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2. 과거제
  • 2) 과거제의 정비와 변천
  • (3) 과거 3층제의 성립

(3) 과거 3층제의 성립

 國子監試와 禮部試(東堂試)를 주축으로 하여 鄕貢試와 覆試 등이 추가로 부과되기도 했던 고려시대 과거의 체계는 공민왕 18년(1369)에 이르러 변혁을 맞게된다. 즉 이 해에 “元朝의 鄕試·會試·殿試制度를 채용하고, 정하여 常式으로 삼았다”고0938)≪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공민왕 18년. 한 바와 같이 향시·회시·전시의 科擧三層制로 바뀌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공민왕 18년부터 과거 지망생은 이전과는 달리 누구를 막론하고 먼저 제1단계로 향시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시험은 반드시 각자의 본관지 해당 道에 가서 응시토록 되어 있었는데,0939)≪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공민왕 23년 3월. 이 향시의 기능은 종래의 향공시와 서경시·개경시 및 국자감시의 단계까지를 포괄하는 고시였다고 이해된다. 국자감시는 이보다 한 해 전인 공민왕 17년에 이미 폐지되고 있지만, 그것은 이러한 제도의 변혁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되는 것이다.0940)≪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科目 2, 國子監試 공민왕 17년 및≪高麗史節要≫권 25, 공민왕 17년 2월. 이들 사료에는 辛旽과 宦官인 李剛達이 試官의 임명 문제를 둘러 싸고 서로 다투었으므로 그를 미워한 왕이 아예 제도를 혁파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었을 뿐이고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다음해에 있을 科擧制의 전면적인 개편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許興植, 앞의 글(1974), 73쪽 참조. 단 이번에도 在官者들만은 예외를 인정하여 따로이 開京試-종래 개경 출신 일반 유생들이 치르던 개경시와 명칭은 같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고시-를 거치도록 하였으나, 그러나 이들이 치른 당해 시험은 開京鄕試와 동일한 초시의 성격을 띤 것으로서 그 체제만은 궤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향시에 합격한 擧子들은 다음으로 중앙 관부인 예부에서 주관하는 會試에 응시하였다. 그러므로 개편된 회시는 종래의 예부시에 해당하는 시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0941)許興植은 앞의 글(1981), 73쪽에서 會試를 國子監試에 비긴 반면, 柳浩錫은 앞의 글(1984b), 28쪽에서 禮部試에 비기고 있는데, 후자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된다. 이어서 회시 합격자는 다시 殿試를 치러야만 하는데, 그것은 고려 전기에 시행되던 복시와 성격·기능 등이 같은 고시였다.0942)柳浩錫, 위의 글, 28∼29쪽. 그러나 복시의 경우 상례로 설행되지는 않았던 데 비하여 전시는 과거 3층제에서의 최종단계 시험으로 급제를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했으므로 그의 위상이 한층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지니는 이번 과거제 개혁의 특징은, 우선 첫째로 과시에서 經學이 더욱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둘째로 전시가 정규화되어 과시에서 왕권의 영향력이 한층 커지게 되었다는 점도 큰 특징이었다. 셋째로 과거의 체계가 일원화되어 더욱 정제되었다는 점 역시 빼놓을 수가 없다.

 공민왕 18년(1369)은 잘 알려진 대로 그가 승려인 辛旽을 등용하여 제2차의 개혁정치를 단행하던 시기이다. 이 때의 혁신정치는 정치적·사회경제적 측면에 중점이 두어졌었지마는, 그에 앞서 교육제도나 학풍에 혁신이 일고 있었다. 이미 충렬왕 때에 주자성리학의 전래와 더불어 국학의 진흥운동이 있었지만, 공민왕조에 들어 와 크게 부상한 新進士類 세력이 신돈과 타협하여 왕 16년에 成均館을 重營하는가 하면 6經 4書齋도 分設하는 것이다. 그리고 李穡을 중심으로 하여 金九容·鄭夢周·朴尙衷·朴宜中·李崇仁 등 신진 士人들이 學官을 맡아 새로운 방법으로 경서를 강론하여 경학이 크게 일어나게 되는데, 과거제의 개혁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육과 과거 자체가 지니고 있는 폐단을 시정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이다.0943)이에 대해서는 許興植, 앞의 글(1974), 44∼50쪽 및 朴龍雲, 앞의 글(1988), 201쪽 참조.

 그러므로 과거 3층제는 공민왕이 시해되고 구세력이 다시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 우왕 2년(1376)에 이르러 폐지된다.0944)≪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신우 2년 5월. 그후 威化島回軍으로 신진사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는 창왕 즉위년(1388)에 부활되지마는,0945)≪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이처럼 과거 3층제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제도는 사실 공민왕 말년의 몇 년과 창왕·공양왕 때의 몇 년간에 걸쳐 시행된 데 지나지 않았다는 시간상의 한계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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