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3. 음서제
  • 1) 음서제도의 성립

1) 음서제도의 성립

 고려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관리등용법은 科擧制度와 蔭叙制度이다. 그런데 과거제도가 개인이 가진 일정한 학문적 능력에 따라 관리로 선발하는 것에 비하여, 음서제도는 조상의 蔭德에 의하여 그 자손이 관리가 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즉 음서제도는 일정한 官品에 오르거나, 일정한 자격을 갖춘 관리의 자손에게 관직을 줌으로써 그 후손을 관리로서 복무하게 하는 제도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제도는 하나의 入仕路로서의 기능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사회적 정치적으로도 커다란 의의를 지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를 문벌귀족이 다스리는 사회라고 이해할 경우, 조상의 음덕에 의하여 자손이 관리가 되는 음서제도야말로 고려의 귀족들이 문벌을 형성해 가고 그 특권을 유지해 나가는데 큰 영향을 끼쳐 준 제도가 되었던 것이다.1085)고려의 음서제도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주목하여 음서의 제도적 성립 시기, 음서의 종류, 음서의 구체적인 운영 형태 및 음서제와 과거제의 비교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면 이러한 고려의 음서제도는 언제 제도로 성립되었던 것인가.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할 때 고려시대 음서의 시행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 7대 왕인 穆宗 때의 기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목종 즉위년(성종 16년) 12월 威鳳樓에 행차하여 사면령을 반포하여 3년간의 役을 면제하고…文武의 관리에게(官爵) 1級을 더해주며, 5품 이상(관리의) 子에게는 蔭職을 수여하였다(≪高麗史節要≫권 2, 성종 16년 11월 및≪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蔭叙).

 즉 목종은 즉위에 즈음하여 반포한 교서를 통하여 여러 가지 恩典을 내리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문무 5품 이상 관리의 子에게 음서의 특전을 내리는 것이었다. 이 즉위 교서는 12월에 반포되었는데 목종은 불과 2개월 전인 10월에 즉위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음서제도는 적어도 목종이 즉위하기 이전인 성종대에 이미 그 제도적 시행을 위한 규정이 만들어져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성종대에 음서 시행을 위한 제도적 규정이 만들어졌다는 구체적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음서 시행과 관련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조치가 시행되었음을 알려 주는 사실은 찾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성종 때부터 5품이상 관리와 6품 이하의 관리를 구분하여 특별한 대우를 하였다는 점이다. 즉 성종은 京官 5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時政의 得失을 논하게 하였고,1086)≪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원년 6월. 관리에게 加資를 시킬 때에도 경관 6품 이하의 관리들은 四考加資를 하지만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는 반드시 王旨를 취하게 하였으며,1087)≪高麗史節要≫권 2, 성종 8년 4월. 또한 경관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각기 관리후보자 1명씩을 천거하도록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1088)≪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薦擧. 그러므로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성종대 고려의 통치체제의 기반이 전반적으로 확립되는 것과 짝하여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 음서의 혜택을 주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으리라는 짐작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음서가 이렇게 성종대에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개진된 바 있다.1089)金毅圭,<高麗朝蔭職小考>(≪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서울大出版部, 1971;≪高麗社會의 貴族制說과 官僚制論≫, 知識産業社, 1985, 25∼29쪽).
李基白,<高麗貴族社會의 形成>(≪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74;≪高麗貴族社會의 形成≫, 一潮閣, 1990, 69∼70쪽).
朴龍雲,<高麗時代 蔭敍制의 實際와 그 機能>(上)·(下)(≪韓國史硏究≫36·37, 1982;≪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 硏究≫, 1990, 一志社, 3∼8쪽).
하지만 이와는 달리 “성종조의 제도적 성립을 위한 기반이 조성, 목종·현종·정종 연간의 제도적 성립의 과도기를 거쳐 고려시대의 모든 제도·문물이 정비 내지 완성되는 문종대에 비로소 하나의 제도로 정착된 것”1090)南仁國,<高麗 門蔭制度의 몇 가지 問題>(≪歷史敎育論集≫6, 慶北大師大 歷史敎育學會, 1984), 152쪽.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기반 조성이나 과도기 등이라는 표현이 다소 애매하기는 하지만, 고려의 음서 시행에 있어서 제도적 정착기를 문종대로 잡는 것은 그 하한을 너무 늦춘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왜냐하면 앞의 사료에서 보았듯이 목종은 즉위한지 겨우 두 달만에 음서를 시행하라는 교서를 직접 내렸듯이 적어도 목종 즉위년에는 이미 음서가 구체적으로 시행될 수 있는 제도적 규정이 갖추어져 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목종 이후 현종 5년 12월에도 ‘兩班職事五品以上’ 관리의 자손 등에게 음서를 시행하라는 교서가 내려졌다.1091)≪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蔭敍. 그리고 음서가 제수된 실제의 사례를 조사해 보아도 현종 즉위년에 「家蔭」이라는 음서를 제수받은 인물이 나타나고 있으며,1092)<李隴西公墓誌銘>(李蘭暎 編,≪韓國金石文追補≫, 亞細亞文化社, 1968), 84쪽. 정종 10년에도 「門蔭」을 통하여 관직에 나아간 인물도 있다.1093)<李頲墓誌銘>(≪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280쪽.

 따라서 음서가 여러 차례에 걸쳐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지만,1094)특히≪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蔭敍條의 인종 12년 6월의 判文을 통한 제도적 정비를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문종대에 제도적 정착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은 너무 신중하다는 느낌이 든다. 고려시대 음서 시행을 위한 제도적 성립은 적어도 성종대에는 그 근간이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후 몇 번의 정비를 통하여 음서제도가 시행되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리고 이 음서제도의 성립은 성종대의 전반적인 통치체제의 정비와 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한 가지 고려 음서제도의 성립문제를 검토함에 있어서 아쉬운 것은 이 제도의 전통이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아직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간혹 고대사회에서의 骨品體制 아래 신분세습 원리와 고려 음서제의 유사성이 언급되기도 하고,1095)朴龍雲, 앞의 책, 3∼4쪽. 중국으로부터의 영향도 언급되고 있기는 하지만,1096)朴龍雲, 위의 책. 중국의 음서제도에 대하여는 申採湜,<北宋의 蔭補制度>(≪歷史學補≫42, 1969) 및<南宋의 蔭補制度에 대하여>(≪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一潮閣, 1979;≪宋代官僚制硏究≫, 三英社, 1981)가 도움이 된다. 고려 음서제도의 연원에 대하여 좀더 깊이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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