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2. 과거제
  • 6) 급제자의 초직과 승진
  • (1) 제술과

(1) 제술과

 고려시대의 급제자들이 처음으로 받는 관직은 어떤 것들이었으며 또 그 품계는 어느 정도였을까. 지금부터는 이 문제에 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는데, 먼저 제술과를 대상으로 하여 찾아 본즉 전체 급제자 가운데에서 현재 初仕職을 확인할 수 있는 인원은 200명이 조금 넘는 숫자였다.1024)張東翼은<高麗時代의 官僚進出(其一)-初仕職->(≪大丘史學≫12·13, 1977), 88∼99쪽에서 時期別·官署別 통계를 제시하고 있으며, 金龍善은<蔭敍制度와 科擧制度의 比較>(≪高麗蔭敍制度硏究≫, 韓國硏究院, 1987;一潮閣, 1991, 113∼118쪽)에서 전체 숫자를 187직으로 파악하고 그들에 대한 京·外職別 통계를 제시·분석하고 있다. 여기서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資料에 대해서는 朴龍雲,≪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 硏究≫(一志社, 1990), 328∼557쪽 참조. 부족한대로 이것의 분석을 통해서도 그 내용의 대략을 짐작할 수는 있다고 생각되거니와, 크게 보면 이들은 京職과 外職으로 나뉘어지며, 다시 경직은 文翰·學官職과 一般職으로 구분된다.

 문한직이란 翰林院(藝文館)과 史館(春秋館)·秘書省(典校寺)·寶文閣·同文院·留院 등 이른바 禁內6局의 직을 말하며, 학관은 國子監(成均館)의 직을 일컫거니와 제술과 급제자들이 처음으로 보임받는 관직 중의 한 부류는 바로 이들이었던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림원과 사관의 權務職이던 直翰林院과 直史館을 비롯하여 비서성의 9품직인 秘書校書郎과 그 아래에 위치했던 校書校勘 및 보문각교감과 그리고 종9품인 國子學諭·國子直學이나 博士(정8품∼정7품) 등 하급의 학관직이 그것들이었다.

 급제자들은 이러한 문한·학관직 뿐 아니라 중앙의 諸寺와 諸署 및 諸司都監各色·諸府 등의 관부에도 제한없이 골고루 진출하고 있다. 이 때 그들이 주로 받는 관직은 권무와 9품에 해당하는 判官·錄事 등이었지마는, 좀더 나은 경우 8품 또는 7품직을 받기도 하였다. 물론 특별하게 6품직을 받은 예가 보이며, 이것 저것도 여의치 않은 경우 왕 측근의 內侍에 소속한 예도 여럿 눈에 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8품 내지 9품 또는 권무직을 받는 게 보통이었던 것이다.

 제술과 급제자들이 초직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외직에 널리 보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이들은 京·都護府·牧·州·府·郡·縣 및 防禦州·鎭 등 전국에 걸친 각급 지방행정단위의 7·8품직인 司錄·書記·判官(通判)·叅軍事, 그리고 縣尉·監務·鎭副將 등을 초사직으로 받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급제자가 처음에 외직으로 나가는 것은 하나의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이규보가 “무릇 登科者는 年紀에 제한을 받지 않고 外寄에 直補되는 것이” 국가의 成例였다고1025)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26, 上趙太尉書. 한 언급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말로 생각된다. 그리고 실례를 보더라도 급제 후 외직으로의 진출을 ‘例受’·‘例補’·‘例出’ 등으로 표현하고 있어서1026)이 점은 이미 許興植이 앞의 글(1976), 100쪽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같은 상황을 다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요컨대 제술과 급제자들은 초사직으로 중앙의 권무 내지는 8·9품에 해당하는 일반직을 어느 정도 제수받기도 했지만 주로는 역시 권무 내지 9품에 해당하는 문한·학관직과, 그리고 각급 지방행정 단위의 7·8품직을 보임받았던 것이라 하겠다. 이를 시기별로 보면 고려 전기에는 외직에 보임된 숫자가 경직의 그것보다 많고, 다시 경직 가운데에 일반직과 문한·학관직의 보임 비율은 비등하게 나타나며, 그같은 양상은 무신정권기에도 대략 비슷하다. 그러다가 충렬왕대 이후부터는 반대로 경직에의 보임 숫자가 외직의 그것보다 많아지고, 그 차이는 공민왕대 이후에 한층 심해지는데, 이는 주로 문한·학관직으로 진출하는 숫자가 많아지는 데 기인되고 있다.1027)이 점에 대해서는 朴龍雲, 앞의 글(1990a), 277∼296쪽 참조.

 외형상의 품계만 가지고 논한다면 혹시 7·8품-주로 7품-을 받는 외직이 주로 9품 내지 권무를 받는 경직보다 진출상 유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그렇지가 않았다. 경직과 외직 사이에 개재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7·8품의 외직을 받고 지방에서 몇 년간 근무하다가 중앙으로 올라올 때는 대부분의 경우 초사직으로 주어지던 9품 또는 권무직에 보임되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난다.1028)이 점은 이미 張東翼이 앞의 글(1977), 93쪽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다같은 급제자들 가운데에서 누가 유리한 경직을 받고 누가 불리한 외직으로 나갔을까. 그것을 구분짓던 한 기준으로 먼저 급제 성적을 상정하여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진출에 영향을 미친 듯한 기록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1029)≪高麗史≫권 13, 世家 13, 예종 9년 하4월 경술. 그러나 실 내용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면이 많았던 것 같다. 장원 급제자 중에서도 많은 수가 초사직으로 외직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1030)이에 대해서는 朴龍雲, 앞의 글(1990a), 282-283쪽 참조. 그같은 점을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조선시대의 경우,≪經國大典≫에 의하면 文科의 갑과 제1인에게는 종6품, 나머지 즉 제2인·제3인에게는 정7품, 을과는 정8품, 병과는 정9품계를 주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1031)≪經國大典≫권 1, 吏典 諸科. 고려시대에도 급제시의 성적이 초사직을 받는데 얼마간의 영향을 주기는 했겠지만, 조선 때처럼 성적 등급에 따라 제수받는 품계에 차등을 두는 제도는 없었던 것 같으며, 또 경직 혹은 외직에 임명하는데 있어서도 그것이 결정적 기준은 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다면 급제자들이 보다 유리한 초사직으로 나가는데 작용한 중요 요소는 따로이 있었겠는데 그게 무엇일까. 생각컨대 그것은 아무래도 家門·門閥이었던 것 같다. 이 점을 이해하는 데는 이규보가, 등과자들이 지방관으로 나가지 않고 京官에 직보되기 위해서는 詔旨가 필요했다고 한 발언이1032)≪東國李相國集≫권 26, 上趙太尉書. 크게 참고된다. 이처럼 급제자가 초사직으로 경관직을 얻는 데는 국왕의 재가를 필요로 할 만큼 많은 배려 위에서 비로소 가능했거니와, 그같은 관문의 통과에는 필시 가문·문벌과 깊은 관련이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것이다.

 이제 그와 같은 실정을 염두에 두고 초사직으로 8·9품 내지는 권무의 경직을 받았던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국왕과 각별한 관계에 있었던 인물도 찾아지나 대부분은 문벌가의 자손이었다는 사실이 재삼 확인된다. 그리고 특별하게 6품직을 제수받은 사람들도 물론 이 범주의 가문에서 벗어나지 않는 집안의 후손들이다.1033)朴龍雲, 앞의 글(1990), 284∼285쪽. 학문적 실력을 표방한 과거제였지만 그 실제의 운영에 있어서는 이처럼 가문의 배경이 많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급제후 초사직에 나가기까지의 대기 기간 문제도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과거제 시행의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과시가 본궤도에 오른 문종조 이후는 벌써 전과 같이 급제 후 곧 등용되기도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한 기간 동안 대기했다가 초사직을 받는 예가 다수 눈에 띠고 있다. 그 기간은 빨라야 2년, 늦으면 4년 또는 5년에 이르고 있는데,1034)朴龍雲, 위의 글, 286쪽. 그러한 장·단의 이유는 물론 급제 성적과 관련이 없었다고 할 수 없겠으나 역시 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가문·문벌과 연관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기 기간은, 가문하고만 연결된 문제는 아니었지만 정치기강이 크게 문란해졌던 무신정권기에 들어 와 한층 길어져 10년 여나 기다렸다가 비로소 초직을 받는 예가 종종 보이고, 심지어는 2, 30년이 되도록 취임하지 못하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1035)朴龍雲, 위의 글, 291∼292쪽. 과거제 운영의 난맥상을 드러낸 일례라 할 것이다.

 위의 설명은 모두 진사·생원 등 無官職者로 급제한 사람들의 경우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그들 뿐 아니라 在官者들도 대거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그러면 이들의 경우 초직은 어떠하였을까.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당해자의 응시 직전 관직과 급제 후의 초직을 모두 알아야 하는데 그런 예는 전기간을 통하여 34개가 찾아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번잡을 피해 그들 사례를 하나 하나 제시하지 않으려 하지만,1036)사례는 朴龍雲, 위의 글, 298∼299쪽 참조. 그것들을 분석한 결과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을 추출해 낼 수 있었다.

 첫째로 응시자가 實職 품관이었을 경우 급제 후에는 그 품계보다 대체적으로 1∼2품계 높은 관직을 제수받았다는 점이다.1037)이 점은 이미 張東翼이 앞의 글(1977), 99쪽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金龍善은 역시 앞의 글(1987), 122∼123쪽에서 이를 부정하고 있는데, 옳은 견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급제에 따른 대우로서, 그리하여 이들이 받은 관직은 7품 이상직이었으므로 그만큼 승진에 유리하였을 것이 예상된다. 둘째로 權務官으로 응시하였을 때는 급제 후 역시 7품∼9품의 실직을 받고 있다. 이것 또한 첫째의 경우에 못지 않는 대우로서, 특히 7품직을 받은 예는 파격적인 超遷에 해당하는 것이다. 셋째로 품판 同正職에 있으면서 응시한 경우인데, 이들에게는 권무직이 제수되고 있다. 그런데 이 권무직은 생원·진사 등 무관직자로서 급제한 일부의 인원들에게도 초사직으로 주어지던 것이었으므로 품관 동정직에 재임한데 따른 배려가 없지 않았느냐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지만,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들은 응시 과정에서 이미 상당한 혜택을 누리고 있고, 또 후자의 경우 외직으로 나가는 인원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품관 동정직자에 대한 급제 후의 권무직 제수도 일정한 대우의 의미는 있다고 생각된다. 넷째로 무반의 실직 품관으로 응시하여 급제하였을 때는 대개 동일한 품계의 문반관직을 제수받는 특징도 나타나고 있다. 과시에 응시한 무반직은 別將(정7품)·郎將(정6품)·中郎將(정5품)에 걸치고 있지마는, 당해인의 이러한 무반직 帶有는 그들이 무신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흔히 음직으로 이런 직위들이 주어진 데서 비롯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직위 자체는 이들에게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듯 싶은데, 이제 급제를 계기로 그 품계에 해당하는 문반직을 받게 된 것으로서, 이는 역시 커다란 승진의 뜻이 있다고 이해된다. 다섯째로 급제 후에 그 전보다 오히려 낮은 품계의 관직을 받는 경우인데, 이러한 현상은 창왕 원년 10월의 기사로 나오는 바1038)≪高麗史≫권 137. 이에 관한 설명은 朴龍雲, 앞의 글(1990a), 301쪽 참조. 비록 참상관으로서 급제했더라도 일단은 三館에 分屬해야 한다는 「舊例」 때문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조처를 받았던 사람들도 그 후 대체로 승진을 거듭하여 고위직에까지 오르고 있다.

 요컨대 재관자였다 하더라도 다시 급제를 함으로써 과거 출신이 아니면 진출이 불가능하였던 문한직에 취임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1039)金龍善, 앞의 글(1987), 122∼123쪽. 약간의 예외는 있었지만 품계상으로도 커다란 혜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급제 전의 재관자는 대부분이 음서 출신이었으므로 이 대목은 양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한층 주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같은 제술과 급제자였지만 각자의 입지에 따라 초직을 받을 때까지의 대기 기간이 달랐고, 초직의 품계에도 차이가 났으므로, 승진 역시 같은 속도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급제는 仕路로 나가는 당시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보편적인 방식들 중의 하나였으므로 遲·速에 얼마간의 차이는 있었다 하더라도 급제자 중의 많은 수가 고위직까지 승진하였다. 한 연구자가 현재 관력이 전해지는 급제자들의 최고직을 통계로 내어 보니 전체 821인 가운데 宰樞에까지 오른 사람이 388인으로 47.3%, 3품∼5품까지를 지낸 관원이 204인으로 24.8%, 6품 이하 9품까지가 130인으로 15.8%, 기타 품계를 잘 알 수 없거나 동정직자·권무관·조선 초의 관직 帶有者 등이 99인으로 12.1%의 분포였다 한다.1040)朴龍雲, 앞의 글(1990a), 301쪽. 이 통계는 사료의 미비로 인한 숫자상의 제약성 및 품계에 대한 판독의 문제와 더불어 현재 전해지는 기록이 대체적으로 고위직을 지낸 인물을 주류로 한 것이라는 점 등을 감안하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대략적인 경향을 이해하는 데는 여전히 유효한 자료라고 생각되며, 그런 관점에서 음미할 때 과거가 벼슬로 통하는 길로서 가지는 기능이 매우 컸다는 사실을 재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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