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1. 관리 등용의 여러 방식

1. 관리 등용의 여러 방식

 고려시대의 관리 등용방식에 대하여≪高麗史≫권 73의 선거지 서문에는, “비록 名卿 大夫라 하더라도 반드시 科目으로 진출하는 것만은 아니었으니, 과목 이외에 또 遺逸의 薦擧와 門蔭에 의한 敍用, 成衆愛馬의 選補, 南班·雜路를 통한 陞轉 등이 있어 진출하는 길이 하나만은 아니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즉 ① 科擧(科目), ② 遺逸의 薦擧, ③ 蔭敍(門蔭), ④ 成衆愛馬의 選補, ⑤ 南班을 통한 陞轉, ⑥ 雜路를 통한 陞轉의 6가지 방식이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일반적인 벼슬길은 잘 알려진대로 과거와 음서였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해서는 자리를 따로이 마련하여 좀더 자세하게 알아 볼 필요가 있다.

 遺逸의 천거는 학식과 재능·덕행이 뛰어났으면서도 가세 등이 미약하여 仕官치 못하고 있는 인물을 천거에 의해 특별히 등용하는 제도였다. 그리하여 고려에서는 성종 11년(992) 이래로 가끔 敎令을 내려, 兩府宰樞·臺省의 侍臣 및 지방관 등으로 하여금 경향 각지에 묻혀 있는 현량한 인재의 천거를 명하고 있는데,0868)≪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凡薦擧之制. 하지만 이 제도가 어느 정도의 실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는지는 의문시되는 점이 없지 않다. 강력한 문벌적 기반 위에 서 있던 당시 사회에서 그것이 본래의 취지대로 운용되기 어려웠을뿐더러0869)金翰奎,<高麗時代의 薦擧制에 대하여>(≪歷史學報≫73, 1977). 시행 자체가 그렇게 적극적이고 활발하지는 못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아마 이 제도는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나 짐작된다.

 다음 또 하나의 방식으로 들어진 成衆愛馬의 選補에 대해서 찾아 보면, 고려 전기에는 成衆官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특수한 벼슬이 있었는데0870)朴孝信,<高麗時代의 「內侍」-그의 獨自性과 別稱->(≪駿台史學≫19, 1966). 그것을 통한 고위 관직으로의 진출을 거론한 것으로 생각된다. 성중관은 구체적으로 內侍를 비롯하여 茶房·司楯·司衣·司彛 등을 일컬었거니와,0871)≪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成衆官選補之法. 이에 대해서는 曺佐鎬,<麗代南班考>(≪東國史學≫5, 1957), 5∼9쪽 참조. 이들은 궐내의 여러 일을 담당하는 宮官이었다. 예컨대 다방의 경우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茶의 출납을 관장한 것으로 짐작된다는 점0872)周藤吉之,<高麗初期의 內侍·茶房과 明宗朝 以後의 武臣政權과의 關係-宋의 內侍·茶房과의 關連에 있어서->(≪東方學≫55, 1977;≪高麗朝官僚制의 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80, 473쪽). 등으로 미루어 그와 같이 추측되는 것이다. 이 같은 근무지와 임무의 특수성 때문에 그들의 선발 자체도 世籍과 才藝·容貌 등을 두루 살펴 뽑았지마는, 특히 내시는 글자 그대로 국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近侍職이었으므로 귀족의 자제 등이 주로 발탁되었다.0873)金昌洙,<麗代 內侍의 身分>(≪東國史學≫11, 1969).
周藤吉之, 위의 책.
朴漢男,<高麗內侍와 門閥貴族의 形成關係-高麗前期 東萊鄭氏家門을 中心으로->(≪首善論集≫8, 成均館大 大學院, 1984).
그리하여 이들 내시를 중심으로 하는 성중관은 일정한 기간의 근무를 거쳐 쉽사리 관로에 들어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뒤에 고려와 몽고와의 관계가 긴밀하여지면서 저들의 숙위 임무를 맡은 애마와 성중관이 합쳐져 성중애마라는 칭호의 성립이 있게 된 것 같다.0874)金昌洙,<成衆愛馬考-麗末鮮初 身分階層의 一斷面->(≪東國史學≫9·10, 1966), 24∼25쪽.
韓永愚,<朝鮮初期의 上級胥吏 「成衆官」-成衆官의 錄事로의 一元化過程->(≪東亞文化≫10, 서울大 東亞文化硏究所, 1971), 8쪽.
아마 고려의 성중관들이 숙위의 일도 맡아서 성격상 몽고의 애마와 유사했으므로 두 칭호가 결합되어 그같은 말이 생겨나게 된 듯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成衆愛馬의 選補’는 고려 후기의 상황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하지만 고려 전기부터도 그것이 관인 등용의 한 통로로 구실한 것은 사실이었다.

 또 다른 통로로 지적된 南班과 雜路는 실제로 하급의 관원과 吏屬의 仕路였다. 즉 이들 중 남반은 왕명의 전달, 殿中의 당직 및 조회에서의 儀衛 등을 맡은 內僚職으로 掖庭局 소속의 內殿崇班(정7품) 이하의 직위가 그것이었는데, 이들은 7품을 限職으로 하고 있었다.0875)曺佐鎬, 앞의 글, 11∼12쪽.
李丙燾,<高麗南班考>(≪서울大論文集≫人文 社會科學 12, 1966), 162쪽.
그리고 雜路 역시 말단 이속인 注膳·幕士·所由·門僕·電吏·杖首 등 잡류의 仕路로서 이것도 品官線을 상한으로 하여 胥吏 신분에 묶여 있는 吏族의 진출로였던 것이다.0876)洪承基,<高麗時代의 雜類>(≪歷史學報≫57, 1973), 69∼76쪽. 따라서 남반이나 잡로를 통한 陞轉이 고위직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지 서문에 이것들이 名卿大夫로 진출하는 한 방안으로 든 것은 역시 고려 후기의 상황을 두고 한 설명인 듯싶다. 고려 후기에 접어 들어 관제의 문란과 함께 신분제가 동요되면서 남반·잡류 출신들도 고위직으로 올라 가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거지 서문의 설명은 실제 상황에 꼭 들어 맞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는 고려 전기를 염두에 둘 때 더욱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관리의 등용 방식은 여기에서 거론된 것 이외에도 吏役을 통하거나 무공 등 특별 유공자들에 대한 서용을 비롯해 여럿이 더 추가될 수 있는 것이다.0877)朴菖熙,<高麗時代 「官僚制」에 대한 고찰>(≪歷史學報≫58, 1973), 49쪽. 이런 점에서 선거지 서문의 설명은 얼마간의 제약성을 지니는 것이지만, 그것들이 관리 등용 방식으로 중요한 기능을 한 것은 틀림이 없었다. 그러면 아래에서 그 중 가장 으뜸되는 방식으로 지적된 과거부터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朴龍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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