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2. 과거제
  • 1) 과거제의 도입

1) 과거제의 도입

 시험에 의해 관리를 선발하는 국가고시제인 科擧가 처음으로 도입, 실시된 것은 널리 알려진대로 광종 9년(958)이다. 이 때의 과거제 도입은 우리로서는 역사상 최초로 채택한 정식 국가고시제였고, 외국인인 後周 출신 雙冀의 건의에 의해 중국의 제도를 이끌어다가 시행한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문제없이 수용·정착되어 이후의 우리 사회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러던 이 과거제를 처음으로 도입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도입의 배경부터 살피기로 하는데, 그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광종 9년 당시까지의 국내 정치형세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즉 고려는 건국한 이래로 호족과 그 출신의 武勳功臣들 세력이 매우 강하여 왕권은 늘 불안한 상태에 있었거니와, 광종은 그 같은 현상을 타파하기 위하여 일련의 개혁정치를 단행하는데 과거제의 도입도 그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과거는 한문학이나 유교 경전의 능력을 시험하여 그 성적에 따라 관인을 선발하는 제도였으므로,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커다란 정치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무훈 공신들의 세력은 자연히 약화되는 대신에 군주에게 충성을 본분으로 하는 신진인사들이 기용되어 왕권은 안정을 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0878)金龍德,<高麗 光宗朝의 科擧制度 問題>(≪中央大論文集≫4, 1959), 147∼148쪽.

 더구나 이 제도의 시행을 건의한 쌍기가 군주권의 확립을 위해 제개혁을 단행한 후주 世宗의 혁신정치에 직접 관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데서 그 목적은 한층 뚜렷해진다. 이런 연유로 해서 과거 이외에도 광종이 시행한 여러 혁신적 정치에는 쌍기가 깊이 관여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어 있거니와,0879)姜喜雄,<高麗初 科擧制度의 導入에 관한 小考>(≪韓國의 傳統과 變遷≫, 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1973), 261∼267쪽. 하여튼 그의 건의는 왕권을 강화하는 한 방안으로 시의 적절한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광종은 그를 높은 자리로 발탁하여 과거제를 적극 추진시켜 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쌍기를 비롯한 중국의 귀화인들은 고려에 어떤 세력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혁신정치를 단행하여 가는 데는 안성마춤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왕권과 밀착된 가운데 개혁정치를 주도하는 한 세력으로 활약하였거니와, 과거제는 이와 같은 배경 위에서 도입, 시행될 수 있었다.

 과거는 중국에서 이미 상당한 기간 동안 시행하여 온 제도였다. 거기에다가 이 제도를 도입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그에 대해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출발부터 어느 정도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맨 처음 실시된 광종 9년의 科試에서 製述科(業)와 함께 明經科(業), 그리고 雜科(業)의 하나인 卜業의 及第者를 낸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광종은 처음 과거제를 도입한 때로부터 18년간 재위하면서 8회의 과시를 設行하였는데, 그 실시 상황과 급제자에 대해 간략하게 도표로 소개하면 아래의<표 1>과 같다.0880)이 도표는≪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選場條를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姜喜雄의 위의 글 및 吳 星,<高麗 光宗代의 科擧合格者>·金塘澤,<崔承老의 上書文에 보이는 光宗代의 ‘後生’과 景宗元年田柴科>(≪高麗光宗硏究≫, 一潮閣, 1981)의 두 논문과 필자가 작성한<科試 設行과 製述科 及第者>(≪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 硏究≫, 一志社, 1990), 328∼330쪽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이다.

施行年 考試官
(知貢擧 등)
科業別 及第者數 製述科 及第者(進士)
製述科 明經科 雜 科
① 9년(958) 雙 冀 2 3 2(卜業) 崔暹(慶州 出身?)0881)崔暹에 대해 姜喜雄과 吳星은 각기 위의 글 278쪽과 33쪽에서 慶州출신으로 짐작한데 비하여 金塘澤은 역시 위의 글, 49쪽에서 靈巖출신으로 추정하였다.
晋兢(鄕貢으로 及第. 南原出身)
② 11년(960) 7 1 3(醫業) 崔光範(慶州 出身?)
徐熙(內議令 弼의 子. 利川出身)
③ 12년(961) 7 1   王擧
④ 15년(964) 趙 翌 1 1 1(卜業) 金策(三重大匡 峻의 子. 光陽出身)
⑤ 17년(966) 王 融 2     崔居業
⑥ 23년(972) 王融·金柅 4     楊演
柳邦憲(鄕貢으로 及第. 全州出身)
⑦ 24년(973) 王 融 2     白思柔(稷山 出身)
⑧ 25년(974) 2     韓藺卿(楊州 出身)
? ?       崔亮(慶州 出身)
  27인 6인 6인 12인

<표 1>光宗朝의 科擧 設行과 及第者

 이상과 같은 광종대 과거제의 운영에서 가장 주목되는 사항은 급제자수가 극히 소수였다는 점이다. 보다시피 18년간 8회의 시행에서 進士인 제술과 급제자가 27인이며, 명경과와 잡과의 급제자까지 합해도 39인에 지나지않고 있다. 이중 과시의 중심이었던 제술과 급제자를 가지고 따져 보면 1회 평균 3.4인이 급제하고 있는 셈이며, 年平均으로는 1.5인에 불과하여 고려 전기간의 1회 평균 25.3인, 연 평균 14.6인과0882)朴龍雲,<高麗時代의 科擧-製述科의 運營->(앞의 책, 1990), 271∼272쪽. 비교해 아주 적은 숫자인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낳게 된 이유는 몇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겠으나 우선은 운영에 신중을 기하여 급제자를 엄선했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급제자의 학적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는 의미도 될 듯싶다.0883)姜喜雄, 앞의 글, 269쪽. 한데 이러한 운영방침에도 불구하고, 현재 개인의 신상을 알 수 있는 급제자가 매우 제한되어 있기는 하나, 지역별로 보아 신라 계통의 경주 출신이 2∼3인, 후백제 계통이 3인 내외, 그리고 近畿地方 출신이 3인으로 비교적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0884)吳星, 앞의 글, 33∼38쪽. 구체적인 숫자에는 이와 약간의 차가 있다. 또 徐熙와 金策처럼 중앙의 고위관료 자손이 있는가 하면 晋兢·柳邦憲처럼 鄕貢 출신도 있어 주목된다. 결국은 過去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지역이나 또는 서울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실력과 능력을 갖춘 인재를 정선하였음을 알 수 있거니와, 왕권은 이들에게서 물론 충성스러운 봉사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종래 국가에 공로가 많고 지위가 높은 관료 자손 중심으로 사람을 쓰던 방식과는 다른 방향으로서 과거제 수용의 목적이나 그 기능을 이런 데서도 살필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당시의 급제자 수가 매우 적었다는 것은 과거제 도입의 목적이 제한적이었음도 나타낸다. 그것은 과거제가 기존의 관리 등용제도를 그렇게 크게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운영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0885)姜喜雄, 앞의 글, 267∼270쪽. 이런 측면에서 도입·수용 시기의 과거제는 일정한 제약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일면 광종이 기존의 질서와 충돌을 피하면서 과거제를 조속히 고려화하여 정착시키려던 의도와도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제4회의 과시에서 이미 쌍기를 물러 가게 하고 고려인 趙翌을 知貢擧로 임명하고, 2회의 과시에서 급제한 宰相 徐弼의 아들 徐熙를 초임에 廣評員外郎이라는 높은 자리에 발탁하고 있으며,0886)≪高麗史≫권 94, 列傳 7, 徐熙. 또 4회의 과시에서 급제한 三重大匡 金峻의 아들 金策에게도 특별히 은사를 베풀고 있는 것0887)≪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科目 2, 凡崇獎之典 광종 15년.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다고 짐작된다.

 아울러 과거제 도입의 성공에는 고려사회가 그것을 수용할만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사항이다. 신라 이래로 오랫 동안 쌓아 온 교육과 학문적 수준이 고도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과거제를 수용할 수 있게 하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0888)姜喜雄, 앞의 글, 277쪽. 이 같은 높은 학적 수준은, 광종 당시에는 서울이나 지방이 유사했던 것 같다.0889)許興植,<高麗 科擧制度의 成立과 發展>(≪韓國史硏究≫10, 1974;≪高麗科擧制度史硏究≫, 一潮閣, 1981, 14∼16쪽).

 어떻든 이렇게 하여 도입 수용된 과거제 운영의 방식은 이후에도 비슷하였다. 그러다가 성종 8년(989)을 계기로 급제자수가 상당히 늘어난다. 이는 학문적 전통이 비교적 얕은 호족 계통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거니와,0890)李基白,<科擧制와 支配勢力>(≪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74), 175쪽. 그 후 그 숫자는 점차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면서 제도 자체에도 여러 가지 규정이 생기면서 과거제는 하나 하나 정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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