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3. 음서제
  • 4) 음서제도의 운영
  • (3) 탁음자의 관품

(3) 탁음자의 관품

 음서의 혜택을 자손들에게 주기 위하여 고려의 관리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 즉 탁음자의 관품과 관직은≪高麗史≫선거지 음서조의 기사에 규정되어 있다. 이 규정 중 주요한 것은 앞에서<표 3>으로 인용한 바 있는데, 이에 의하면 5품 이상의 관리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규정은 고려 전기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이 시기에는 일단 5품 이상의 관리가 되면 그 자손에게 음서의 혜택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앞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그 자손들은 어린 나이에 유리한 관직을 받아서 관리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규정이 공정하게 시행되었다면 5품에서 1품까지의 각 관품에 걸쳐서 탁음자의 분포가 비슷하게 나타나거나, 아니면 1∼2품의 관직보다는 4∼5품의 하위관품에 있을 때 그의 자손에게 음서의 혜택을 줄 탁음자가 더 많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 시행된 사례를 보면 2품 이상의 고위관리가 된 이후에 탁음자가 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사망한 다음에 탁음자가 된 관리도 상당수 보인다. 즉 음서에서 가장 유리하였던 父蔭의 경우 그 탁음 때의 관직이 규정된 관품보다 훨씬 높게 나타나며,1125)조사된 15인의 父蔭 托蔭者 가운데 2품 이상 관리가 10인, 3품 3인, 4품 2인으로 나타난다. 이 중에서 사망자는 2인, 미상 3인, 생존자 10인이다(金龍善, 앞의 책, 60쪽). 祖蔭과 같은 경우에는 생존했을 때보다 죽은 뒤 탁음자가 된 사례가 더 많다는 사실1126)祖蔭의 사례 17인 가운데 당시 생존자 5인, 사망자 9인, 불명 3인으로 나타난다(金龍善, 앞의 책, 90∼91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관리들은 5품 이상의 직위를 가짐으로써 자손에게 음서의 혜택을 줄 수 있는 제도적 권리를 확보하게 되었지만 그 권리를 즉시 사용하지 않고 유보해 두었다가 그 후 필요하게 될 때 그 권리를 행사하였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컨대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윤승해의 경우 그는 과거의 급제에 실제한 뒤에야 음서를 통하여 관리가 되었다. 그리고 병약하다는 이유로 과거 응시 대신에 음서로 입사할 것을 부친으로부터 강요당한 李頲이나,1127)<李頲墓誌銘>(≪朝鮮金石總覽≫上), 280쪽. 집이 가난하여 과거에 의한 진출이 어렵게 된 이후에 비로소 음서 입사를 택한 許載 등의 경우1128)<許載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107쪽.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에, 음서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하여 모두가 강제적이고 의무적으로 택해야 하는 입사로가 아니라 탁음과 또는 수음자가 필요할 때,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입사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 자손들은 확보된 음서의 권리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때로는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고려시대 관리의 자손들은 음서의 종류가 다양했던 만큼이나 광범위한 음서의 기회를 가지고 있었겠지만,1129)盧明鎬, 앞의 책, 390∼402쪽. 그에 비례하여 음서의 제수도 실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는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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