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2. 과거제
  • 2) 과거제의 정비와 변천
  • (1) 예비고시와 본고시의 분화

가. 예비고시=국자감시의 설치

 과거제도가 실시된 처음의 얼마 동안은 고시 절차가 비교적 단순하였다. 중앙 관리의 자제인 國學生이나 지방 출신의 鄕貢을 막론하고 예비고시 단계를 거침이 없이 곧장 본고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국가의 기반이 잡히고 관료체제가 갖추어지면서 과거제에도 여러 가지 복잡한 규정이 생기게 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예비고시로 생각되는 國子監試의 설치였다. 이에 대해서는≪高麗史≫권 74, 선거지 2, 과목 2, 국자감시조에, “곧 進士試이다. 덕종이 처음 설치하였고, 賦 및 六韻詩·十韻詩로 시험하였다. 그 후 혹 成均試라 칭하기도 하고, 혹 南省試라고도 하였 다. … 충숙왕 4년에는 九齋朔試로 대신케 하였으며, 7년에는 擧子試라 칭하였다”고 하여 그의 설치 시기는 덕종 때(즉위년)이며,0891)≪高麗史節要≫권 3에는 설치한 때가 덕종 즉위년 윤3월로 되어 있다. 성균시·남성시·거자시 등의 異稱이 있었음도 전해 주고 있다. 그 후의 조사에 의하여 국자감시는 司馬試·擧子科·南官試·百字科 등으로도 불리었음이 확인되었거니와,0892)許興植, 앞의 글(1974), 22∼27쪽.
―――,<高麗의 國予監試와 이를 통한 鄕吏의 身分上昇>(≪韓國史硏究≫12, 1976;위의 책, 127∼134쪽).
朴龍雲,<高麗時代 科擧의 考試와 體系에 대한 檢討>(≪韓國史硏究≫61·62, 1988;앞의 책, 1990, 149∼156쪽).
그런데 위에서 이 시험의 성격을 과거의 예비고시라고 설명했지만0893)曺佐鎬,<麗代의 科擧制度>(≪歷史學報≫10, 1958), 138쪽 및 許興植, 위의 책(1981), 24쪽·趙東元,<麗代 科擧의 豫備考試와 本考試에 對한 考察>(≪圓光大論文集≫8, 1974, 224∼225쪽·許興植, 위의 글(1976) 등에 그같은 의견이 피력되어 있다. 그와는 달리 보는 견해가 제시되어 얼마 간의 문제가 되고 있다. 즉 그것은 과거의 본고시에 앞서 치러야 하는 예비고시가 아니라 국자감에의 입학 자격시험이었다는 주장이 여러 논자에 의해 개진되고 있는 것이다.0894)宋俊浩,≪李朝生員進士試의 硏究≫(國會圖書館, 1970), 12쪽.
周藤吉之, 앞의 책, 72쪽.
李成茂,<韓國의 科擧制와 그 特性-高麗·朝鮮初期를 中心으로->(≪科擧≫, 一潮閣, 1981), 92쪽 및 98∼99쪽.
申千湜,<高麗中期 敎育理念과 國子監運營-睿宗의 敎育改革을 中心으로->(≪高麗敎育制度史硏究≫, 螢雪出版社, 1983), 57쪽.
특히 試官의 문제나 국자 감시 합격자에 대한 고찰 등 다각적인 분석과 고증을 통해 이를 증명하는 주장도 있어0895)柳浩錫,<高麗時代의 國家監試에 대한 再檢討>(≪歷史學報≫103, 1984).
―――,<高麗時代 進士의 槪念에 대한 檢討>(≪歷史學報≫121, 1989).
주목을 끈다.≪高麗史≫등의 사서와 문집을 보면 국자감시 및 그의 異稱과 함께 그냥 감시라고 한 것과 그 앞에 科業名을 붙인 제술업감시·명경업감시·잡업감시·율업감시 등 다양한 명칭이 찾아지는데, 그 가운데 제술업감시류가 과거의 예비고시이고, 국자감시 등은 기능이 달랐다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냥 「監試」라고만 한 명칭은 예비고시 또는 입학 자격시험의 두 경우가 모두 있는 것처럼 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같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감시는 어느 경우나 국자감시·성균시·남성시 등과 같은 뜻이었던 것 같으며, 또 이들은 제술업감시류와도 성격·기능이 동일한 시험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구체적인 사례를 검토하여 보면 감시나 국자감시 및 제술업감시류는 모두 과거의 본고시인 禮部試(東堂試)에 앞서 치른 예비고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0896)朴龍雲, 앞의 글(1988), 156∼172쪽. 그러므로 국자감시는 여전히 과거의 예비고시로 이해하는 게 옳다고 생각되므로 여기서도 일단은 그와 같이 간주하고 설명을 이어 가도록 하겠다.

 예비고시인 이 국자감시는 중앙의 국자감 학생이나 지방의 鄕貢 등이 모두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곧장 이 국자감시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 또 다른 한 단계의 예비고시를 통과해야만 하였다. 界首官試(鄕貢試)가 그것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역시≪高麗史≫권 73, 선거지 1, 과목 1, 현종 15년(1024) 12월의 判文으로, “諸州縣은 1,000丁 이상일 경우 3인을 歲貢하고, 500丁 이상은 2인, (그) 이하는 1인으로 하되, 界首官으로 하여금 試選케 하는데, 제술업은 五言六韻詩 1首로 시험하고 명경업은 五經 각 1机씩을 시험하여 例에 의거해 서울로 보낸다. 그러면 국자감에서 更試하여(國子監更試) 入格者는 赴擧를 許하고 나머지는 모두 뜻에 따라 本處로 돌아가 학습하게 하되, 만약 계수관이 합당치 못한 사람을 貢擧했을 때는 국자감이 考覈하여 科罪토록 하였다”고 한 데서 그 내용을 대략 파악할 수 있다. 京·都護府·牧의 守令인 계수관은 관하의 향공을 선발하는 책임자이기도 하였는데, 그 選上하는 향공의 숫자는 주현의 크기에 따라 차등이 두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京 가운데 행정상 특별대우를 받던 西京의 경우는 留守官이 따로 선상하는 시험을 관장하였는데,0897)≪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예종 5년 9월 判. 그것은 유수관시 또는 서경시라고 부르는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시험의 위치는 역시 계수관시와 동일한 단계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0898)許興植은 앞의 글(1974), 28∼30쪽에서, 西京은 교육수준이 높았던 데다가 分司國子監이 설치됨에 따라 分司國子監試가 設行되었으리라는 점을 들어 留守官試는 開京에서 시행된 國子監試와 같은 단계의 시험일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예종 11년(1116)에 둔 分司國子監은 겨우 20년간 존치되는데 그치고 있으므로 유수관시를 줄곧 그 같은 단계로 보는 데는 난점이 없지 않다. 이것에 대해서는 朴龍雲, 앞의 글(1988), 188∼189쪽 참조. 서울인 開京에도 國學生과 私學 12徒生을 제외한 일반 유생들이 응시하는 초시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시험은 예에 따라 開京試라 부르지 않았나 짐작된다.0899)이 점에 대해서도 朴龍雲, 앞의 글(1988), 186∼188쪽 참조.

 이렇게 지방출신의 貢士들은 계수관시(향공시)나 유수관시(서경시) 및 개경시를 초시로 치러 합격한 뒤에 다시 다음 단계의 예비고시인 국자감시에 응시하였다. 그런데 이 때 치르는 2단계의 고시에 대해 위에 든 현종 15년의 판문에는 “國子監에서 更試”하였다고 표현되어 있으며, 그로부터 얼마의 시기가 지난 문종 2년(1048) 10월의 판문에는 “尙書省의 國子監에서 審考”하였다고0900)≪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서술해 놓고 있어 이 ‘國子監 更試’나 ‘尙書省國子監審考’도 국자감시 또는 제술업감시류하고는 다른 계통의 시험이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0901)柳浩錫, 앞의 글(1984), 6쪽. 하지만 향공 등이 치르는 ‘國子監 更試’가 과거 응시자의 대부분이 치르는 국자감시와 달라야 할 뚜렷한 이유는 찾아지지 않는다. 따라서 두 시험은 일시 동일한 고시로 이해하는 게 옳다고0902)許興植, 앞의 글(1974), 25∼27쪽.
朴龍雲, 앞의 글(1988), 184∼186쪽.
―――,<高麗時代의 科擧-製述科의 應試資格>(앞의 책, 207∼210쪽).
생각한다.

 지금 이와 같이 정리하여 놓고 보면 국자감시는 현종 15년(1024)에 처음으로 설치한 셈이 된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선거지 국자감시조에는 이와 달리 덕종 때(卽位年)에 처음 설치하였다고 했으므로 양자 간에 모순이 생기게 되는데,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게 좋을 듯싶다. 즉 덕종 즉위년의 것은 중앙의 국자감생을 비롯하여 모든 과거의 응시자들이 이 시험을 거쳐야 했다는 국자감시제의 완성을 뜻하는 내용인데 비해, 이보다 7년 앞서 현종 15년에 제정된 판문은 향공들에게 국자감시를 부과한다는 규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0903)許興植, 위의 글(1976), 134∼136쪽. 이처럼 국자감시는 얼마 간의 시일을 두고 점차 정비되었다고 생각되거니와, 사실 그것이 처음으로 설치된 때는 현종 15년보다 좀더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는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0904)朴龍雲, 앞의 글(1988), 190∼191쪽. 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현종 15년에 최초로 설치되고, 덕종 즉위년에 이르러 정비를 본 것으로 결론을 내려 둔다.

 지방출신들 경우 鄕貢試 등의 초시를 거쳐 다시 국자감시에 응시한 반면 서울인 개경의 국자감 학생들은 곧바로 국자감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고 했지마는, 그러나 후자들 역시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靖宗 2년(1036) 7월에 제정되는 바 “생도들은 입학한지 3년이 되어야 감시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판문이0905)≪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그것이다. 이 판문은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예종 5년(1110)에 이르러 그와 같이 3년을 재학하는 동안 300일을 출석하여 수학하면 응시할 수 있게 한다는 규정으로0906)≪高麗史≫권 73, 選擧 1, 科目 1의 “(睿宗 5年) 九月判 ㉮ 製述明經諸業新擧者 屬國子監三年 ㉯ 仕滿三百日者 各業監試許赴”가 그것인데, 이에 대한 해석은 曺佐鎬, 앞의 글, 138쪽 및 李成茂, 앞의 글, 98쪽, 柳浩錫, 앞의 글(1984), 14∼15쪽 참조. 한편 許興植은 앞의 글(1976), 28쪽과<高麗 科擧의 應試資格>(앞의 책, 1981) 60쪽에서 이와 달리 ㉮부분과 ㉯부분을 분리, 해석하여 ㉮부분은 일단 3년간을 국자감에서 수학한뒤 國子監試에 합격한 進士라 할지라도 다시 더 3년동안 국자감에 소속케 한 다음에야 禮部試에 응시하게 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한 반면 ㉯부분은 入仕者가 국자감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말한 것이라고 보았으나 옳은 것 같지는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朴龍雲, 앞의 글(1988), 192∼193쪽 참조. 바뀌거니와, 아마 유사한 위치에 있던 私學 12徒生들도 국자감시에 응시할 경우 이와 비슷한 제약을 받았을 듯싶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과거제가 실시된 처음 6, 70년간은 고시 절차가 비교적 단순하여 擧子들은 본 고시만 치르면 되었다. 그러다가 현종 15년경에 예비고시로서, 지방출신들에게는 계수관시·유수관시·개경시 가운데 하나를 거치게 하고 다시 개경의 국자감에서 주관하는 국자감시를 부과하였으며, 그 얼마 뒤인 덕종 즉위년부터는 서울의 국자감생과 사학 12도생들에게도 국자감시를 부과하여 科試는 3단계 내지 2단계로 분화되었다. 이 때 신설되는 국자감시를 어떤 이들은 제술업감시류나 ‘國子監 更試’등과 다른 성격의 시험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으나 아마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과거시험에 있어서 이와 같은 예비고시와 본고시의 분화는 제도가 정비·발전하여 가는 한 과정으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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