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3. 음서제
  • 3) 음서의 시행시기

3) 음서의 시행시기

 고려의 음서를 크게 보아 일반적인 음서(門蔭)와 특별한 음서(功蔭)로 나눌 수 있다면 이러한 음서는 언제 시행되었던 것일까.

 음서 시행에 관한 규정이≪高麗史≫선거지의 凡蔭叙 이외에도 凡叙祖宗苗裔와 凡叙功臣子孫을 통하여 제시되어 있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 세 기사에 나타난 음서의 시행 계기를 다른 관련 기록들을 참조하여 정리해 보면<표 2>와 같이 된다.

번호 연 대 蔭叙 叙功臣
子 孫
叙祖宗
苗 裔
시행의 계기
1
2
3
4
5
6
7
8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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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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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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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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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목 종 즉 위(12월)
현 종 5년 12월
문 종 6년 10월
 〃  37년 윤6월
숙 종 즉 위(11월)
 〃  3년 10월
 〃  5년 2월
예 종 3년 2월
 〃     4월
 〃  6년 1월
인 종 5년 2월
 〃  8년 12월
 〃  12년 6월
 〃  13년 윤2월
의 종 16년 (5월) 
 〃  21년 9월
 〃  23년 4월
신 종 즉 위(11월)
고 종 40년 6월
충렬왕 8년 5월
충선왕 즉 위 (1월)
 〃  복 위 (10월)
충숙왕 12년 (10월)
공민왕 5년 6월
 〃  12년 5월
 〃  23년 3월
우 왕 원년 2월










○(判)

○(判)
○(判)












 



○(判)







○(判)








































 
왕의 즉위
金訓 등의 쿠데타에 따른 포상
王姪의 책봉
<判 文>
왕의 즉위
왕의 책봉과 그에 따른 太廟親享
왕태자 책봉
왕의 책봉
尹瓘의 平女眞과 그에 따른 大廟親享
왕의 生辰에 따른 포상
<判 文>
<判 文>
<判 文>
<判 文>
盜의 발생 등 국가적 어려움에 따른 恩賜赦免
南京으로 부터의 還京
西京으로 부터의 還京
왕의 즉위
왕 즉위 40년의 경축
旱에 따른 恩賜와 赦免
왕의 즉위
왕의 복위
왕비의 병환에 따른 宥赦
奇轍 일당 제거 후 실시
倭寇의 내침 등 어려움에 따른 宥赦
국가적 어려움에 따른 宥赦?
       〃

<표 2>蔭叙 施行의 時期와 그 契機

*≪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에 의함.

 이<표 2>에 나타나듯이 음서는 우선 새 국왕의 즉위나 복위, 왕과 왕태후, 세자의 책봉, 기타 다른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西京과 南京을 순행하였을 때에도 음서가 시행되었으며, 기타 국가적 변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음서가 시행되었다.1111)朴龍雲, 앞의 책, 27∼30쪽. 즉 고려시대에 국왕의 즉위 등과 같은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에 대규모의 恩赦가 베풀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는데 이 가운데 공신 자손·조종 묘예·5품 이상 관리의 자손 등에게 내려진 은전이 바로 이와 같은 음서의 혜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점에서만 본다면 고려시대의 음서는 특별한 경우에 간헐적으로 제수된 非常例의 특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112)許興植, 앞의 책, 210∼212쪽. 이 규정에 나타난 음서는 앞서 정의한 바와 같이 문음과 공음 중 공음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공음은 공신 자손이거나 특수한 공훈을 세운 관리의 자손에게 주었던 음서였던 만큼 그 음서의 성격상 특수한 경우를 당하여 부정기적으로 시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문음은 어떠한 시기에 실시되었던 것인가. 이에 대하여 명확한 규정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음서의 시행 시기에 대하여 현재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형편이다.1113)盧明鎬는 특사음서와 달리 일반음서는 소정의 자격 요건을 갖춘 자들을 대상으로 일정한 시험-논어·효경-을 거쳐 합격자에 한하여 世系를 참고하여 1년에 3·6·9·12월 4차례에 걸쳐 정기적으로 음서를 제수한 것으로 보았으나 朴龍雲은 위의 견해의 문제점을 지적한 뒤, 고려시대에는 常例, 즉 정기적으로 제수되는 음서(常例奏蔭)가 있었으며 그 시행 시기도 정기 인사가 단행되는 12월 무렵으로 파악하였다(朴龍雲, 앞의 책, 98∼101쪽). 그러나 실제의 사례를 조사해 본 결과 음서는 연중 어느 달이나 제수된 것으로 나타나므로 고려시대의 음서는 어느 때나 시행될 수 있는 恒例的인 제도였다고 보여진다.1114)金龍善, 앞의 책, 42∼43쪽.

 고려의 과거제도의 경우 특히 제일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製述科의 시험도 고려 전기의 경우를 살펴 보면 주로 3·4·5월에 많이 시행되기는 하지만, 이외에도 2월·6월·7월·8월·9월에도 가끔 시행되었으며 10월에도 시행된 적이 있다.1115)朴龍雲,<高麗時代의 科擧-製述科의 運營>(앞의 책, 302∼557쪽)에는<科試 設行과 製述科 及第者>라는 資料가 첨부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고려시대의 제술과가 시행된 사례들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 자료의 번호 1에서 129까지의 고려 전기 科試 시행 시기를 조사한 결과에 의거하였다. 즉 과거의 시험조차 반드시 정기적인 시기에 시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시험의 급제자들도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일정한 시기에 관리로 서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2월∼5월 사이의 봄에 급제한 급제자들에게 초직을 주는 시기가 정기인사가 있는 12월로 보게 되면 너무 늦춰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서, 문음과 같은 일반적인 음서가 정기적인 시기에 시행되었다고 보는 문제는 앞으로 좀더 여러 각도에서 검토해 보아야 하리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음서의 제수에 있어서도 일정한 시험이 부과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 문제도 역시 재고의 여지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講五經中一 四書中一”1116)≪經國大典≫권 1, 吏典 取才 蔭子弟.이라는 시험 절차를 통한 뒤에야 음서의 제수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일반 관리의 자손 뿐만이 아니라 공신 자손도 모두 이 蔭取才의 시험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1117)金龍善, 앞의 책, 200∼201쪽. 그러나 고려의 경우 음서 시행을 위한 시험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또 「특사음서」나 「공신자손 음서」와 같은 공음의 경우 시험이라는 절차와 관계없이 바로 관직에 「直補」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일반음서 즉 문음과 같은 경우에도 그러한 절차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여겨진다. 따라서 고려시대 음서는 조건을 갖추기만 하면 누구나 관직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조선시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쉬운 입사로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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