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2. 과거제
  • 4) 응시자격

4) 응시자격

 고려시대 과거의 응시자격은 어떠하였을까. 이 점을 고찰하여 감에 있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그 하나는 행정체계 내지는 절차상의 응시자격과 신분상의 그것을 아울러 검토해야 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그 응시자격을 하나로 뭉뚱그린 전체로서가 아니라 각 과업별로 세분하여 고찰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에서 절차상의 응시자격 문제는 앞서<과거제의 정비와 변천>대목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여기에서 다시 취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는 주로 신분상의 응시자격을 과업별로 검토코자 하지마는, 그 점을 알아보는 데는 아래의 다섯 사료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좀 번거롭긴 하지만 먼저 그들을 제시하고 설명을 이어 가도록 하겠다.

 1. 靖宗 11년(1045) 4월에 判하여, 五逆·五賤·不忠·不孝·鄕·部曲·樂工0989)樂工을 樂·工으로 해석하는 논자도 있다.·雜類의 자손은 과거에 나가는 것을 허락지 않도록 하였다(≪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2.-㉮ 문종 2년(1048) 10월에 判하여, 각 주현의 副戶長 이상 孫과 副戶正 이상 子로 製述業과 明經業에 赴試코자 하는 자는 所在官이 시험하여 京師에 貢擧하면 尙書者의 國子監에서 審考하여 지은 바의 詩·賦가 격식에 어긋난 자 및 명경업으로 1·2궤를 읽지 못하는 자는 그 試貢員을 科罪토록 하였다. (하지만) ㉯ 醫業 같은 것은 반드시 널리 학습시키는 게 필요하므로 戶正 이상의 子에 한정하지 않고 비록 庶人이라도 樂工·雜類에 관계되지 않았으면 모두를 試解토록 하였다(≪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3. 文宗 12년(1058) 5월에…李子淵 등이 또 아뢰기를, ‘製述業의 康師厚는 열 번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했으니 甲午年 赦令의 예에 의거하여 脫麻케 함이 마땅하오나, 그러나 師厚는 儒林郎·堂引이었던 上貴의 曾孫인데, 堂引은 驅史의 관리로 戊子年의 制旨에 電吏·所由·注膳·幕士·驅史·門僕의 자손으로 製述·明經·律·書·筭·醫·卜·地理의 학업에 능하여 등과하였거나 혹은 전쟁에서 큰 공을 이룬 자라야 조정반열에 오르는 것을 허락한다 하였고, 또 丙申年의 별도 制旨에 의하면 上項人의 자손으로 恩賜를 입이 入仕하는 자는 父祖의 仕路에 따라 참작하여 제수하라 하였은즉, 지금 師厚를 脫麻케 함은 마땅치 않습니다’하였다. 叅知政事인 金顯 등이 아뢰기를, ‘師厚의 증조인 上貴는 관직은 비록 堂引이었으나 儒林郞을 겸하였었고, 아비 序도 열 번 應擧하여 역시 탈마해 입사하였은즉, 師厚의 10년간 형설의 공도 생각하여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역시 탈마를 허락하옵소서’ 하였으나, 子淵 등의 논의에 따랐다(≪高麗史節要≫권 5;≪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限職 문종 12년 5월 및 권 95, 列傳 8, 李子淵).

 4. 인종 3년(1125) 정월에 判하여, 電吏·杖首·所由·門僕·注膳·幕士·驅史·大丈 등 자손은 군인의 자손에게 諸業 選路에 허통케 한 예에 의거해 赴擧토록 하여, 제술·명경의 兩大業에 오른 자는 5품까지를 限定으로 하고, 醫·卜·地理·律·筭業에 오른 자는 7품까지를 한정으로 하도록 하였다(≪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限職).

 5.-㉮ 인종 14년(1136) 11월에 判하여, 무릇 製述業은 經義와 詩·賦를 連卷 試取하며, 무릇 明經業의 試選式은 2일간 貼經하는데, 초일에는≪尙書≫徧業者의 경우≪周易≫을,≪周易≫偏業者의 경우≪尙書≫를 각각 10조씩 貼試하고…무릇 何論業式은 眞書로 奏狀을 쓰게하고 喫筭을 小貼하며,≪何論≫10궤·≪孝經≫·≪曲禮≫각 2궤·律 前後帙 각 1궤씩을 읽게한다. ㉯ 무릇 明經業監試의 格은, ■丁은 12궤인데≪周易≫·≪尙書≫·≪毛詩≫는 각 2궤씩,≪禮記≫·≪春秋≫는 각 3궤씩으로 하며, 白丁은 9궤인데≪周易≫·≪尙書≫는 각 1궤씩,≪毛詩≫·≪禮記≫는 각 2궤씩,≪春秋≫는 3궤로 한다. ㉰ 무릇 書業監試는≪說文≫30권 내에서 白丁은 3책, ■丁은 5책을 破文 試讀하고 또 眞書를 쓰게 한다. 무릇 筭業監試는, 白丁은 業經 3궤와 筭 2궤, ■丁은 業經 5궤와 筭 2궤로 한다. 무릇 律業監試는, 白丁은 律 2궤와 令 3궤, ■丁은 律 3궤와 令 3궤로 한다. 무릇 醫·卜·地理業은 각기 本司에서 試選토록 한다 하였다(≪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이 가운데에서 맨 먼저 나온 靖宗 11년(1045)의 판문인 사료 1부터 검토키로 하자. 여기에는 보다시피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여러 신분층이 열거되고 있는데, 그 중 五逆과 不忠·不孝는 범죄자류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본인은 말할 것 없고 그 자손에게도 응시할 자격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 수 없으나 여러 종류의 천인을 지칭한 듯한 五賤에게도 같은 조처가 취해지고 있는데, 당연한 처사로 이해된다. 아울러 이들의 응시가 금지된 과업에 제술과는 물론이요 명경과와 잡과까지 포함되었다는 점 또한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응시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鄕·部曲人 자손과 잡류의 자손은 얼마 간의 문제가 될 것 같다. 그 중 특히 잡류는 구체적으로 사료 3·4에 보이는 電吏·所由·注膳·門僕·幕士 등의 말단 이속을 말하지마는0990)이에 대해서는 洪承基,<高麗時代의 雜類>(≪歷史學報≫57, 1973) 참조. 벌써 문종 12년(1058) 기사인 사료 3에 이들의 자손이 제술과 이하의 각 과업에 응시할 수 있었음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료 3은 康師厚라는 사람이 10번이나 제술과에 응시하였으므로 관례에 따라 脫麻시키는 것이 마땅하나 마침 그의 증조부인 上貴가 잡류직인 堂引을 지낸 것이 말썽이 되어 朝臣 간에 논쟁이 일어난 기사지만, 그 과정에서 무자년 곧 문종 2년(1048)에0991)朴宗基는<高麗 部曲制 成員의 身分>(≪高麗時代 部曲制硏究≫, 서울大出版部, 1990), 48쪽에서 戊子年을 이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성종 7년(988)으로 보았다. 전리 등 잡류 자손으로 과거에 급제했거나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운 자에게는 조정에 설 수 있도록 허락하는 制旨가 있었다는 언급이 나올 뿐더러, 이 논쟁이 있기 이전에 강사후는 이미 계속하여 10차례나 응시하였고, 그의 부친인 康序 역시 그러하였으므로 그 시기를 거슬러 올라 가면 정종 11년 또는 그 이전부터 이들은 잡류 자손으로서 제술과에 응시하여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종 11년의 금지조항이 얼마나 철저하게 준수되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가게 마련이다. 아마 금령을 내려 놓고도 실제적으로는 응시를 묵인하여 오다가 문종 2년부터는 정식으로 허용하는 방향을 취한 게 당시의 실정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0992)朴龍雲,<高麗時代의 科擧-製述科의 應試資格>(앞의 책, 1990), 236쪽. 그로부터 얼마의 시기가 지난 인종 3년(1125)에 이르러 잡류 자손의 급제자에 대한 限品叙用의 규정이 제정되고 있지마는(사료 4), 그 역시 이렇게 미묘한 현실을 재정리한 조처가 아닐까 짐작된다.

 어떻든 이처럼 잡류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자손들에게는 일시적인 금지 조처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응시가 가능토록 하였고, 또 곧 이어 정식으로 허용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말단 이속인 잡류의 자손들에게 응시가 허락된 만큼 그 이상의 서리층에게는 물론 과장이 개방되어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중앙의 서리층에게는 제술과를 비롯한 각 과업의 응시에 별다른 제약이 없었던 것이라 하겠다.

 지방 향리의 경우 제술과와 명경과에 응시할 수 있는 신분층에 대한 규정은 사료 2-㉮의 판문에 보이는데, “각 주현 副戶長 이상의 손과 副戶正 이상의 子”로 되어 있다. 이 판문이 나온 3년 뒤인 문종 5년에는 향리의 승진 규정이 마련되어 ⑨ 諸壇史로부터 ⑧ 兵史·倉史로, 다시 거기에서 ⑦ 州府郡縣史로, 이어서 ⑥ 副兵正·副倉正→⑤ 副戶正→④ 戶正→③ 兵正·倉正→② 副戶長→① 戶長의 순서로 9단계를 밟도록 제정하고 있지마는,0993)≪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鄕職 문종 5년 10월 判. 이 사료에 나오는 後壇史는 앞뒤의 문맥으로 보아 諸壇史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千寬宇,<閑人考-高麗初期 地方統治에 관한 一考察->(≪社會科學≫2, 1958;≪近世朝鮮史硏究≫, 一潮閣, 1979, 33∼34쪽) 참조. 응시자격을 이와 견주어 볼 때 꼭 가운데에 위치한 부호정과 그 위의 호정 및 병정·창정은 子까지, 다시 그 위의 부호장·호장은 子·孫까지 응시하게 하고, 부병정·부창정 이하의 자손에게는 응시자격을 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제술업과 명경업에는 향리층 가운데에서도 일정한 선 이상의 자손만이 응시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면 제술업과 명경업에는 이와 같이 일정한 선 이상의 신분층만이 응시가 가능했을까. 일반양민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기사가 인종 3년의 판문인 사료 4에 보이는 바 “군인의 자손에게 諸業選路에 허통케 했다”는 대목이다. 이곳의 「軍人」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일반 양민의 응시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京軍 소속의 군인들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다른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즉, 경군은 세습적으로 군인직을 이어 가는 전문적 군인들로서 서리·향리 등과 유사한 신분층에 속했다는 주장과,0994)李基白,<高麗 軍班制下의 軍人>(≪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그들 역시 군인이면서 동시에 농민이었다는 주장으로0995)姜晋哲,<高麗初期의 軍人田>(≪淑明女大 論文集≫3, 1963).
―――,<軍人田>(≪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후자의 견해대로 한다면 군인의 신분은 전체가 일반양민이 되는 셈인데, 하지만 두 견해는 모두가 커다란 설득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난점 또한 없지 않다는 사실은 두 논자 사이의 토론 과정에서 밝혀진 바 있다. 그러므로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에 대해 새삼스럽게 이 자리에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거니와, 다만 지금처럼 45,000명 가까운 경군 전원을 군인직을 전문으로 하는 군인으로 보는 데에는 얼마간의 의문을 가지고 있으나 왜 많은 수가 그와 같은 성격의 군인으로 구성되었으리라는 데는 동감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종 3년 기사의 군인 역시도 이러 한 군인직을 전문으로 하는 군인을 지칭했다고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와 같은 이해가 옳다고 할 것 같으면 「軍人」에게 제술과 및 명경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고 해서 그 사실을 근거로 일반 양민에게도 허용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게 된다.

 어떤 이는, 文克謙이 刪定都監判官에 재임하면서 여러 차례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白衣도 또한 10赴를 하는데 藍衫은 어찌 3赴로 그쳐야 합니까. 청컨대 5赴를 한정으로 하도록 해 주소서”라는 奏請을 하고 있지마는,0996)≪高麗史≫권 99, 列傳 12, 文克謙·≪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의종 8년 5월≪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9년 9월. 이 주청 속에 나오는 白衣를 평민으로 해석하여 양민들도 제술과를 포함하는 각 과업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0997)曺佐鎬, 앞의 글(1958), 152쪽.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백의는 평민이란 뜻이 아니라 어느 논자의 해석처럼 「벼슬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로0998)許興植,<高麗 科擧의 應試資格>(≪高麗科擧制度史硏究≫, 一潮閣, 1981), 79쪽. 짐작되는 만큼 이것도 또한 그에 관한 적절할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된다. 이 밖에도 일반 양민이 제술과까지 응시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편 논고는 몇몇 더 찾아지는데,0999)文炯萬,<高麗科擧制度에 있어 赴擧資格의 再檢討>(≪釜山史學≫4, 1980), 4∼6쪽.
李成茂,<韓國의 科擧制와 그 特性-高麗 朝鮮初期를 中心으로->(≪科擧≫, 一潮閣, 1981), 74·96쪽.
그들의 立論이 그렇게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1000)이에 대해서는 朴龍雲, 앞의 글(1990a), 240∼241쪽 참조.

 하기는 근자에 일반양민보다 사회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았던 향·부곡인에게조차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1001)朴宗基, 앞의 글(1990), 48∼51쪽. 이 논자는 과거라고만 표현하고 있으나 그것은 제술과를 포함한 각종 과업을 모두 지칭한 듯 싶은데, 그가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논거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위에서 사료 1로 제시한 바 “五逆·五賤·不忠·不孝·鄕·部曲·樂工·雜類의 자손은 과거에 나가는 것을 허락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 정종 11년의 판문을 이와 좀 달리 해석하여, “五逆·五賤·不忠·不孝의 죄를 범한 鄕·部曲·樂工·雜類의 자손”과 같이 볼 것을 제의하면서, 이처럼 「五逆」 등은 수식어가 되기 때문에 그같은 죄를 범하지 아니한 향·부곡인 등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같이 해석할 경우 ‘五逆·不忠·不孝’는 그런 대로 납득이 가나 ‘五賤’은 죄의 종류가 아니라 어떤 부류의 천인 자체를 의미한다고 짐작되는 만큼 수식어로 사용되었다고 보기가 어려워 이해에 곤란이 따른다. 역시 새로운 해석에 동의하기에는 난점이 없지 않은 것이다.

 위의 논자는 또 ‘부곡인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好例’로 母 系가 부곡인이었던 鄭文을 들어 자신의 논지가 정당하다는 뒷받침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정문을 이처럼 부록과 직결시켜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많다고 생각된다. 그의 전기에 “文外祖 系出處仁部曲”이라 했듯이1002)≪高麗史≫권 95, 列傳 8, 鄭文. 실은 외조가 부곡계였을 뿐이었던 데다가, 그나마 그 외조는 생모 계통이었고, 호적상의 부모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그의 부친은 제술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禮部尙書(정3품)·中樞使(종2품)의 지위에까지 올랐고, 뒤에 사학 12도 가운데 하나인 弘文公徒를 열어 門下待中(종1품)·光儒侯에 추종된 鄭倍傑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층 그러하다.

 지금까지 제술과와 명경과에는 서리와 향리의 일정한 선 이상층만이 응시가 가능하였고 일반양민과 함께 향·부곡인들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음을 살펴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은 전자의 경우에는 이후에도 계속 적용된 듯하다. 하지만 후자, 즉 명경과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던 것 같다. 인종 14년(1136)부터는 白丁과 ■丁에게 응시를 허락했음을 보여 주는 사료가 눈에 띠기 때문이다. 위에 제시한 사료 5-㉯가 바로 그것이다. 한데 이 인종 14년 판문은 보다시피 각 과업의 예부시 고시과목에 이어서 명경업감시와 잡업감시의 과목 및 거기에 응시하는 백정과 장정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고 있는데, 오직 제술업감시에 대한 것만은 찾아지지 않는다. 이것은 백정과 장정이 이 제술과에만은 응시할 수 없었던 때문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어 있거니와,1003)李基白,<科擧制와 支配勢力>(앞의 책, 1974), 179∼180쪽. 그러나 어떻든 명경과에는 이들이 응시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백정과 장정이 과연 어떤 부류였느냐 하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다시 제기되는데, 현재 연구자들은 백정이란 직역을 부담치 않아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지 못한 농민층으로 보려는 견해가 많은 것 같다.1004)旗田巍,<高麗時代의 白丁-身分·職役·土地->(≪朝鮮學報≫14, 1959;≪朝鮮中世社會史의 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李佑成,<閑人·白丁의 新解釋>(≪歷史學報≫19, 1962).
이에 따른다면 그들은 신분적으로 양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논자 중에는 백정층에 驛民·島民 등이 포함되었음을 들어 그들 모두를 양민적 존재로 파악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고는 있지만, 압도적 다수가 양인농민층이었다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1005)旗田巍, 위의 글.
李佑成, 위의 글.
다음 백정보다 조금 불리한 대우를 받았던 장정은 莊(■)·處民과 관련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는 많은 듯하나 그 실체는 여전히 분명치가 않다. 아마 백정에 비해 신분적으로 약간 불리한 입장에 있기는 했어도 유사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이 갈 뿐이다.1006)旗田巍는<高麗時代의 王室의 莊園-莊·處>(≪歷史學硏究≫246, 1960:위의 책)에서 莊·處民을 賤民的 存在로 보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앞으로 좀 더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한편 許興植은 앞의 글(1976), 107쪽에서 ■丁과 白丁을 年齡區分으로 이해하였는데, 응시자격에서 연령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잘 납득이 되어지지는 않는다.

 이처럼 백정과 장정의 실체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어떤 단안을 내리기는 어려운 실정이지마는, 그들의 압도적 다수가 농민층을 포함하는 일반양민이었다는 점에 의거하여 여기서는 일단 이들로 한정시키도록 하자. 그리고 나서 다시 명경업의 응시자격을 생각해 보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거기에는 일반 양민까지 포함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 인종 14년(1136)의 판문과 사료 2-㉮의 문종 2년(1048) 판문 사이에는 모순이 생기게 된다. 문종 2년에는 신분적으로 일반 양민보다 상층에 속하는 하급 향리의 자손에게 응시자격을 주지 않았던 데 비해 인종 14년에는 일반 양민에게까지 그것을 허용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 양자 간의 모순에 대한 해결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두 판문 사이에 80여 년의 간격이 있는데, 그 동안에만 하급 향리의 자손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는 현재 전해지는 단 하나의 사료인 사료 2-㉮에 근거하여 하급 향리의 자손은 응시자격이 없었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응시가 가능했으리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문종 2년의 전후를 막론하고 이들과 신분상 동급으로 생각되는 잡류층에 응시가 허용되었던 점을 감안할 때 그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경업보다 중시된 제술업의 경우이긴 해도 잡류층에게 응시가 허락되고 있을 때에 하급 향리에게는 그것을 불허하였으리라 짐작되는 시기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여기에도 문제는 남는다. 이처럼 명경업의 응시자격을 논함에는 여러 가지 난제들이 뒤따르지만 잠정적으로 문종 2년까지는 중류층 이상 전원에게 개방되었으나, 그로부터 귀족정치가 성숙하고 향리층에 대한 제약이 강화되는 얼마 동안은 하급 향리에 한하여 제술업 뿐 아니라 명경업에도 응시를 불허하지 않았을까 짐작되며, 그러나 다시 인종 14년 이후에는 크게 완화하여 명경업만은 일반양민에게까지 응시를 허용하였던 것으로 정리하여 둔다.

 그러면 다음으로 雜科의 응시자격은 어떠하였는가에 대해 잠시 살펴 보기로 하자. 앞서 사료 1인 정종 11년의 판문은 잡과 응시자에게도 적용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지마는, 따라서 5역·불충·불효 등의 범죄자류와 5천 및 향·부곡·악공·잡류의 자손은 잡과에도 응시가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같은 금지조항에도 불구하고 역시 앞에서 설명했듯이 잡류의 자손은 실제로 제술과를 포함한 각 과업에 응시가 허락되었고, 그로부터 3년 뒤에 나온 문종 2년(1048)의 판문에는 다시 잡과 가운데 하나인 醫業에 庶人의 응시를 허락한 사실이 보인다(사료 2-㉯). 그리고 이어서 인종 14년(1136) 판문에는 書業監試·算業監試·律業監試의 고시과목을 백정과 장정별로 정하고 있어서(사료 5-㉰), 이들 일반 양민의 응시를 새삼 확인할 수가 있다. 이런 상황으로 짐작컨대 비록 문종 2년 이전은 좀 미심한 면이 있다 하더라도 대체적으로 잡과의 모든 분야는 일반양민 이상층에게는 개방되어 있었다고 이해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1007)이에 대해서는 朴龍雲,<高麗時代의 科擧-雜科에 대한 檢討>(앞의 책, 1990), 603∼604쪽 참조.

 이렇게 잡과가 양민에게 개방된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 가운데에서 과연 얼마 만한 숫자가 거기에 급제하여 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할 때는 그렇게 밝은 전망이 가지 않는다. 현실적인 경제적·사회적 난관을 극복하고 잡과에 응시 급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잡과가 이러하였다면 명경과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술과에 있어서도 잡류층 등은 유사한 형편에 놓여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이런 점에서 고려시대의 과거제가 지니는 한계성의 일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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