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Ⅲ. 군사조직
  • 3. 고려 전기 군제의 붕괴-경군을 중심으로-
  • 2) 별무반의 설치와 그 의의

2) 별무반의 설치와 그 의의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別武班은 여진 정벌을 위하여 설치된 군사 조직이었다. 肅宗 9년(1104) 정월 東女眞의 기병이 定州 關外에 진출하자 숙종은 林幹으로 하여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 해 2월 임간은 여진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3월 임간의 후임자였던 尹瓘도 역시 패전하였다. 윤관은 숙종에게 패전의 원인을 설명하고 여진과의 전쟁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그에 따라 별무반이 만들어졌던 것이다.0860)別武班에 대한 종합적인 기록은≪高麗史≫권 96, 列傳 9, 尹瓘傳에 전한다.≪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숙종 9년 12월조와≪高麗史節要≫권 7, 숙종 9년 12월조에서도 尹瓘傳에 실린 기사와 거의 비슷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그에 대한 전론으로는 李基白,<高麗 別武班考>(≪金載元紀念論叢≫, 1969;≪高麗貴族社會의 形成≫, 1990)가 있거니와, 이하의 서술은 주로 그에 의한다.

 별무반은 神騎軍과 神步軍·跳盪軍·梗弓軍·精弩軍·發火軍 등 및 降魔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 중 항마군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의 이름은≪高麗史≫兵 1, 兵制條의 서두에 나오는 5군의 조직에서 발견할 수 있다(<표 2>). 한편 주진군 조직에서는 神騎와 步班을 발견할 수 있는데,0861)≪高麗史≫권 83, 志 37, 兵 3, 州縣軍 北界. 그런데≪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문종 17년(1063) 2월조를 보면 州鎭軍 소속의 神騎와 步班이 別武班 설치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別武班의 부대 조직 전부가 종래의 것을 적용한 것이었는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尹瓘의 창의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려 준다(李基白, 위의 책, 199쪽). 이와는 달리 이들 부대 명칭이 別武班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內藤雋輔,<高麗兵制管見>,≪靑丘學報≫15·16, 1934;≪朝鮮史硏究≫, 1961, 194쪽 및 白南雲,≪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 1937, 657쪽). 한편≪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條의 서두를 보면 別號諸班이라는 표제 밑에 神騎·神步·梗弓·石投·大角·鐵水·剛弩·跳盪·射弓·發火 등의 軍號가 나열되어 있다. 이 別號諸班은 別武班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別號諸班이라는 명칭이 別武班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비록 서로 간에 출입이 있지만, 소속된 軍號가 일치하는 것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 점에서 別號諸班이 곧 別武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李基白, 위의 책, 198쪽). 그들은 별무반의 신기군과 신보군과 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中 軍 兵陣都指諭·都將校     神步都領·指諭
五兵都指諭·將校·都業師  石投都領·指諭
神騎都領·指諭       大角都領·指諭
左梗弓都領·指諭      鐵水都領·指諭
右梗弓都領·指諭      發火都領·指諭
左精弩都領·指諭      跳盪都領·指諭
右精弩都領·指諭      剛弩都領·指諭
前 軍 兵陣都指諭        神步都領·指諭
神騎都領·指諭      精弩都領·指諭
後 軍 同 上
左 軍 同 上
右 軍 同 上

<표 2>

 5군은 전투를 수행하기 위한 부대 조직이었다.0862)李基白,<高麗 軍役考>(앞의 책, 1968), 136∼138쪽. 주진군도 역시 그러하였다.0863)李基白,<高麗 兩界의 州鎭軍>(위의 책), 253·259∼263쪽. 그리고 일찍부터 유사시에는 사원의 隨院僧徒들을 징발하여 諸軍에 배치하기도 하였다.0864)≪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숙종 9년 12월. 그러므로 별무반은 전투를 위한 부대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겠거니와, 별무반이 여진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설치되었음을 생각할 때 이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별무반의 인적 구성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神騎軍은 문무의 散官과 吏胥로부터 商人·奴僕 및 일반 州府郡縣民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자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그들 가운데 말을 갖고 있지 않는 자들은 신보군·도탕군·경궁군·정노군·발화군 등에,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과거응시자가 아닌 자들은 신보군에 속하였다. 그리고 승도를 뽑아 항마군을 조직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장정으로서 별무반의 징발 대상에서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징발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正職文武官과 문관 후보자인 과거응시자, 승려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광범위한 사회적 신분층의 장정을 징발하여 조직된 것이 별무반이었는데 주요 구성원은 어느 계층이었을까. 이를 알아 보기 위해서는 부대별 구성원에 대한 검토가 도움이 된다.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신기군과 도탕군·경궁군·정노군·발화군 등의 구성원에 대해 미리 살펴보기로 한다.

 신기군은 주로 문무의 산관 등 귀족들로 이루어진 부대였을 것이다. 물론 이서나 상인 혹은 일반 주부군현민으로 신기군에 소속되었던 자들도 있을 것이지만, 그런 예는 별로 많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럴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부유층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탕군·경궁군·정노군·발화군 등은 일정한 특수 무기와 그를 조작하는 兵技에 따라 구별되는 특수군들인 듯하다. 도탕군이 어떤 특수한 무기를 사용하였는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돌격부대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만큼 그에 알맞는 특수 무기를 사용하였을 법하다. 梗弓은 强弓과 같은 말이므로 경궁군은 원거리용 활을 쓰는 부대였다면, 정노군은 일반 弩보다 정교한 弩를 사용하는 부대였을 것이다. 발화군은 화기를 이용하는 화공부대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특수 무기의 조작 방법을 익히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으로 헤아려진다. 이는, 특수군 소속 군인들이 비록 神步軍과 같이 無馬者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신보군 소속 군인들과는 구별되는 존재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아마도 종래 6衛 소속의 군인들로서 각종 특수 무기의 사용에 능통한 자들로 조직되었던 것이 이들 특수군이 아니었을까 한다.

 윤관은 자신이 여진군과의 전투에서 패전한 원인으로 그들이 기병 중심인 것에 비해 고려군이 보병 중심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므로 기병인 여진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 신기군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신기군은 전술적으로 중요한 부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로 귀족들이 신기군에 소속되었을 것임을 고려하면, 그 전술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기군에 소속된 군인의 수는 오히려 소수였을 것이다. 여러 특수군도 전술적으로는 중요하였겠지만, 특수군이고 보면 그에 소속된 군인의 수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17만명에 달하였다는 별무반 소속 병력의 대부분은 神步軍과 降魔軍 소속 군인들이었을 것이다. 그 중 신보군은 주로 일반민들로 구성된 부대로 여겨진다. 신보군에 문무의 산관이나 이서 등이 소속되어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보다는 역시 일반민인 주부군현민이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런데 주부군현민이라고 하더라도 그 대다수는 白丁이었을 것이다. 이는 군인의 보충을 위한 選軍의 대상자가 주로 백정이었다는 사실0865)李基白, 앞의 책(1968), 121쪽.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항마군은 이른바 隨院僧徒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수원승도는 일반 승려와는 다른 존재였다. 그들은 사원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고, 수확량의 일정부분을 사원에 바치는 한편 그 나머지를 자신의 재산으로 축적할 수 있었다. 즉 수원승도는 농민으로서 사원의 佃戶였던 것이며, 따라서 이들은 신보군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백정과 비슷한 사회적 처지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別武班의 주요 구성원이 농민, 구체적으로는 백정이거나 그에 준하는 수원승도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별무반은 바로 농민을 주력으로 하는 전투부대였던 것이다.

 고려 전기에도 농민이 전투에 동원되는 경우가 있었다. 가령 주진군 조직에는 백정으로 구성된 白丁隊가 편성되어 있었다. 그들이 유사시 전투에 동원되는 경우가 있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전투에 투입되는 것은 매우 위급한 상황에 한하였을 것이다. 전투 병력은 주진군 중 抄軍·左軍·右軍 등과 방수 혹은 출정중인 京軍이었으며, 백정대는 예비 병력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0866)李基白, 위의 책, 255∼256쪽. 그러므로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전투 부대인 별무반의 출현은 고려 전기 군사제도의 중대한 변화를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에 이미 정비된 군사조직이 있어 왔고, 거란과의 전쟁에서도 별무반과 같은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유의된다. 이는 별무반의 설치를 고려 전기 군사제도의 변화와 관련지어 보아야 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종래 경군을 중심으로 주진군과 주현군 등을 동원함으로써 감당해낼 수 있었던 군사동원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별무반이 만들어지게 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거니와, 별무반의 설치는 특히 경군이 유명무실해지고 있었던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0867)李基白, 위의 책, 196쪽 및<高麗의 軍事組織>(≪한국사≫5, 1975;≪高麗貴族社會의 形成≫, 188쪽). 일찍이≪高麗史≫兵志 撰者는 別武班의 설치를 六衛制의 변질과 관련하여 파악한 바 있거니와(≪高麗史≫권 81, 兵志 序), 別武班이 高麗 전기 군사제도의 변질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조직된 것이었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역역을 비롯한 군역의 과중함과 군역 수행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군인전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경군 소속 군인들이 군역을 피하여 도망하였다. 그 결과 군호연립의 원칙은 무너져 갔고, 경군은 허구화되고 있었다. 그러한 경군을 동원하여 여진과의 대규모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로 농민층을 대상으로 하여 새로운 군사조직 곧 별무반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別武班은 여진과의 강화가 설립됨에 따라 해체되었다. 그러나 兵農一致에 입가한 군사조직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단계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중요성을 찾아볼 수가 있다. 또 동시에 백정으로 대표되는 농민들의 사회적 지위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趙仁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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