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2. 과거제
  • 8) 과거제의 역사적 의의

8) 과거제의 역사적 의의

 과거는 시험에 의해 각자의 실력 여하를 따져 官途로 나가게하는 제도였다. 그러므로 이 길은 국가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유능한 인재를 뽑아 쓰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 되었고, 따라서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의식과 시책을 베풀어 그것을 적극 장려하였다.

 감시 합격자나 예부시 급제자의 발표에 즈음하여 행한 放牓儀는 그 하나라 할 수 있다. 이 의식은 국왕이 직접 임석하여 급제자들을 치하·격려하는 행사로서,1064)≪高麗史節要≫권 19, 원종 12년 5월.
≪高麗史≫권 68, 志 22, 禮 10, 東堂監試放牓儀.
이들에게는 더없는 영광의 자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어서 급제자들은 綴行 또는 成行이라 하여 며칠간에 걸친 시가행진을 벌였으며,1065)≪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科目 2, 崇獎之典 명종 6년 8월·원종 7년 5월·충목왕 3년 10월. 그것을 알리는 呵喝의 소리는 뭇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1066)≪高麗史≫권 118, 列傳 31, 趙浚. 이와 함께 급제자들에게 합격증서로 수여되는 홍패는 사령을 파견해 직접 본인의 집에 가서 사급했는가 하면,1067)≪高麗史節要≫권 12, 명종 8년 6월. 지방출신 급제자가 고향으로 돌아 갈 때는 州官이 州吏들을 거느리고 五里亭까지 나와 맞고 그의 부모를 초치하여 주연을 베푸는 의식을 행하도록 되어 있었으며,1068)≪高麗史≫권 68, 志 22, 禮 10, 新及第進士榮親儀. 또 세 아들 혹은 그 이상이 급제했거나 두 아들이 장원급제 했을 경우에는 그들의 어머니에게 곡식을 내려 포상하는 시책을1069)≪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科目 2, 崇獎之典 숙종 2년·의종 10년 6월. 펴기도 하였다.1070)이상의 의식과 시책에 대해서는 이미 曺佐鎬가 앞의 글(1958), 159∼160쪽에서 지적한 바 있다. 과거에 대하여 국가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던가를 잘 보여 주는 몇 가지 단적인 예인 것이다.

 한편 급제자들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자기가 급제했을 때의 지공거와 동지공거를 좌주 또는 은문이라 부르고, 스스로는 그의 문생이 되어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 뿐 아니라 同榜者 끼리는 同年으로서 형제처럼 친밀하게 지냈으며 또 장원 급제자들은 모여 따로이 龍頭會를 만들기도 하였다. 과거를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집단의 형성은 서로의 이해를 위한 면이 많았겠지만, 엘리트 의식의 발로이기도 한 것으로서, 이런 점에서 역시 과거에 대한 당시인들의 평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1071)이 점에 대해서는 역시 曺佐鎬, 위의 글, 162∼164쪽 및 許興植,<高麗의 科擧와 門蔭과의 比較>(≪韓國史硏究≫27, 1979;앞의 책, 230∼233쪽) 참조.

 이처럼 과거에의 급제는 국가와 사회의 우대를 받으며 벼슬 길에 나갈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었을 뿐더러 본인은 말할 것 없고 가문에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다. 나아가서 蔭敍 출신자들에게 가해졌던 문한·학관직과 지공거직에의 취임 불허와 같은 제약을 극복할 수가 있었고, 또 재관 중에 급제를 하면 승진이 촉진되었던 만큼 가문이 좋거나 좀 못하거나를 막론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급제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현재의 벼슬을 그만 두고 應擧하여 급제한 예와1072)≪高麗史≫권 95, 列傳 8, 任懿 附 溥. 법제상 6품 이상은 원칙상 응시할 수 없으므로 4년간이나 그 직위에의 취임을 유예하면서 급제한예도 보이며,1073)≪高麗史≫권 105, 列傳 18, 許珙 附 冠. 같은 내용의 기사가≪高麗史節要≫권 22, 충렬왕 29년 추7월에도 실려 있다. 또 藍衫 벼슬에 있는 사람은 세 번밖에 응시할 수 없는 규정을 다섯 번까지로 고쳐 가면서 급제한 사례1074)≪高麗史≫권 99, 列傳 12, 文克謙. 같은 내용의 기사가≪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9년 9월에도 실려 있다. 역시 찾아진다. 위의 세 장본인인 任溥와 許冠·文克謙은 각기 당대의 명문인 定安任氏·孔巖許氏·南平文氏의 자제이거니와, 그들도 급제에 얼마나 집착했던가를 잘 엿볼 수가 있다. 이상의 세 예는 성공한 경우이지만 그렇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큰 한을 품게 되었다. 田元均과 金方慶(安東金氏)이 후자의 예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즉, 전원균은 비록 문음으로 입사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고 전하며,1075)≪東國李相國集≫권 35 및<田元均墓誌>(≪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571쪽). 역시 음서로 입사하여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른 김방경이었지만 桂籍에 참여치 못했음을 한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후자는 그렇기 때문에 아들 金恂에게 일찍이 등제한 할아버지 金孝印의 業, 즉 「祖業」을 이을 것을 바랐고, 그에 따라 김순은 힘써 공부하여 마침내 급제하였다고 한다.1076)<金恂墓誌銘>(金龍善,<新資料 高麗 墓誌銘 17點>,≪歷史學報≫117, 1988, 155∼157쪽). 그런가 하면 尹瓘(坡平尹氏)의 遠孫으로 역시 음서로 출사하여 고위직에 오른 尹侅도 “우리 집안에서는 侍中公(尹瓘) 이하 무릇 7세가 등과했는데 우리 부자는 (그렇지 못했으니) 후회한들 어찌 미치리오”라고 한탄했다는 기록도1077)≪牧隱文藁≫권 18 및<尹侅墓誌>(≪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689쪽. 전해 오고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세 예만을 들었지만 이와 같은 한을 남긴 사람은 아마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과거에의 급제는 양반·귀족들에게도 매우 큰 값어치를 지닌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못지 않게 하급 양반층이나 서리·향리 및 일반양민들도 급제를 열망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그것을 계기로 관직을 얻게 되고, 그에 따라 신분의 상승이동까지도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1078)朴菖熙,<高麗時代 「官僚制」에 대한 고찰>(≪歷史學報≫58, 1973), 54쪽. 앞서 가장 중요한 과업인 제술과의 경우 향리층의 부호정 이상 子 및 부호장 이상 孫과 서리층 이상은 응시가 가능했다고 하였거니와, 이들은 급제를 하여 관도로 진출하게 됨에 따라서 양반·귀족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여 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사례는 실제로 다수가 찾아진다. 그런가 하면 명경과와 잡과에는 일반양민층 이상이면 어느 시기부터 응시가 가능했으므로 이들의 중류층 내지 양반층으로의 신분상승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후자의 사례는 아직 찾아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료의 결핍 때문인지, 아니면 급제까지의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관계로 인해 실제로 성공을 거둔 예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 그 점은 좀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추측컨대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겠지만 일반양민으로 명경과나 특히 잡과에 급제하여 신분을 상승시켜 간 예는 얼마간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듯 생각된다. 하여튼 과거는 이처럼 신분의 변동을 齋來하는 매체의 역할을 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이런 점에서 과거제가 지니는 사회적 기능은 매우 컸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과거제의 이같은 사회적 기능이 상당히 한정된 것이었다는 데서 또한 제약성도 찾아진다. 그것은 과업중에 절대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던 제술과에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일반양민 이하층에 응시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과거라 하여 실력에만 기준을 두고 관리를 선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신분제의 바탕 위에 설치된 제도였던 것이다.

 과거제가 지니는 제약성은 그것의 운영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는 특권신분층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운영되는 면이 많았던 때문이다. 품관 또는 권무관의 경우 예비고시를 거치지 않고 직접 본고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그 하나였다. 즉 특권신분층의 자손들은 初蔭職으로 품관 내지 권무직을 받거나, 이속에 보임받았다 하더라도 얼마 후에는 품관으로 승진하여 예비고시 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본고시에 응시하여 비교적 수월하게 급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서 대부분이 고위관료 자손이었던 국자감생들에게 考藝試를 치르게 하고 좋은 성적을 얻었을 때 본고시의 초장 내지 중장까지 면제시켜 준 제도 역시 실은 음서제와도 간접적으로나마 관련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음서 출신자 중 약 40%가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하거니와,1079)金龍善, 앞의 글(1987), 96∼102쪽. 이 정도의 음서 출신 과거 급제자가 배출될 수 있었던 것도 위와 같은 과거제의 운영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급제 후에 보다 나은 초사직을 받는데 있어서나, 또 초사직을 받을 때까지의 대기기간 문제에 있어서도 가문 관계가 많이 작용하였다. 과거제 역시 고려 貴族社會 體制 내의 산물이었던 만큼 그에 배치되는 동떨어진 제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근자에 과거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유리한 지위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특권을 배타적으로 공유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견해가 피력되었는데,1080)李基白,<高麗 貴族社會의 形成>(≪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74, 184쪽;≪高麗貴族社會의 形成≫, 一潮閣, 1990, 61쪽). 그에 동감되는 점이 많다.

 과거와 함께 관리 등용의 가장 중요한 방식의 하나로 기능한 것은 음서였으므로 양자는 흔히들 비교되곤 하였다. 이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음서 출신자는 문한·학관직에 취임할 수 없었던 데 비해 과거 급제자에게는 그같은 제약이 없었고, 또 제수받는 초직의 직위에 있어서도 전반적으로 전자보다 후자의 것이 높아 관료생활에서 과거 급제자가 여러 모로 유리하였다. 거기에다가 재관 중에 급제하게 되면 급제 전의 직위보다 대체적으로 1·2품계 높은 관직을 수여받는 게 관례였던 듯하므로 이런 점에서도 급제자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렇게 초직의 진출에 있어서는 급제자가 유리했던 게 확실한데, 그러나 음서 출신자에게도 한 가지 커다란 이점이 있었다. 그것은 이들이 과거 급제자보다 이른 나이에 관도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평균 연령을 보면 음직을 받은 것이 14, 5세인데 비해 과거 급제는 24.4세로 나타나1081)朴龍雲,<高麗時代 蔭叙制의 實際와 그 機能(下)>(≪韓國史硏究≫37, 1982;앞의 책, 45쪽) 및 앞의 글(1990a), 308∼309쪽. 金龍善은 앞의 글(1987), 132쪽에서 음서의 제수 평균연령을 15.4세, 科擧 급제의 평균연령을 23.6세로 계산 해 놓고 있다. 10년 가량 음서출신자들이 과거 급제자보다 앞서서 관도로 나가고 있음이 확인된다. 여기에다가 급제의 경우 초직을 받을 때까지의 대기 기간을 감안하면 그 차이는 더 벌어지게 된다. 혹자는 음서와 과거 출신자의 승진과정을 정밀히 추적하여 하위직에서 뿐 아니라 고위직까지도 전자가 후자보다 적은 나이에 진급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고 있어 주목되거니와, 수긍이 가는 견해이다.1082)金龍善, 위의 글, 131∼137쪽.

 이처럼 음서 출신자들이 처음으로 받는 직위는 과거 급제자들의 것보다 좀 낮았으나 대신에 관도로 일찍 진출함으로써 오히려 승진과정은 빨랐다. 이 점에서 전자는 후자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음서 출신자들은 문한·학관직에 취임할 수 없었으니 이 점에서는 물론 과거 급제자들보다 불리한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음서와 과거 출신자들은 관료 생활을 해 가는데 있어서 각각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1083)金龍善, 위의 글, 140쪽. 필자는 入仕 수단으로서의 음서와 과거의 예부시 급제가 차지하는 위상은 비슷하였다고 말한 바 있지만,1084)朴龍雲, 앞의 글(1982), 52쪽. 지금 되새겨 보더라도 그 생각은 옳았던 듯싶다.

 요컨대 음서제만큼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과거는 역시 귀족사회체제 내의 제도였으므로 그의 테두리 안에서 기능하는 면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능력 본위를 지향하는 제도였고, 그리하여 일정한 범위내에서의 일이기는 하나 실제로 신분 변동을 가능케하는 사회적 기능도 가지고 있어서 폐쇄적인 고려 귀족사회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 제도의 한계성과 함께 발전적인 면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과거제는 음서제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관리 등용 방식의 하나로서 그것이 지니고 있던 역사적 의의는 매우 컸다고 이해된다.

<朴龍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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