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Ⅲ. 군사조직
  • 2. 주현군과 주진군
  • 2) 주진군과 국방체제
  • (3) 주진군의 임무

(3) 주진군의 임무

 州鎭軍은 내란의 진압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가령 妙淸의 난이 일어나자 주진군이 그 토벌작전에 동원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국방이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고려는 대륙의 契丹·女眞·蒙古 등의 이민족과 늘 대립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유사시 주진군은 방수군과 더불어 가장 먼 저 전투에 임하였다. 주진군은 상비군이거나 예비군이거나를 막론하고 전투에 동원되었으며, 향리 등 주진군에 속하지 않았던 주민들도 무장을 하고 주진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高麗史≫등에서는 이들이 북방으로부터의 이민족의 침입에 대항하여 얼마나 용감히 싸웠는가를 전하는 적지 않은 사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가 이민족과의 항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공로의 일부는 주진군에 돌려져야 한다고 믿거니와, 여기에서는 주진군의 활약상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되는 사례 하나를 소개하는 것에 그치고자 한다.

 고종 18년 9월 병마사 박서의 명에 따라 정주 등의 주진군이 방수군과 함께 귀주에 집결하여 몽고의 침입에 대한 방어의 태세를 갖추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살펴 본 바 있다. 이에 대해 몽고군은 한 달 동안 갖가지 방법과 공성 무기를 동원하여 귀주성을 함락시키려고 하였으나 박서의 지휘 하에 귀주 수비군은 성을 굳게 지켜냈다. 그 후에도 몽고군의 귀주 공략은 계속되었다. 같은 해 10월·11월·12월에도 몽고군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써도 귀주성을 빼앗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수비는 적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정도여서, 몽고의 한 노장수는 귀주성의 성루와 수성 무기 등을 둘러보고는 이와 같이 심하게 공격을 당차고도 항복하지 않았던 예를 일찍이 본적이 없다고 평하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와 몽고의 강화가 이루어지는 통에 고종 19년 정월 박서가 이끄는 귀주 수비군도 어쩔 수 없이 몽고군에게 항복하게 되었지만,0816)보다 자세한 상황은≪高麗史≫권 103, 烈傳 16, 朴犀 및≪高麗史節要≫권 19, 高宗 18년 9월·10월·11월·12월 및 19년 정월 참조. 귀주성 방어에 주진군의 역할이 컸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바일 것이다.

 위의 귀주성 방어 건투에서 잘 드러나 있듯이 주진군의 전술은 주진을 둘러싼 성에 의지하여 굳게 지키는 이른바 堅壁固守를 기본으로 하였다. 견벽고수란 많은 적을 상대로 지구전을 폄으로써 적의 예봉을 피하는 한편 군량 수송이나 병력 보충 등의 어려움으로 적이 악화되기를 기다리는 전술이라 할 수 있다.0817)堅壁固守는 三國時代 이래의 전술이다. 唐 太宗의 침입을 받은 高句麗軍이 安市城을 끝까지 지켜 당의 침입을 저지시킨 것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李基白,<高麗의 北進政策과 鎭城>,≪軍史≫1, 1980, 55∼56쪽).

 견벽고수의 전술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틈을 보아 성의 병력을 이끌고 나가 적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를 引兵出擊의 전술이라고 불러 좋을 것인데, 견벽고수하여 지킨 주진을 근거지로 하여 적의 배후를 교란, 습격하거나 퇴각하는 적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0818)이상 州鎭軍의 임무와 활약상 그리고 전술에 대한 서술은 李基白, 앞의 책, 259∼261쪽에 의함.

 이 밖에도 이른바 淸野戰術이 병행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백성과 재물을 모두 성 안이나 섬으로 옳기는 한편 그 나머지는 전부 불살라 적이 거처할 집과 먹을 양식을 없애는 전술이었다.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이 여의치 않았을 적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이 전술도 앞서의 인병출격과 더불어 견벽고수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0819)趙仁成, 앞의 글, 209∼210쪽. 한편 堅壁固守와 마찬가지로 引兵出擊과 淸野의 전술도 이미 三國時代부터 사용되었다. 漢의 대군이 침략하자 高句麗軍은 이 세가지 전술을 병행하여 그를 궤멸시킨 예가 있다. 보다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는≪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新大王 8년 11월 참조.

 이러한 전술로 말미암아 외적들은 수많은 성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깊숙이 침입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비록 침공해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장기간 체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컨대 거란군이 개경을 함락시키고도, 이렇다 할 호위병도 없이 羅州까지 피난했던 顯宗을 추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교적 성과도 별로 없이 곧 후퇴하였던 것은 바로 견벽고수의 전술이 극히 효과적인 것이었음을 잘 말하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0820)李基白, 앞의 책, 260쪽.

 堅壁固守의 전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적의 공격에 견딜 수 있는 성곽이 중요하였다. 양계 주진의 성은 삼국시대의 그것처럼 산성은 아니었다. 비록 그 주위에 산성이 있기는 하였지만, 주진성 자체는 조선시대의 邑城과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평지와 낮은 산을 함께 연결하여 쌓은 성이었던 것이다. 이는 영토 확장에 따른 거주와 방어라는 두가지 목적에 의해 주진성의 형태가 결정되었던 것임을 의미한다.0821)李基白, 앞의 글(1980), 53∼54쪽.

 주진의 성에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망루를 비롯하여 적의 공격을 견디 어 낼 수 있는 각종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임은 이를 나위가 없다. 성을 지키기 위한 무기도 준비되어 있었다. 가령 박서는 몽고군의 공격으로부터 귀주성을 방어하면서 砲車와 大于浦·鐵絙 등을 동원하였다. 포차는 수레에 石砲를 실은 것으로서 성을 공격하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주진군은 이를 수성 무기로 사용하는 예가 많았을 것이다. 대우포는 공성용 사다리인 雲梯를 막기 위하여 사용되었고, 鐵絙은 일종의 장애물로 설치되었으므로 이들이 수성용 무기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이지만 그 형태는 잘 알 수 없다.0822)州鎭의 성과 수성무기에 대해서는 소략하지만 趙仁成, 앞의 글, 171∼175쪽 참고.

 아울러 견벽 고수의 전술이 지구전을 꾀하는 것이었으므로, 상당량의 군수를 비축하지 않고서는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군량의 확보를 위해 屯田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양계에서 거두어 들인 조세는 군수에 충당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뿐만 아니라 군량을 비롯 각종 군수가 漕運을 통해 수송되기도 하였다.0823)邊太燮, 앞의 글, 220∼221쪽.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로는 趙仁成, 위의 글, 162∼167쪽 및 安秉佑, 앞의 글, 10∼18쪽을 참조, 특히 屯田에 대해서는 安秉佑의 글 참고.

 적군의 본격적인 침입에 대한 방어 외에도 주진군은 戍를 중심으로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표 6>을 보면 북계에는 수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高麗史≫兵志 城堡條 등을 보면 대략 長城이 지나가는 국경지대에 수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표 7>에 의하면 동계에 세 戍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安邊 부근의 동해안에 돌출하고 있는 해상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다. 한편<표 7>에는 나오지 않지만 동해안에는 몇 개의 수가 더 설치되어 있었다.

 戍는 규모가 작은 성책으로서 그 주둔군도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점에서 戍는 접적지역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 있었던 주진군의 전방초소와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 주둔군은 적군의 동태를 탐지하여 그 정보를 본진에 통보한다거나 적의 소규모 침입을 격퇴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특히 동계의 수는 주로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들어 졌다고 보인다.0824)李基白, 앞의 책, 261∼263쪽.
江原正昭, 앞의 글,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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