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2. 과거제
  • 2) 과거제의 정비와 변천
  • (2) 복시·친시의 설행

(2) 복시·친시의 설행

 禮部試(東堂試)는 최종 고시의 성격이 강한 시험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의 시험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부시 급제자들을 대상으로 국왕이 친히 시험하는 覆試가 따로이 설치되곤 하였던 것이다.

 이 복시가 처음으로 설행되는 것은, “(성종 2년 12월)에 명하여 진사를 취하게 하고, 왕이 臨軒해 복시하여 姜殷川 등 3인과 明經 1인에게 급제를 주었는데, 복시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은천은 곧 邯贊이다”라고 전하듯이0925)≪高麗史節要≫권 2, 성종 2년 12월. 같은 사실을 알리는≪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選場條에는, “(成宗二年) 十二月 正匡崔承老·左執政李夢游·兵官御事劉彦儒·左丞盧奕 取進士 王覆試 賜甲科姜殷川 乙科二人 明經一人 及第”로 되어 있다. 성종 2년(983)이다. 이 자료는 그 밖에 복시가 당해 과거의 예부시에서 이미 급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행하였으며, 왕이 친히 주재하였다는 점도 알려주고 있어서 주목되는데, 어떤 연구자는 이번의 복시가 常例의 예부시가 아닌 임시 특설의 과거에서 합격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재시험이었으므로 통상적인 것과는 약간 성격이 달랐다고 말하고는 있지만,0926)柳浩錫,<高麗時代의 覆試>(≪全北史學≫8, 1984), 32쪽. 복시의 기본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

 하여튼 이처럼 성종 2년부터 시작된 복시는 그 후 간헐적이기는 했으나 계속되어 예종 15년(1120)까지 34회가 설행되었다. 그런데 복시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원칙적으로는 당해 예부시의 급제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었던 만큼 及落과는 관계가 없었고, 다만 시·부를 가지고 재시험하여0927)≪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성종 2년. 급제 순위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혹간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는 하였다. 예컨대 예종 10년에 설행된 복시는 예부시 합격자에 대한 성적 사정이 잘못되었다는 낙제자의 호소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그 시험에는 낙방자들도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어서 다음해의 복시 에서는 그 때의 예부시 합격자 24명과 함께 전번의 御試에 응시했던 10인과 鎖廳 4인 및 진사로 여덟 번 응시했다가 不第한 20인과 別喚 4인 등 모두 62인에게 응시하게 하여 그 중 38인만 급제시키고 있다.0928)≪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凡選場 당해 년월조. 이 두 차례의 복시에서는 예부시 합격자였다 하더라도 결국은 낙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0929)柳浩錫, 앞의 글(1984a), 41∼42쪽. 그러나 이것은 예외에 해당하는 경우이고 대체적으로는 원칙대로 시행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복시의 설행은 과시에 대한 왕권의 개입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예종 11년의 예처럼 당해년의 예부시 합격자 이외에도 여러 사람들을 응시케 한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원칙대로 시행된 때라 하더라도 복시를 설행함으로써 과시에 국왕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게 마련이었으며, 이는 試官(知貢擧·同知貢擧)에 대한 견제적 의미도 동시에 가지는 것이었다.0930)許輿植, 앞의 글(1974), 35∼37쪽.
柳浩錫, 위의 글, 32·48쪽.

 그러나 복시 설행의 뜻과 목적이 거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과시를 공정하게 시행한다는 의미도 지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0931)曺佐鎬, 앞의 글(1958), 128쪽. 그 점은 위에 들어 두었듯이 예부시의 성적 사정이 잘못되었다는 낙방자의 호소에 따라 설행된 예종 10년의 복시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비록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 복시의 시행으로 과시의 공정성이 한층 보강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아울러 그것은 文風을 진작시키고 유학을 장려한다는 의미도 지녔던 듯하다. 복시를 실시하는 자리에 太子와 宰樞·文翰官들을 불러 모아 주연을 베풀고 시를 짓게 하거나, 그 급제자들에게 국왕이 은전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데서0932)柳浩錫, 앞의 글(1984b), 49쪽. 그같은 점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모로 커다란 의미를 가진 복시였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원칙적으로 예부시 합격자의 급제 순위를 정하는 정도의 고시였고, 시기적으로도 성종대부터 예종대까지만 시행되는 데 그치고 있다. 더구나 그 기간에도 매번의 과시 때마다 설행된 것이 아니라 전체 87회의 예부시가 시행되는 사이에 복시는 34회만 열려0933)許興植, 앞의 글(1974), 37쪽 및 柳浩錫, 위의 글, 33쪽의 통계와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은, 문종 19년에 設行되었다가 폐지된 경우 같은 것을 계산에 넣느냐의 여부 등에 의한 것이다. 대략 40%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당시의 복시는 상당한 제약성도 지닌 것이었다.

 사서에 볼 것 같으면 복시와 함께 親試도 간혹 시행되고 있다. 그러면 이 시험은 어떤 성격의 고시였을까. 그 한 예가 “경종 2년(977) 3월에 進士를 親試하여 甲科로 高凝 등 3인과 乙科 3인에게 급제를 주었다”고0934)≪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選場. 한 것인데, 이 시험은 이미 예부시에 합격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진사를 뽑는 예부시 그 자체였다고 해석된다. 예부시를 국왕이 친히 주재하여 시행하고 있는 예라 생각되는 것이다. 그 뒤 의종 6년(1152) “5월에 親試하여 劉羲 등 35인에게 급제를 주었다”는 기사도0935)≪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選場. 전하는데, 이번의 시험은 대상자의 자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 그 성격도 판가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이후의 또 다른 예로는 충렬왕 6년(1280) 5월에 ‘文臣을 親試’한 것과 역시 같은 왕 28년(1302) 5월에 친시한 사실이0936)≪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選場. 보이는데, 이 두번의 시험은 예부시의 신급제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미 급제하여 벼슬을 하고 있는 「文臣」을 상대로 한 시험이었다.0937)이상의 사례에 대한 설명은 柳浩錫, 앞의 글(1984b), 19∼24쪽 참조. 그러므로 이들 시험은 모두 국왕이 친히 주재하였다는 의미에서 친시로 표현되고는 있으나 그 내용이나 성격은 조금씩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복시와 친시의 관계에서도 비슷했다고 이해된다. 두 시험은 역시 국왕이 친히 주재했다는 데서 공통성이 찾아지나 그 내용이나 성격은 상당히 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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