 인원수에 관한 것이다. ㉯에는 각 주진에 소속된 여러 부대와 그 병력의 수가, ㉰에는 白丁軍와 부대 수와 그 병력 수가 적혀 있다. 이러한 기재 방식은<표 6>·<표 7>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다른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표 6>·<표 7>의 ㉮·㉯·㉰는 대체로<표 4>의 그것들과 대응하는 것이다.

 우선 ㉮를 보면 주진군의 지휘계통은 대략 都領(中郎將)-中郞將-郞將-別將-校尉-隊正으로 정리할 수 있다.<표 6>·<표 7>에는 都領이 없는 주진이 적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표 4>에 비추어 볼 때 이는 기록의 누락이라고 여겨진다. 단 북계의 朝陽鎭 등의 예에서 보듯이 도령이 임명되지 않은 경우 鎭將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던 듯하다. 도령에는 중랑장 중 1명이 임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중랑장이 없을 경우에는 낭장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도령 이하 이들 지휘관들을 통틀어 將相將校라고 불렀음은<표 5>의 ②에서 알 수 있다.

 ㉯에 나오는 부대로는 抄軍·左軍·右軍·保昌·精勇·寧塞과 西京의 海軍이 있다. 이 중 정용군은<표 6>에만 보이는데, 이는 초군과 같은 부대로 보인다.<표 4>에는<표 6>의 정용군(麟州·猛州)과 초군(安北府·龜州)이 모두 초군으로 표시되어 있고,<표 6>에서 정용군이 있으면 초군이 없고, 초군이 있으면 정용군이 없어 양자가 서로 보완하는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러하다. 초군·좌군·우군이 각각 抄猛·左猛·右猛으로도 불리웠음은<표 5>의 ②를 통해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북계에는 영색군이 없는 대신 보창군이 있고, 반면 동계에는 보창군이 없는 대신 영색군이 있다. 양자가 어떤 차이를 갖는 부대였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상호대응하는 부대라는 점에서 대략 같은 성질의 것으로 취급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서경의 해군은 국왕 행차시 大同江 등에서의 시위를 담당하는 특수부대였을 것이다.

 그런데 抄軍·左軍·右軍과 保昌軍·寧塞은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우선 전자에는 馬隊와 弩隊가 포함되어 있다. 더구나 좌군과 우군에 비추어서 초군을 中軍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이들은 전투시의 부대 배치의 하나인 이른바 3군를 연상시키는 명칭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이들이 바로 주진군의 정예부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보창군·영색군에는 마대나 노대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서경의 보창군은 保昌雜軍이라고 기록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초군 등에 비해 그 격이 떨어지는 부대였다고 추측된다.

 이들 초군·좌군·우군·보창군·영색군 등은 ㉮에 나오는 장상장교의 지휘를 받는 부대였다.<표 5>의 ②에 보이듯이 초맹·좌맹·우맹·보창의 장사장교와 군사를 합하여 그 인원이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표 4>에는 行軍 혹은 행군을 합한 인원수가,<표 5>·<표 6>·<표 7>에는 행군의 수가 기재되어 있는데, 행군은 이들 여러 부대에 소속된 병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초군 등 여러 부대의 편성을 다음과 같이 예상할 수 있다. 그 최소 단위는 25명의 행군으로 구성되는 隊0808)末松保和, 앞의 글, 130∼131쪽.였으며, 그 지휘관은 隊正이었다. 그런데 隊正과 校尉, 校尉의 別將, 別將과 郎將의 인원 비율은 대개 2:1로 계산할 수 있다. 그러므로 隊 위에 50명, 100명, 200명 단위의 부대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며, 그 지휘관은 각각 교위, 별장, 낭장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郎將과 中郎將은 약 4:1의 비율로 볼 수 있으므로 中郞將은 800명 단위의 부대를 지휘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는 白丁軍(<표 4>)과 神騎·步班·白丁 및 元定兩班·軍·閑人·雜類로 구성된 부대(<표 6>), 工匠·田匠·投化·鉎川軍·沙工 등의 부대(<표 7>)에 관한 기록이다. 그런데 이들을 비교해 보면 서로 간의 출입이 심하다. 북계에는 백정대가 기록되어 있지만 동계에는 보이지 않고 있다. 반면 동계의 공장 등의 여러 부대는 북계에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일부 부대의 경우 실제 그러하였을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기록의 누락 탓이라고 보아야 할 듯 하다.<표 5>의 ③에 나오는 북계의 雜尺은 동계의 공장 등 여러 부대의 구성원에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지거니와, 이들이<표 6>에 기록되어 있지 않음에서 그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白丁隊는 북계만 하더라도 그 수가 2,440대 61,000명(<표 6>) 내지 2,895대 70,960명(<표 5>)에 달하였다. 이렇게 보면 백정대는 필시 동계에도 있었을 것이며 그 수 역시 상당하였으리라고 추측된다. 농민들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백정대는 아마도 州鎭屯田軍으로서 둔전의 경작에 동원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0809)李基白, 앞의 책, 266쪽 및 文喆永, 앞의 글, 1991, 80∼81쪽. 趙仁成은<표 5>의 ③에 보이는 部曲丁 등을 州鎭屯田軍이라고 보았으나(<高麗 兩界의 國防體制>,≪高麗軍制史≫, 陸軍本部, 1983, 163∼164쪽) 그 수가 너무 적은 듯하다. 한편 주진둔전군을 군사체제와 무관한 것으로 보아 州鎭의 주민들 중 屯田 경작에 종사하는 자들을 일컫는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安秉佑,<高麗의 屯田에 관한 一考察>,≪韓國史論≫10, 1984, 52∼54쪽).

 神騎·步班은 그 명칭으로 보아 別武班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에 해당하는 것이 서경의 원정양반·군·한인·잡류로 구성된 부대(<표 6>)였을 것으로 짐작되므로, 신기와 보반은 다양한 신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말을 소유하여야 했을 신기에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양반들이 주로 소속되었을 법하다. 보반에는 백정을 제외한 여러 층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표 2>의 雜尺이나<표 4>의 工匠 등의 여러 부대들은 특수 임무와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所丁이나 공장대는 군수 물자를 조달하는 수공업과 관련이 보이고, 津江丁과 驛丁은 군사적 통신과 교통에, 部曲丁과 田匠은 屯田의 경작과 연결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0810)趙仁成, 위의 글, 154쪽.

 <표 7>의 沙工隊는 해군으로서 元興鎭에 설치되어 있었던 都部署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鎭溟縣에도 도부서가 있었고, 북계에는 通州都部署와 鴨江都部署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거기에도 사공대가 있었을 법하다.0811)兩界의 都部署에 대해서는 金南奎,<高麗都部署考>(≪史叢≫11, 1966;≪高麗兩界地方史硏究≫, 새문社, 1989), 49∼61쪽이 참고된다. 鉎川軍은 어떤 부대였는가 알 수 없다.

 그런데 ㉯에 나오는 부대들과 ㉰의 그것들은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초군·좌군·우군·보창군·영색군은 양계 주진의 핵심부대로 상비군이었다고 생각된다. 주진군의 장상장교가 모두 이들 부대의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러하다.<표 4>·<표 6>·<표 7>에서 보듯이 이들 부대에 관해 중복됨을 무릅쓰고 상세하게 표시하고 있는 점도 이를 알려 주고 있다. 반면 그 지휘계통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지 않은 ㉰의 여러 부대들은 주진군의 예비 부대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헤아려지며, 이들은 유사시 전투에 동원되는 것이 원칙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표 6>과<표 7>에 나타난 주진군의 배치 상황을≪高麗史≫地理志와 비교해 보면 주진군이 지방관이 파견되어 있는 행정구획을 단위로 기록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주진군이 5도의 주현군과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지휘통제를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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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6>
<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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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7>
<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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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중앙정부의 지휘통제는 지방관을 통해 실현되었다. 도령 이하 장상 장교는 상비군을 직접 지휘하였지만 상비군은 물론 백정대를 중심으로 하는 예비군의 총괄지휘는 일단 주진의 장관이었던 防禦使와 鎭將에게 맡겨져 있었다. 방어사와 진장은 지방관으로서 민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진군의 지휘권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주현군의 지휘를 지방관이 맡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이는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지방관들은 다시 양계에서 군사적으로 전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던 兵馬使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0812)이상 州鎭軍의 조직과 지휘계통에 대한 서술은 주로 李基白, 앞의 책, 244∼259쪽에 의거하였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 지취 통솔의 예를 보기로 하자.

 高宗 18년(1231) 9월 西北面 兵馬使 朴犀는 撤禮塔이 이끄는 蒙古軍이 龜州에 이르자 朔州分道將軍 金仲溫, 靜州分道將軍 金慶孫, 靜州·朔州·渭州·泰州의 守令 등으로 하여금 각기 병력을 이끌고 귀주에 모이도록 하였다. 그 리고 김중온과 김경손 휘하의 병력으로 하여금 각기 귀주성의 동서쪽과 남쪽을 지키도록 하는 한편 都護別抄와 위주·태주의 별초 250여 인은 3면을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0813)≪高麗史≫권 103, 列傳 16, 朴犀.
≪高麗史節要≫권 19, 高宗 18년 9월.

 分道官은 본래 문신이 맡는 것이었지만 무신란 이후에는 防戍軍의 장군이 이를 겸직하게 되었다. 分道將軍이었던 김중온과 김경손은 방수장군이 분도관을 겸임하고 있었던 예이다.0814)分道官에 대해서는 邊太燮,<高麗兩界의 支配組織>(≪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221∼224쪽을 보라. 그러므로 이들이 이끌고 왔던 것은 방수군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정주 등의 지방관이 이끌고 왔던 것은 주진군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都護別抄를 비롯한 별초들은 해당 주진군 중에서 가려 뽑은 병력이었을 것인데, 이들의 지휘는 각 주진의 수령들이 맡았을 것으로 보아 좋을 듯하다. 단, 삭주와 정주 별초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주진군이 분도장군 휘하에 편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서 주진군이 지방관의 지휘를 받았다는 구체적인 예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병마사가 주진군의 최고 사령관이었으며 양계 주진에 파견된 방수군의 지휘권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0815)趙仁成, 앞의 글, 158∼161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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