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2. 과거제
  • 5) 급제등급과 급제자수

5) 급제등급과 급제자수

 과거에서 마지막 관문인 예부시의 종장을 통과하면 급제가 되는데, 제술과의 경우 그 사실은 흔히들 ‘甲科 某’·‘甲科 某等 幾人’ 또는 ‘乙科 某等 幾人’과 같이 甲科·乙科, 그리고 丙科·同進士와 함께 서술되고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갑과·을과 등은 무엇에 따른 구분일까.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성적에 근거한 것이라는 연구가 나와 있거니와,1008)曺佐鎬, 앞의 글(1958), 134∼135쪽. 타당한 이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갑과 급제가 고시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은 사람이고, 다음이 을과, 다시 다음이 병과·동진사의 순서였던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高麗史≫권 73, 선거지 1, 과목 1 선장조의 초기 기사에 의할 것 같으면 과거가 처음으로 실시된 광종조에는 갑과 급제자만을 내다가 경종 2년에 이르러 을과가 추가되고, 이어서 성종 3년과 12년에 각기 병과와 동진사가 추가되는 등 점차 학대·정비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같은 과정에서 일정한 규칙이 없이 주로 2分 또는 3分되던 급제 등급은 얼마 뒤에 을과와 병과·동진사로 구분하는게 일반화되지만, 그것은 갑과의 소멸과 관련이 깊었다. 개인별 사례 역시 그러하거니와 선거지 선장조에서도 현종 17년(1026)을 마지막으로 하여 갑과는 더 이상 찾아지지 않는 것이다.

 甲科가 없어진 뒤에는 ‘乙科第一人’이 물론 수석 급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달리 壯元 또는 魁科라는 용어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제2위와 제3위의 급제자는 ‘乙科第二人’·‘乙科第三人’이 되었을 것이다. 훨씬 뒤인 고려 후기의 일이지만 대체적으로 을과는 3인, 병과는 7인, 동진사는 23인을 급제시켰다. 그러했을 때 제4위부터 제10위까지는 병과 급제, 그 이하는 동진사 급제가 되었을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상에서 설명한 갑과와 을과·병과·동진사와는 별도로 또 恩賜及第라는게 있었다. 이는 10회에 걸쳐 赴擧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한 응시자들에게 글자 그대로 恩例로써 賜與하는 급제를 말하는데,1009)≪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科目 2, 凡恩例 목종 즉위년. 늘상 주어지던 것은 아니었다.1010)≪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科目 2, 凡恩例 목종 원년 3월. 아울러 別賜라 하여 외국인인 송나라 출신에게 특별히 급제가 사여되기도 했지마는, 그것은 숙종 7년과 예종 9년, 명종 14년 등 세 차례 시행되는 동안 각각 한 명씩 모두 3명에게 주어진 데 그치고 있다.1011)≪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명경과의 경우는 제술과가 단순하게 을과·병과·동진사 등으로 표기했던 바와는 약간 달리 등급 앞에 먼저 과업명을 적고 이어서 2과 또는 3과 등으로 표시하였던 것 같다. 이는 현재까지 전해 오는 及第放牓敎書와 榜目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로서, 예컨대 예종 2년(1107)에 실시한 과거의 급제 방방교서 가운데 명경과에 관한 부분을 볼 것 같으면, “明經 李揚發 등은 孔子의 글을 깊이 읽어 (漢나라) 邊孝先이 (5經을) 배에 가득 채운 듯하다. 성인의 깊은 도리를 보았으니 옛것을 배워 벼슬에 들어갈 만하고, 군자의 儒를 알았으니 명경에 取士될 만하다. 이양발에게는 2과 급제를 주고, 崔慶雲에게는 3과 급제를 준다” 하였고,1012)≪東文選≫권 23, 金富弼 作 及第放牓敎書. 또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위의 과시와 비슷한 시기에 시행된 것으로 생각되는 과거의 다른 급제 방방교서에는 某에게 “本業의 某科及第를 준다”고1013)≪東文選≫권 23, 金富軾 作 及第放牓敎書. 보이는 것이다. 이 중 후자의 ‘本業’은 물론 명경업을 의미하며, ‘某科’는 2과 또는 3과를 뜻한 게 틀림없을 듯하다. 이같은 방식은 충렬왕 16년(1290)의 과시에서 명경과에 급제한 安甸의 급제 등급을 “明經二科一名”으로 표기하고 있는 예와도1014)<高麗朝科擧事蹟>(≪國朝榜目≫, 國會圖書館, 1971), 519쪽. 일치하거니와, 그것은 명경업에서 2과의 수석으로 급제했다는 의미의 표시로 해석된다.

 위에 든 예종 2년의 급제 방방교서 내용을 볼 때에 이양발은 명경과의 수석 급제자로 판단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2과급제가 주어지고 있다. 아마 제술업에서 갑과가 소멸된 후 을과가 首科의 지위를 이은 것과 동일한 원리에서 명경업도 2과가 수과의 위치에 있었던 모양 같다. 따라서 ‘明經二科一名’으로 급제한 안전은 전체 명경 급제자의 수석을 차지한 예로 이해된다. 그러나 2과와 3과의 구분이 순수하게 성적에 의한 것이었는지, 아니면≪尙書≫徧業 또는≪周易≫徧業과 같이 전공에 따른 것이었는지 그 점은 분명치가 않다.

 다음 잡과 급제자의 급제 등급은 어떤 방식으로 표시되었을까. 이 점을 알아보는 데는 충숙왕 17년(충혜왕 즉위년:1330)에 明書業에 급제하여 그 증서로 수여된 李子脩의 紅牌가1015)紅牌에 대해서는 朴龍雲,<高麗時代의 紅牌에 관한 一考察>(≪碧史李佑成敎授定年退職紀念論叢-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上, 1990;앞의 책) 참조. 유일한 것인데, 거기에는 ‘二科第四人明書業及策者’로 되어 있다.1016)李基白 編著,≪韓國上代古文書資料集成≫(一志社, 1987), 149쪽. 이것은 제술업의 을과·병과·동진사와 같은 방식이 아니라 명경업에서 2과·3과로 구분한 것과 동일한 방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같은 방식을 취한 명경업의 경우 등급 앞에 과업명을 기재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명서업도 그와 동일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즉 이자수 홍패의 경우는 후세에 옮겨 쓰는 과정에서 어떤 착오로 인해 등급과 과업명의 위치가 바뀐 것일 뿐,1017)韓相俊·張東翼,<安東地方에 전래된 高麗 古文書 七例 檢討>(≪慶北大論文集≫人文社會科學 33, 1982), 55쪽. 아마 원래는 ‘明書業二科第四人及第者’와 같이 되어 있었으리라고 짐작되는 것이다.

 명경업에서는 2과가 수과였던 점에 비추어 볼 때 명서업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이자수는 당해년의 과시 명서 업에서 네 번째 성적으로 급제하였고, 그것이 ‘二科第四人’으로 표시되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하지만 명서업 자체에 2과와 함께 3과의 구분 같은 것도 있었는지 그 점은 분명치가 않다.

 잡과 가운데에서 명서업 이외에 급제 등급이 표시된 다른 분야의 예는 찾아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 급제자에 대한 급제 등급의 표시방식 역시 분명치가 않은데, 하지만 짐작컨대는 명경업·명서업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면 다음으로 이들 급제자의 전체 숫자 및 그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그럴 때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 잘 알려진 대로 과시의 設行年月과 試官·壯元及第者 성명, 그리고 급제자수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놓은≪高麗史≫권 73, 선거지 1, 과목 1, 선장조이다. 아래에 이 사료를 기본으로 하여 먼저 제술과의 경우부터 설행 횟수와 급제자수를 도표로 작성하여 제시하면<표 3>과 같다.

왕 명 재위기간 설행횟수 급제자수
( )는 은사급제자
설행간격 1회평균
급제자수
연 평 균
급제자수
4대 광 종
5대 경 종
6대 성 종
7대 목 종
8대 현 종
9대 덕 종
10대 정 종
18 
6 
16 
12 
22 
3 
12 
8 
2 
14 
7 
14 
2 
6 
27   
12   
82   
121(1)
133(3)
17(3)
81   
2.3 
3.0 
1.1 
1.7 
1.6 
1.5 
2.0 
3.4 
6.0 
5.9 
17.3 
9.5 
8.5 
13.5 
1.5 
2.0 
5.1 
10.1 
6.0 
5.7 
6.8 
소 계 89년 53회 473인(8인) 1.68년 8.9인 5.3인
11대 문 종
12대 순 종
13대 선 종
14대 헌 종
15대 숙 종
16대 예 종
17대 인 종
18대 의 종
37 
0 
11 
1 
10 
17 
24 
24 
19 
0 
7 
1 
6 
11 
17 
15 
373(10)
0   
178   
26   
186   
356(9)
497   
465   
1.9 
0  
1.6 
1.0 
1.7  
1.5  
1.4  
1.6  
19.6 
0  
25.4 
26  
31  
32.4 
29.2 
31.0 
10.1 
0 
16.2 
26.0 
18.6 
20.9 
20.7 
19.4 
소 계 124년 76회 2,081인(19인) 1.63년 27.4인 16.8인
19대 명 종
20대 신 종
21대 희 종
22대 강 종
23대 고 종
24대 원 종
27 
7 
7 
2 
46 
15 
17 
6 
5 
2 
27 
9 
511   
195   
167   
60   
819   
262(7)
1.6  
1.2  
1.4  
1.0  
1.7  
1.7  
30.1 
32.5 
33.4 
30.0 
30.3 
29.1 
18.9 
27.9 
23.9 
30.0 
17.8 
17.5 
소 계 104년 66회 2,014인(7인) 1.59년 30.5인 19.4인
25대 충렬왕
26대 충선왕
27대 충숙왕
28대 충혜왕
29대 충목왕
30대 충정왕
34 
5 
25 
6 
4 
3 
20 
1 
7 
5 
1 
0 
640(인)
33   
231   
165   
33   
0   
1.7  
5.0  
3.6  
1.2  
4.0  
0  
32.0 
33.0 
33.0 
33.0 
33.0 
0  
18.8 
6.6 
9.2 
27.5 
8.3 
0   
소 계 77년 34회 1,102인(2인) 2.26년 32.4인 14.3인
31대 공민왕
32대 우 왕
33대 창 왕
34대 공양왕
23 
14 
1 
3 
10 
7 
2 
2 
297   
231   
66   
66   
2.3  
2.0  
0.5  
1.5  
29.7 
33.0 
33.3 
33.0 
12.9 
16.5 
66.0 
22.0 
소 계 41년 21회   660인(0인) 1.95년 31.4인 16.1인
총 계 435년 250회 6,330인(36인) 1.74년 25.3인 14.6인

<표 3>禮部試製述科의 왕대별 설행 횟수와 급제자수 통계표

 이 도표를 정확하게 작성하는 데는 몇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예컨대 설행 횟수의 경우 문종 19년(1065) 6월에 일단 設科는 하였으나 복시에 즈음하여 盧旦이 奏事한 게 왕의 노여움을 사 과시 자체가 파해지고 은사 급제자 몇 명만을 뽑은 일이 일어났다. 따라서 이 기사는 선거지 선장조에서는 빠지고 은례조에 실려 있지마는, 이를 계산에 넣어야 하느냐, 아니 넣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여기서는 포함시키지 않아도 좋겠다는 판단에서 제외하였지만, 또 다른 문제로 의종 6년(1152) 4월과 충렬왕 6년(1280) 4월 및 동 28년 4월의 과시는 각각 다음 달의 친시로 이어지고 있어 이를 각각 따로 계산해 주어야 할지의 여부도 잘 판단이 서질 않는데, 이 역시 여기서는 1회씩으로만 간주하였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선거지 선장조에는 정리되어 있지 않으나 족보류에 의해 충렬왕 22년과 23년, 그리고 충숙왕 11년에 과시가 설행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어서1018)이에 관해서는 許興植,<選擧志 選場의 分析>(앞의 책), 244∼245쪽 참조.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도 한 큰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는 사료의 정확성 때문에 얼마간의 의문이 제기되고는 있으나 각각 1회씩의 설과로 간주해 추가하였다.

 이러한 설행 횟수의 문제는 급제자수의 그것과도 직결된다. 구체적으로 문종 19년에는 5인의 은사 급제자를 내고 있고 의종 6년에는 4월의 과시에서 27인의 급제자를 뽑은 데 이어서 5월의 친시에서도 35인을 급제시키고 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계산해야 정확한 통계가 될 수 있을지를 잘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모두를 계산에 포함시켰지만, 그러나 특히 의종 6년의 경우 그 내막을 파악하기가 어려워 모두를 계산에 넣긴 했어도 두 과시의 급제자가 서로 중복되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상당한 불안이 있다. 그런가 하면 충렬왕 6년 5월의 친시 급제자는 대부분 그 이전의 과시에서 급제한 인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서 전원 제외시켰으며, 동왕 28년 5월의 친시 급제자는 7인 중 성명이 밝혀진 1인만을 계산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충렬왕 22년과 23년 및 충숙왕 11년의 과시는 대략 1회에 33인을 급제시키던 시기이므로 여기서도 그같이 계산하여 넣었다.

 한데 급제자수의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선거지 선장조에 과시의 설행 사실을 전하고 있으면서도 급제자수를 누락시킨 사례가 11회나 되어서 그들에 대한 처리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고 있다. 경종 4년과 성종 5년·예종 2년·인종 24년·의종 4년과 8년·신종 3년·원종 3년·충숙왕 4년과 13년·충혜왕 後元年의 과시가 바로 그같은 사례인데, 이 중에서 예종 2년과 충혜왕 후원년의 급제자수는 다른 사료에 각각 27인과 33인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정확한 파악이 가능하다.1019)許興植, 위의 글, 246쪽. 하지만 그 밖의 과시는 부득이 각 시기의 전후에 실시된 고시에서 급제자가 얼마나 되었던가를 참작하여 추측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경종 4년의 경우 6인, 그리고 성종 5년은 3인, 인종 24년과 의종 4년·8년 및 원종 3년은 29인, 신종 3년과 충숙왕 4년·13년은 각각 33인씩으로 계산하였다.

 이러한 필자 나름의 가감·추단을 그대로 용인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고려시대 제술과의 설행 회수를 살펴 보면 모두 250회가 된다. 다른 논자들은 각기 252회씩으로 계산하고 있지마는,1020)曺佐鎬, 앞의 글(1958), 129쪽.
趙東元, 앞의 글(1974), 238쪽.
許興植, 위의 글, 246·252∼253쪽.
이는 물론 위에서 설명한 바 친시 등을 여하히 처리하느냐 하는 데 따른 차이이다. 그러나 어떻든 250회로 간주할 때에 과거가 처음 실시된 광종 9년부터 고려가 멸망하는 공양왕 4년까지가 435년 간이니까 제술과는 평균 약 1.74년에 한 번씩 시행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1021)許興植은 위의 글, 253쪽에서 1.73년에 한 번씩이라는 결론을 내놓고 있다. 이같은 설행 간격에 대해≪高麗史≫권 73, 선거지 1, 과목 1, 선장조 첫머리에는 “혹은 比年(매년) 혹은 間歲(隔年)로 (열어) 定期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여 비교적 바르게 서술해 놓고 있다. 구체적인 설행 시기를 검토하여 보면 1년에 두 차례 시행한 때도 있고, 또 매년 시행하는가 하면 2년 내지 3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난 뒤에 시행하는 등 일정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 횟수를 평균하였을 때는 1.74년에 한 번꼴이 되는 것이다. 사료 중에는 “선종이 즉위(1083)해 詔하여, 진사 이하의 諸業은 지금부터 3년에 한 번씩 시험할 것을 許한다고 하였다”는 기사도1022)≪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눈에 띄지만, 혹시 일시적으로 그러한 기간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전반적으로 볼 때 그렇지는 않았다.

 이같은 설행 간격을 다시 시기별로 볼 때 초기부터 무신정권기까지는 전체 평균 설행 간격보다 약간 좁은 데 비해 몽고간섭기와 여말은 전체 평균 설행 간격에 비해 좀 넓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 무신정권기의 평균 간격이 1.59년으로 과시가 가장 頻數하게 설행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 데 반해 몽고 간섭기의 평균 간격은 2.26년으로 비교적 많은 시간이 경과한 뒤에 설행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지마는, 이것은 전자가 새로운 무신정권의 수립과 몽고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요망되는 하급 문신관료층에 대한 필요 및 민심수습 등과 관련이 많은 듯싶은데 비해 후자는 충렬왕과 충선왕, 그리고 충숙왕과 충혜왕 사이의 重祚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대내외적으로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정치적 상황 등과 관련이 깊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다음으로 급제자수는 역시≪高麗史≫권 73, 선거지 1, 과목 1, 선장조의 첫 머리에 “그 取士 또한 定額이 없었다”고 한 바와 같이 고려 전기에는 1회에 혹 수 명을 붙이는데 불과했던 때가 있는가 하면 50명을 급제시키기도(목종 원년) 하는 등 일정치가 않았다. 그러다가 고려 후기에 접어 들어서도 얼마의 시기가 경과한 신종조(1198∼1204)와 희종조(1205∼1211)에는 앞서 설명했듯이 대체적으로 을과 3인, 병과 7인, 동진사 23인, 합하여 33인씩을 급제시켰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것이 하나의 제도로 성립된 듯싶지만, 그러나 아직 정착되지는 않아 이후에도 규정수대로 뽑지 않는 경우가 많다가 충렬왕 14년(1288)부터 비로소 몇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시행되어 여말까지 지켜진다. 이렇게 하여 250회에 걸친 과시에서 합격한 전체 급제자수는 6,330인으로 집계되며, 여기에 恩賜 급제자 36인과 別賜 급제자 몇 명 등을 합하면 그 숫자는 물론 좀 더 늘어나게 된다.

 은사와 별사를 제외한 정식 급제자수 6,330인을 가지고 계산할 때 1회의 평균 급제자수는 25.3인이다. 전체의 1회 평균이, 통상 33인이던 제도와 비교하여 이처럼 적은 것은 과거의 정비기라 할 수 있는 광종∼정종 연간의 1회 평균이 8.9인-연 평균은 5.3인-인데 주원인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거니와, 그 이후의 시기, 즉 문종∼의종 연간은 1회 평균 27.4인(연 평균 16.8인), 무신정권기는 1회 평균 30.5인(연 평균 19.4)인, 몽고간섭기는 1회 평균 32.4인(연 평균 14.3인), 공민왕 이후의 여말은 1회 평균 31.4인(연 평균 16.1인)으로 대략 원만히 운영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무신정권기에는 1년 평균의 급제자수 비율이 어느 시기보다도 높아 주목되지마는, 이는 당해 기간에 과시의 설행 자체가 가장 잦았다는 사실과 함께 유의해 둘만한 점이라 생각된다.

 다음으로 명경과의 설행 횟수와 그에 따른 급제자수에 대해 알아보기 위하여 역시≪高麗史≫권 73, 선거지 1, 과목 1, 선장조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통계를 도표로 만들어 제시하면<표 4>와 같다.

왕 명 재위기간 설행횟수 급제자수
( )는 은사급제자
설행간격 1회평균
급제자수
연 평 균
급제자수
4대 광 중
5대 경 종
6대 성 종
7대 목 종
8대 현 종
9대 덕 종
10대 정 종
18 
6 
16 
12 
22 
3 
12 
4 
0 
9 
7 
11 
1 
6 
6   
0   
34   
59   
42   
2(2)   
13(3)   
4.5 
- 
1.8 
1.7 
2.0 
3.0 
2.0 
1.5 
- 
3.8 
8.4 
3.8 
2.0 
2.2 
0.3 
- 
2.1 
4.9 
1.9 
0.7 
1.1 
소 계 89년 38회 156인(5명) 2.34년 4.1인 1.8명
11대 문 종
12대 순 종
13대 선 종
14대 헌 종
15대 숙 종
16대 예 종
17대 인 종
18대 의 종
37 
0 
11 
1 
10 
17 
24 
24 
19 
0 
7 
1 
6 
5 
1 
6 
51(11)
0   
22(12)
3 (3)
19(29)
14 (4)
2 (5)   
19   
1.9 
- 
1.6 
1.0 
1.7  
3.4  
24.0  
4.0  
2.7 
-
3.1 
3.0 
3.2 
2.8 
2.0 
3.2 
1.4 
- 
2.0 
3.0 
1.9 
0.8 
0.1 
0.8 
소 계 124년 45회 130명(64명) 2.76년 2.9명 1.0명
19대 명 종
20대 신 종
21대 희 종
22대 강 종
23대 고 종
24대 원 종
27 
7 
7 
2 
46 
15 
10 
1 
3 
2 
23 
7 
40(11)
4   
18 (9)
11   
68(95)
9(13)
2.7  
7.0  
2.3  
1.0  
2.0  
2.1  
4.0 
4.0 
6.0 
5.5 
3.0 
1.3 
1.5 
0.6 
2.6 
5.5 
1.5 
0.6 
소 계 104년 46회 150명(128명) 2.26년 3.3명 1.4명
25대 충렬왕
26대 충선왕
27대 충숙왕
28대 충혜왕
29대 충목왕
30대 충정왕
34 
5 
25 
6 
4 
3 
6 
0 
1 
0 
0 
0 
8(13)
0   
2 (2)
0   
0   
0   
5.7  
-  
25.0  
-  
-  
- 
1.3 
- 
2.0 
- 
- 
- 
0.2 
- 
0.1 
- 
- 
-  
소 계 77년 7회 10명(15명) 11년 1.4명 0.13명
31대 공민왕
32대 우 왕
33대 창 왕
34대 공양왕
23 
14 
1 
3 
1 
2 
0 
0 
2   
10   
0   
0   
23.0  
7.0  
-  
-  
2.0 
5.0 
- 
- 
0.1 
0.7 
- 
- 
소 계 41년 3회 12명 13.66년 4.0명 0.27명
총 계 435년 139회 458명(212명) 3.13년 3.3명 1.05명

<표 4>禮部試明經科의 왕대별 설행횟수와 급제자수 통계표

 <표 4>에 의하면 고려 때의 명경과는 모두 139회 설행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과시 설행은 비록 月數에는 차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명경과라 하여 제술과와 분리하여 시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명경과 역시 제술과와 마찬가지로 평균 1.74년에 한 번꼴로 모두 250회 설행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업은 매번의 과시 때마다 급제자를 낸 것은 아닌 듯하다.≪高麗史≫권 73, 선거지 선장조에 정리된 과시 가운데에서 명경과 급제자를 선발한 것은 136회에 그치고 있는데, 이것이 물론 전부는 아니었다. 선장조에는 기록에서 빠졌으나 다른 자료에 의해 명경 급제자를 뽑은 횟수가 몇 번 더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예종 2년 과시의 경우 선장조에는 설행했다는 기록만이 전하나≪東文選≫권 23에 실려 있는 당해년의 급제 放牓敎書에 의해 진사 27인과 함께 명경 급제자 2인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고종 15년의 과시에 대해 선장조에는 마치 진사 31인만을 뽑은 것처럼 서술되어 있으나 당해 과시를 주관했던 李奎報가 자신의 문집인≪東國李相國集≫所收 年譜에서 이때 명경 4인도 선발했다는 내용을 밝혀 놓아서 새로이 확인되고 있으며, 앞서 설명한 바 충렬왕 16년에 명경과에 급제한 安甸의 경우도 선장조에는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이 3회를 합하면 명경과의 설행은 모두 139회가 되지만, 위의 설명과 같이 몇몇 누락된 예가 있음에 비추어 그 횟수가 좀더 늘어날 가능성은 많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들이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39회인 셈인데, 그렇다면 250회 가운데 139회를 뺀 나머지 111회 때는 명경과 급제과를 설행 당시부터 선발하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적격자가 없기 때문에 부득이해서 뽑지 않았던 것일까. 잘 알 수 없어도 명경업감시에서의 선발이 있었을 때에도 예부시에서는 뽑지 않은 예가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후자의 경우가 더 많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렇게 볼 때 통계표에 산출은 해놓았지만 139회를 기준으로 한 설행 간격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적으로 명경 급제자를 뽑은 설행 횟수의 실태가 이러했을 뿐 아니라 1회의 선발 인원 역시 제술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숫자였기 때문에 전체 급제자수도 458인에 그치고 있다.1023)曺佐鎬는 앞의 글(1958), 135쪽에서 449인으로, 趙東元은 앞의 글(1974), 237∼ 238쪽에서 448인으로 집계를 하고 있다. 진사급제자 6,330인에 비하여 약 1/14밖에 되지 않는 비율이다. 따라서 연평균 급제자수도 제술과가 14.6인이었던 데 비해 명경과는 1.05인에 지나지 않고 있다.

 明經及第者 중에는 458인 이외에 恩賜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 212인 더 있는 것으로 계산은 되고 있다. 명경의 은사급제자란 제술과에서와 마찬가지로 10회에 걸쳐 赴擧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한 응시자에게 은례로써 특별히 사여한 급제를 말하는데, 그 숫자에는 약간의 의문이 없지 않다. 진사의 은사급제자는 36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高麗史≫선거지 선장조를 볼 것 같으면 진사 급제자수·은사 급제자수·명경 급제자수의 순서로 기록한 경우와, 진사 급제자수·명경 급제자수·은사 급제자수의 순서로 기록한 두 방식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구분하여 전자는 진사의 은사 급제자이며 후자는 명경의 은사 급제자로 판단해 36인:212인이라는 숫자를 얻었지만, 시험에 의한 급제자의 진사:명경이 6,330인:458인이라는 비율로 미루어 보아도 그러하고, 또 그 명경의 급제자 458인에 비해 은사 급제자가 212인이나 된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수치인 것이다. 기록상에 어떤 착오가 있었거나, 아니면 이해상의 문제, 즉 후자와 같은 기록 방식의 경우 은사 급제자는 진사와 명경 모두를 합한 숫자가 아닐까 하는 등등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어떻든 명경의 은사 급제자가 212인이라는 그 숫자에 신빙성을 두기 어렵다는 점만은 어느 정도 분명한 듯하다. 그러므로 은사 급제자를 포함한 논의는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시기상으로 볼 때 상대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과거제가 설치된 초기부터 무신정권기까지는 설행 횟수나 급제자수 양면에서 원만한 운영이 이루어져 왔음을 살필 수 있다. 그러다가 몽고간섭기인 충렬왕 이후 명경과는 그의 존재 의미를 거의 상실하고 마는 것 같다. 이런 점은 제술과와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지고 있지마는, 명경과가 지니는 제약성의 일면이라 할 것이다.

 잡과도 제술과·명경과와 함께 시행되곤 했으므로 그도 또한 1.74년에 한번씩 모두 250회가 설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과시가 시행되어 선발한 급제자를 총망라해 정리하여 놓은 것이 역시≪高麗史≫권 73, 선거지 1, 과목 1, 선장조인데, 그러나 여기에 잡과 급제자를 뽑았다는 기록을 남긴 과시는 초기의 9회 뿐으로서 그 전체 인원도 81인에 그치고 있다. 참고로 그 상황을 표로 보이면 아래<표 5>와 같다.

잡업명
연대
明法 明算 明書 呪噤 地理 何論 三禮 三傳 政要
광종 9년
 〃 11년
 〃 15년
성종 6년
 〃 7년
 〃 8년
 〃 12년
 〃 16년
목종 원년



2


3
5
23







4
11







3
5

3

2
2



 








 
2

1
1

2


 








 








 







10
 







2
 








 
2
3
1
5
2
2
3
24
39
계 9회 33 15 8 7 0 6 0 0 10 2 0 81

<표 5>選擧志 選場에 나타난 雜業 及第者表

 여기에 기록된 것이 잡과 시행의 전부라고는 물론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 충혜왕 즉위년에 명서업에 급제한 李子脩의 예 하나만을 보더라도 쉽사리 알 수 있는 일로서, 이 이외에 비슷한 사례는 더 찾아지는 것이다. 앞서 고려 때 설행된 250회의 과시중 명경과 급제자를 선발한 것은 139회인데, 그 가운데에서 선거지 선장조에 기록된 횟수는 136회 뿐이고 나머지는 다른 자료에 의해 확인되는 것으로, 이보다 더 많은 횟수가 설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잡과의 경우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위에 예시한 선거지 선장조의 기록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따라서 잡과 급제자의 전체 숫자를 어림 잡는 일조차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러나 다만 우리들은<표 5>를 통해 한번의 과시에서 잡과의 11개 분야 급제자를 모두 뽑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 선발 인원도 일정하지 않았다는 정도는 추측해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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