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3. 음서제
  • 2) 음서의 종류와 유형별 분석

2) 음서의 종류와 유형별 분석

 고려시대의 음서 시행에 대한 구체적 규정은≪高麗史≫권 75, 選擧志 3, 銓注條 ‘凡蔭叙’라는 항목 아래 수록되어 있다(이하≪高麗史≫선거지 음서조라고 약칭함). 그런데 이≪高麗史≫선거지의 전주조에는 ‘凡蔭叙’라는 항목 이외에 또 ‘凡叙祖宗苗裔’와 ‘凡叙功臣子孫’이라는 항목이 잇달아 선정되어 있다. 이 항목들은 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종의 苗裔와 공신의 자손들에게 관직을 수여하여 관리로 등용케 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항목들도 왕실의 후예와 공신의 자손에 대해 실시하는 음서에 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므로, 넓은 의미에서 음서와 같은 내용을 가진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항목에 나타난 규정이 시행되는 시기도 ‘凡蔭叙’조에 나타난 시기와 대체로 동일한 시기에 시행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高麗史≫선거지의 이 세 항목들은 원래는 대부분 같은 시기에 반포된 규정이었지만,≪高麗史≫의 편찬자가 임의로 세분하여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표 2>참조). 이 점은≪高麗史節要≫의 기사와≪高麗史≫선거지의 해당기사들을 한꺼번에 놓고 대조해 보면 곧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규정에 의할 때 고려시대의 음서는 이세 종류, 즉 문무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 대한 일반적인 음서와 공신자손에 대한 음서, 그리고 조종의 묘예에 대한 음서 등 세 가지로 나누게 될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규정 이외에도 고려시대에 음서가 시행된 구체적 사례는≪高麗史≫의 열전 기록이나 고려시대의 墓誌銘 등과 같은 다른 기록을 통하여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을 종합하여 대조해 보면 명시된 규정과 실제로 나타나는 사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예컨대, 고려시대의 음서 시행의 사례 가운데에는≪高麗史≫선거지 음서조의 규정을 벗어나는 다음과 같은 형태의 음서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制하여 內史侍郎平章事 劉徵弼은 대대로 경사를 누렸으며, 문필로써 여러 왕을 보좌하여 그 공을 기념할 만하니, 그의 아들 綽에게 工部書令史 職을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6, 世家 6, 정종 6년 3월).

(宋)有仁은 인종 때 아비가 사직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므로, 散員 자리를 주었다(≪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鄭仲失 附 宋有仁).

 이러한 음서는 「문무 5품 이상 관리」이거나 「功臣」이라는 자격으로 그 자손에게 음서의 혜택을 받게 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일정한 공로를 세웠으므로 그 자손이 음서를 받게 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음서는≪高麗史≫선거지에 명시된 규정을 벗어난 음서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祖宗苗裔에 대한 음서의 경우 그것은 규정상으로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음서가 고려시대에 실제로 시행되었다고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할 때, 이 음서가 시행된 실제의 사례는 하나도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음서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하여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여야 하겠지만, 시행된 실제의 사례가 전혀 찾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음서의 제도적 실체의 이해를 통한 역사적 의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규정된 범위를 벗어나서 시행된 음서가 있고, 규정된 것이라 할지라도 실제의 사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종류가 있다는 점에서, 과연 고려시대의 음서를 규정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한 방법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이에 따라 고려의 음서에 대하여 하나는 “넓은 의미의 음서와 좁은 의미로 大夫 이상 관인 자손의 음서”로 구분할 것을 제의하고 조종 묘예와 공신 자손에 대한 음서를 넓은 의미의 음서로 파악한 견해가 있다.1097)許興植,<高麗의 科擧와 門蔭과의 比較>(≪韓國史硏究≫27, 1979;≪高麗科擧制度史硏究≫, 一潮閣, 1981, 210쪽). 또 다른 하나는≪高麗史≫의 규정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고려의 음서를 5품 이상 고위관료의 자손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음서와 공신자손과 조종묘예에 대한 음서의 세 종류가 있었다고 파악하고, 일반음서에는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定規蔭叙와 국왕의 즉위나 관료의 致仕 등에 따라 부정기적으로 시행되는 特賜蔭叙 등의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1098)朴龍雲,<高麗時代의 蔭叙制에 관한 몇 가지 問題>(앞의 책, 122쪽). 한편 南仁國도 앞의 글, 152∼153쪽에서≪高麗史≫선거지의 기사에 따라 세 가지 종류로 음서를 구분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후자의 음서의 유형 분류는 전·현직 고위관료에 대한 정규음서와 특사음서, 공신자손 음서 및 조종묘예 음서라는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견해와 거의 흡사한 것이기도 하다.1099)盧明鎬,<高麗時代 承蔭血族과 貴族層의 蔭敍機會>(≪金哲埈華甲紀念論叢≫, 知識産業社, 1983;≪高麗時代의 貴族制說과 官僚制論≫, 知識産業社, 390쪽).

 또한 음서가 제수되는 요인을 강조하여 음서의 내용을 관직 5품 이상 子에 대한 음서와 아울러 頒赦蔭敍및 勳功, 太祖功臣, 引年致仕, 戰死卒蔭, 前朝功臣, 轉品과 親祀大廟의 경우에 음서가 시행된 것으로 파악한 연구성과는1100)金毅圭, 앞의 글 참조. 음서가 제수되는 시기를 알아 보는 데 매우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 음서의 시행 사례에 나타난 음서의 명칭 가운데 父蔭·祖蔭 등과 같이 친족의 명칭이 붙는 음서를 조사하여 그 명칭을 분류하는 방법을 고찰한 시각도 있다. 즉 음서제도가 父·祖나 다른 친족의 음덕에 의하여 그 자손을 관직에 나가게 하는 제도라고 정의해 볼 때 음서의 시행은 원칙적으로 친족 쌍방 간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착안해 본 것이다.1101)金龍善,≪高麗蔭叙制度硏究≫(一潮閣, 1991), 11∼21쪽.

 이러한 관점에서≪高麗史≫선거지의 음서조에 명시된 바 음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친족의 범위를 정리해 보면 다음의<표 1>과 같이 된다.

번호 시 기 기사의
형 태
收養子 外孫 女壻
1
2
3
4
5
6
7
8
9
10
11
12
목 종 즉 위 년
현 종 5년 12월
숙 종 즉 위 년
 〃  5년 2월
예 종 3년 2월
인 종 5년 2월
 〃  12년 6월
 〃  13년윤2월
고 종 40년 6월
충렬왕 8년 5월
충선왕 즉 위 년
 〃  복 위 년
敎書
敎書
詔書
詔書
詔書
判文
判文
判文
詔書
敎書
敎書
敎書






















 












































 






















<표 1>蔭叙가 除授되는 親族의 範圍

≪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蔭叙에 의함.

 이<표 1>에 의할 때, 시기적으로 약간의 변동은 있지만 대체적으로 고려시대에 음서를 제수받을 수 있는 친족의 범위는 子(收養子 포함)·內孫·外孫·女壻·姪·甥·弟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들이 받는 음서의 명칭도 각각 父蔭·祖蔭·外祖蔭·妻父蔭·伯父蔭·叔父蔭·甥舅蔭(外叔父驚)·兄蔭이 될 것이다. 음서의 혜택을 받은 인물과 그 음서의탁의 대상이 된 인물을 편이상 「受蔭者」와 「托蔭者」라고 불러 두고, 음서가 제수될 수 있는 이들 친족관계를 그려 보면<그림 1>과 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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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高麗時代 蔭叙가 除授되는 親族의 範圍
<그림 1>高麗時代 蔭叙가 除授되는 親族의 範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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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高麗史≫선거지의 음서조 규정에 의할 때 이러한 친족의 범위 안에서 시행되는 8개의 음서가 가장 전형적이며 일반적인 음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음서가 시행된 실제의 사례를 조사해 보면, 이러한 친족의 명칭이 붙는 음서 이외에도 曾祖蔭1102)崔肅의 증손 崔懋가 증조의 蔭을 받아 관리가 되었다(≪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1년 2월).·高祖蔭1103)<張文緯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96∼97쪽.·外高祖蔭1104)<許載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107쪽.·高祖之父蔭1105)<張忠義墓誌銘>(≪朝鮮金石總覽≫, 133쪽.·父之外高祖蔭1106)<梁元俊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145쪽.·七代祖蔭1107)<吳孝元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268쪽.과 같이 규정의 범위를 벗어난 친족의 명칭이 붙는 음서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고려시대의 음서는 규정에 나타난 범위 안에서 시행된 음서와 그 규정을 벗어나 시행된 음서라는 두 가지 종류의 음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규정을 벗어나 시행된 음서를 살펴 보면 이 음서들은 모두 「功臣蔭叙」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이 조사되었다. 즉 이 음서의 탁음자들을 조사해 보면 그들은 모두 配享功臣, 三韓功臣 혹은 功臣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1108)예컨대 曾祖蔭은 配享功臣인 崔肅, 父之外高祖蔭은 三韓功臣인 崔英休, 高祖蔭은 功臣 張元之를 托蔭者로 하여 각각 시행되었다. 즉 증조음 이상의 친족의 명칭이 붙는 음서를 받은 인물들은 모두 공신 자손이었으며, 이들은 이러한 공신 자손이라는 자격으로서 그 음서의 혜택을 입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규정 내의 범위에서 시행된 음서의 실제 사례를 조사해 보면, 부음·조음 등과 같은 음서의 탁음자들은 공신이 아니더라도 그 자손들에게 음서의 혜택을 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1109)예컨대<金諴墓誌銘>(≪朝鮮金石總覽≫上), 356∼357쪽 및<崔裒抗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113∼114쪽 참조.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고려시대의 음서는 규정의 범위 안에서 시행된 음서와 규정의 범위를 벗어난 음서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들은 각각 문무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을 대상으로 하여 실시한 일반적인 음서와 공신 음서라는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공신음서라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勳功蔭叙」에 속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따라서≪高麗史≫선거지에 나오는 공신 자손에 대한 음서의 규정도 넓은 의미에서의 훈공음서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종 묘예에 대한 음서도 마찬가지의 성격으로 파악하여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렇게 되면 법제적으로 마련된 규정과 실제의 사례를 아울러 종합해 볼 때, 고려의 음서는 일반적인 음서와 공신음서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훈공음서로 일단 대별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고려시대의 음서를 이렇게 두 종류의 성격을 가진 음서로 파악하려 할 경우 이 음서의 명칭을 조선시대의 기록에 따라서 「門蔭」과 「功蔭」이라는 명칭으로 불러보자는 안이 제시되었다.1110)“吏曹判書 李稷이 상소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방법을 논하였다. 그 상소를 略하면 다음과 같다. ‘…門蔭·功蔭子弟를 叙用하는 법은 이미 마련되었습니다. 앞으로는 그 문음과 공음 이외에 職이 없는 자제들은 나이가 18세 이상이고 才幹이 있는 자를 大小의 관리들에게 천거하게 하고 內外祖父의 관직과 이름을 적어서 本曹에 바치면 書·算·律로써 그의 能否를 시험하여 바야흐로 서용하게 하면 요행을 바라는 무리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의견을 따랐다”(≪太宗實錄≫권 9, 태종 5년 2월 을해). 즉 이 기사에 의하면 적어도 조선의 태종 5년 이전에 이미 門蔭과 功蔭이라는 두가지 음서에 의한 관리등용법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金龍善,<朝鮮前期의 蔭敍制度>,≪아시아文化≫6, 한림대 아세아문화연구소, 1990;앞의 책) 참조. 즉 고려시대에 시행된 음서 가운데≪高麗史≫선거지 음서조의 규정에 나타난 것과 같이 문무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을 대상으로 하여 시행된 음서를 「門蔭」이라 하고, 공신자손이거나 특별한 공훈을 세운 관리의 자손에게 내려 준 음서를 「功蔭」이라고 파악하자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시행된 음서의 성격을 이와 같이 두 가지 성격을 가진 것으로 나누어 본다면 이 시기에 만들어졌던 규정과 아울러 그 규정의 미비함, 또 실제의 시행 사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음서를 이와 같은 문음과 공음으로 분명하게 분류해 줄 수 있는 기록은 없다. 실제로 고려시대의 음서 시행 사례를 보면 음서라는 명칭을 매우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는 동시에, 막연히 「蔭」이라 표현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이러한 음서들이 과연 문음과 공음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 모호한 것도 많이 있다. 그러나 특사음서와 공신음서 등과 같은 분류도 막상 그 실제를 조사해 보면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많이 생겨난다. 따라서 문음과 공음이라는 용어는 다소 그 기준이 모호해질 우려가 있지만, 고려의 음서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이러한 방식의 개념 정리라도 필요해지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말하자면 하나의 역사적 용어로서 「門蔭」과 「功蔭」의 개념을 도입해 볼 때 고려 음서제도의 실상을 제도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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