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1. 전시과 제도
  • 1) 건국 직후의 토지지배관계와 역분전의 설치
  • (2) 식읍과 녹읍

(2) 식읍과 녹읍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가 구체적이고 일정한 원칙을 세워 관료를 비롯한 여러 臣民에게 토지=수조지를 지급하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경종 원년(976)의 始定田柴科에서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민에게 수조지를 지급하는 전통은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삼국시대 이래의 유습이었다. 소위 食邑·祿邑으로 불리는 토지의 분급이 그것으로, 이들 토지는 고려 건국 직후까지도 존재하였다. 따라서 전시과 체제의 체계적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 이들 토지의 성격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제도적으로 周代의 봉건제도 하에서 왕족과 공신에게 나누어 주던 封土에,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고구려와 부여에서 諸加가 下戶를 지배하던 방식에 기원을 두고 있는 식읍의 존재는0009)이에 대해서는 李景植,<古代·中世의 食邑制의 構造와 展開>(≪孫寶基博士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1988) 참조. 고려의 건국에서 후삼국 통일에 이르는 시기에도 찾아지고 있다. 건국 직후부터 그 존재가 확인되는 東宮食邑과,0010)≪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6월 을축. 태조 18년에 후백제의 甄萱과 신라의 金傅에게 지급한 楊州와 慶州의 식읍이0011)≪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8년 6월·12월.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우선 왕자를 비롯한 왕족과 공신이 식읍의 지급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다른 왕족과 공신들에게도 식읍이 분급되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더 이상의 사례는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공신의 경우에는 견훤과 김부에 상당하는 여타의 인물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王順式과 같은 大豪族과 洪儒·裵玄慶 등의 開國一等功臣에게서도 그러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앞으로 설명하는 바와 같이 당시 이들에게는 주로 녹읍이 지급되었던 것으로 판단되므로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결국 건국 직후에 공신에게 준 식읍은 견훤과 김부의 사례 뿐이었다고 믿어진다.0012)洪承基,<高麗初期의 祿邑과 勳田>(≪史叢≫21·22, 高麗大史學會, 1977).
朴春植,<羅末麗初의 食邑에 대한 一考察>(≪史叢≫32, 1987).

그런데 이처럼 왕족과 공신들에게 식읍을 지급한 것은 그들을 왕실의 藩屛으로 삼고 그 위치를 공고히 함으로써 왕업을 융성케 하고 왕실의 번창을 도모하고자 하는 명분에서였다. 물론 공신 식읍의 경우는 그들의 공훈을 포상한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족에 대한 것이든 공신에 대한 것이든 간에 식읍의 수여는 왕의 私恩이 아니라 공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식읍은 1丁에서 3丁으로 구성되는 課戶를 단위로 분급되었으며, 이에 따라 식읍의 크기는 자연히 封戶의 수로 정해졌다고 이해된다.0013)李景植, 앞의 글. 물론 견훤과 김부에게 주어진 식읍에서 보듯이 지역을 단위로 분급된 듯한 식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역시 戶를 단위로 지급되었다고 생각된다. 김부의 경주 식읍이 그 좋은 실례이다.≪高麗史節要≫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김부는 “食邑 8천 호에 봉해지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다”고 하는데,0014)≪高麗史節要≫권 1, 태조 18년 12월. 여기서 김부가 받은 식읍의 실상은 봉호 8천 호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경주라는 지역은 8천의 봉호가 거주하는 지역을 나타낼 뿐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김부의 식읍은 경주의 일부, 다시 말해 경주에 거주하는 人丁의 일부였다. 이것은 경종이 즉위하여 기존의 봉호 8천에다 2천 호를 가급하여 총 1만 호로 만들어 준 사실에서0015)≪高麗史≫권 2, 世家 2, 경종 즉위년 10월 갑자. 확인된다. 만일 태조때 받은 식읍 8천 호가 경주 전체였다면 이와 같은 가급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견훤의 양주 식읍도 그 실상은 아마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식읍은 그것이 설정된 지역의 일부였다. 따라서 식읍은 자연히 국가의 행정체계 내에서 존재하였고, 또 운영되었다고 하겠다.

한편 식읍, 특히 공신에게 주어지는 식읍은 대체로 수급자와 어떤 연고를 지니고 있는 지역에 설정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김부와 경주의 관계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며, 견훤과 양주도 비록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즉 양주를 견훤의 식읍으로 정한 것은 후백제가 백제의 정통을 이었으며, 양주(지금의 서울)가 곧 백제의 초기 도읍지였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0016)朴春植, 앞의 글. 이는 삼국시대에 지급된 식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식읍제의 한 특징이었다. 예컨대 금관가야의 왕 金仇亥가 받은 식읍은 본국인 金海였으며, 고구려의 戰功者들이 받은 것은 그들이 외적을 격퇴한 지역이었다.0017)≪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법흥왕 19년·권 16, 高句麗本紀 4, 신대왕 8년 11월·권 17, 高句麗本紀 5, 봉상왕 2년 8월. 또 원성왕 때 金周元에게 주어진 식읍 溟州와 인근 지방은 그가 퇴거하여 세력을 뻗치고 있던 지역이었다.0018)≪新增東國輿地勝覽≫권 44, 江陵大都護府 人物.

앞서 말한대로 식읍은 人丁을 기초로 한 戶를 단위로 분급되었으므로, 그 곳에 대한 食邑主의 지배는 당연히 인정을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식읍주는 식읍민으로부터 조세는 물론 공부와 역역까지를 수취할 수 있었다. 祿轉과 稅布·徭貢 등을 직접 수납하였다고 생각되는 崔怡의 晋州 食邑이0019)≪高麗史節要≫권 16, 고종 37년 정월. 이를 잘 말해 준다. 여기서 식읍에서의 부세는 식읍주에 의해 직접 수취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식읍주는 家臣을 파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충선왕이 자신의 三食邑에 郎將을 파견하여 부세의 수취를 독려하였던 일이0020)≪高麗史≫권 34, 世家 34, 충선왕 3년 8월 경오. 주목된다. 물론 이들은 모두 고려 중·후기의 사례이지만 고려 초 식읍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식읍의 봉호는 토지·인력 및 기타 재산 등을 고려하여 국가가 선정하였는데, 조세·공부와 역역을 감당할 수 있는 비교적 안정된 平民戶가 중심을 이루었다고 여겨진다. 즉 빈한한 家戶는 물론이고, 토호나 양반관료 등의 지배층 가호는 배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식읍지배의 권리는 원칙적으로 당대에 한하여 인정되었다. 즉 상속은 허용되지 않았다.0021)河炫綱,<高麗食邑考>(≪歷史學報≫26, 1965).
李景植, 앞의 글.

이렇게 볼 때 식읍으로 분급된 지역의 토지가 식읍주의 사유지일 수 없음은 자명하다. 따라서 식읍의 토지는 주로 봉호의 민전으로서 식읍주의 수조지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左倉이 실수로 최이의 진주 식읍에서 田租를 거두었던 사례와,0022)≪高麗史節要≫권 16, 고종 30년 5월. 왕실의 三倉邑이 설정되면서 백관의 녹봉이 부족해졌다고 하는 李齊賢의 주장에서도0023)≪高麗史節要≫권 25, 충혜왕 후 5년 5월.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이와 같이 식읍 토지의 본질은 수조지였다. 그러므로 식읍주의 사망 등으로 인해 식읍이 해제되면 봉호는 당연히 조세·공부·역역 등을 국가에 바치는 일반 民으로 재편되며, 그 토지는 국가 수조지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식읍은 단순한 수조지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시과 체제 하의 다른 토지와는 달리 토지만이 아니라 인정에 대한 지배, 즉 전조·공부·역역의 수취를 모두 인정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식읍주가 식읍에서 얻는 수입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권리와 부를 바탕으로 그들은 田地를 買得하거나 新田을 개발하여 소유지의 규모를 확대할 수 있었고, 다량의 노비도 확보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그 본질은 수조지였지만, 식읍은 단순한 수조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토지와 인정에 대한 수급자의 지배력이 강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식읍주가 그 곳에서의 통치권 전체를 영속적으로 장악하는 私領地나 直領地라고는 할 수 없다. 앞에서도 설명하였지만 식읍은 국가의 행정체계 안에 존재하였으며, 상속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 건국에서 후삼국의 통일에 이르는 시기에는 식읍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몇 가지 특징을 달리하는 녹읍이 있었는데, 그 기원이 신라의 녹읍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신라의 녹읍이 모든 관료를 대상으로 지급되었음에 비하여,0024)“下敎 罷內外官祿邑 逐年賜租有差”(≪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9년)와 “除內外群官月俸 復賜祿邑”(≪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경덕왕 16년)의 녹읍혁파 및 부활 기사가 이를 잘 말해 준다. 통일신라 때의 녹읍제에 대해서는 姜晋哲,<新羅의 祿邑에 대하여>(≪李弘稙博士回甲紀念 韓國史學論叢≫, 1969) 참조. 이 시기의 녹읍은 주로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王建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한 지방의 크고 작은 호족에게 지급되었다. 견훤 휘하의 高思葛伊 성주로 있다가 고려로 귀부한 興達과 그의 세 아들이 靑州祿 및 珍州祿·寒水祿·長淺祿 등을 받은 일이나,0025)≪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 附 興達. 燕山 昧谷의 장군으로 견훤의 심복이 되었다가 태조에게 귀순한 龔直이 大相의 官階와 함께 白城郡祿을 지급받은 것0026)≪高麗史≫권 92, 列傳 5, 龔直. 등이 그 좋은 실례이다. 또 碧珍郡(星州)에 웅거하던 李悤言이 태조에게 歸款함으로써 本邑(벽진군)의 장군으로 제배되고 이웃 고을의 丁戶 229를 추가로 하사받은 것도0027)≪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 附 李悤言. 녹읍 지급의 사례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려 초기의 구체적인 녹읍 지급의 실례는 이 정도이지만 실제로는 보다 많은 사례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수많은 지방의 대소 호족들이 고려에 귀순해 왔었는데 오직 위의 몇몇 경우에만 녹읍을 주고 다른 호족들에게는 지급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방호족, 즉 귀순 성주들만이 녹읍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태조 17년(934)에 禮山鎭 행차 때에 왕이 내린 조서에서 ‘王親權勢之家’와 ‘公卿將相’에게 녹읍이 주어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는데,0028)≪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7년 5월 을사. 귀순 호족만이 이들의 범주에 속한다고는 할 수 없다. 여기서의 ‘왕친’은 태조와 일정한 혈연관계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공경장상’과 ‘권세지가’에는 귀순 성주뿐 아니라 개국공신으로 대표되는 태조의 막료들도 마땅히 포함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0029)洪承基, 앞의 글. 따라서 고려 초기의 녹읍은 일단 공경장상이나 권세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관계를 가진 귀순 성주와0030)당시 태조에게 귀부한 대부분의 지방호족들은 官階, 그것도 주로 元尹 이상의 高位 官階를 받았다고 한다(武田幸男,<高麗初期の官階>,≪朝鮮學報≫41, 1966). 왕친·개국공신들에게 지급되었다고 하겠다. 물론 이의 시원으로서 통일신라 시기의 녹읍제에 비추어 볼 때 하위의 관계를 지닌 관료에게도 녹읍이 주어졌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고려 초의 녹읍은 후삼국의 통일과 함께 사라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라와는 사정이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이 시기의 녹읍이 관료 일반에 대한 보수로 주어진 것이었다면 통일 후 그렇게 빨리 소멸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 초의 녹읍은 개국 직후의 특수한 환경에서 高勳者나 지방호족들을 회유하여 통일의 과업에 적극 협력토록 할 목적으로 신라의 제도를 원용하여 시행한 이례적인 시책이었다고 생각된다.

흥달과 그의 아들 및 공직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녹읍은 주로 면적이 아닌 현 또는 군 규모의 지역을 단위로 지급되었는데, 그 지역이 반드시 수급자와 어떤 연고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흥달에게 주어진 靑州(淸州)가 그의 본거지인 高思葛伊(聞慶)와 가까운 거리라고는 할 수 없으며, 그의 아들에게 지급된 珍州(珍山)와 寒水·長淺(長湍)도 본거지인 문경과는 먼 거리에 있다. 또 공직이 받은 녹읍 白城郡(安城郡)도 본거지인 燕山 昧谷(懷仁)과 결코 가까운 곳은 아니다. 그런데 흥달과 공직이 청주와 백성군을 녹읍으로 받았다고 해서 그들의 세력 본거지에 대한 지배가 부정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高麗史≫의 흥달과 공직의 열전에 의하면, 이들은 귀부 후에도 본거지에 거주하면서 태조의 번병 역할을 수행하였으므로 고사갈이와 연산 매곡은 계속 그들의 지배 하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고려에 귀부한 이후 본거지에 대한 이들의 지배는 아마도 녹읍의 형태로 구현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흥달과 공직의 경우 일차 本邑을 녹읍으로 인정받은 위에 추가로 청주와 백성군을 분급받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총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즉 그가 본읍 장군에 제배된 것은 본읍을 녹읍의 형태로 지배할 수 있도록 인정한 것이며, 이웃 고을 丁戶 229를 加賜받았다는 것은 본읍 이외에 추가로 받은 녹읍이었다고 하겠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귀순 성주에게는 일차적으로 그들의 본거지가 녹읍으로 지급되고, 흥달과 공직의 사례에서와 같이 별도의 녹읍이 추가로 주어지기도 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0031)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高麗大出版部, 1980), 23쪽
이와는 달리 歸順豪族에게 지급된 녹읍은 그들의 본거지와 별로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洪承基, 앞의 글).
그러나 왕친과 개국공신에게 지급된 녹읍이 수급자와 어떤 지역적 연고를 지니고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녹읍의 지급이 해당 지역의 토지 자체, 즉 소유권의 이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당시에는 이미 토지사유제에 기초한 民의 사유지가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었으므로 특정인에게 녹읍으로 지급된 지역의 토지 역시 대부분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민의 사유지였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만일 녹읍의 지급을 소유권의 이양이었다고 한다면 그 지역에는 민의 사유지가 전혀 없었다고 해야 하는데, 토지사유제를 인정하는 한 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녹읍은 일단 수조권, 결국 수조지의 분급이었다고 이해된다. 그렇다고 녹읍의 지배가 단순히 조세(田租)의 수취에만 국한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흥달의 사례가 주목된다. 당시 흥달에게는 청주록과 함께 ‘田宅’이 주어졌는데,0032)≪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 附 興達. 이「田」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단순한 수조지로 이해된다. 이렇게 단순한 수조지와 함께 수여된 녹읍이 그것과 성격을 달리하였을 것은 당연하며, 이 같은 사실은 결국 녹읍이 수조권 이상의 지배력을 지닌 실체였음을 의미한다고 믿어진다.

녹읍의 이러한 성격은 권세가와 공경장상 등의 녹읍주에게 행한 다음과 같은 태조의 훈시에서도 엿볼 수 있다.

5월 을사일에 禮山鎭에 행차하여 조칙을 내려, … 왕의 친족(王親)이나 권세가들이 방자·횡포하고 약한 자를 억눌러서 나의 백성들을 괴롭게 함이 어찌 없다고 하겠는가. … 너희들 公卿將相으로 祿을 먹는 사람들은 마땅히 내가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는 뜻을 헤아려 너희 祿邑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다. 만약 家臣의 무지한 무리들을 녹읍에 보내면 오로지 聚斂에만 힘쓰니 마음대로 빼앗아간들 너희들이 또 어찌 알겠으며, 비록 그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또한 금지하지 않고, 백성 중에 論訴하는 자가 있어도 관리들이 私情에 끌려 이를 숨기고 비호하고 있으니 원망과 비방이 일어나는 것은 주로 이에 연유하고 있다…(≪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7년 5월).

이것은 녹읍 지배의 실상을 어렴풋이나마 알려 주는 유일한 기사인데, 녹읍주의 가신이 “오로지 취렴에만 힘쓴다”느니 “마음대로 빼앗아 간다”느니 하는 표현 등은 당시 녹읍에 대한 지배권이 수조권 이상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0033)金哲埈,<新羅 貴族勢力의 基盤>(≪人文科學≫7, 1962). 이처럼 녹읍에 대한 지배권이 수조권 이상이었다면 그것은 조세 뿐만 아니라 공부와 역역의 수취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0034)姜晋哲, 앞의 책.
이와는 달리 녹읍 지배의 내용을 제한된 액수의 조세(전조)만을 거두어 가는 것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洪承基, 앞의 글).
이렇게 볼 때 녹읍의 지배는 단순한 수조권적 토지지배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토지, 즉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는 人丁에 대한 지배라는 성격을 짙게 띠고 있었다고 하겠다.0035)姜晋哲, 앞의 책, 13쪽. 한편 위 태조의 훈시를 통해 녹읍에서의 수취는 녹읍주에 의해 직접 이루어졌고, 이를 위해 그 곳에는 녹읍주의 가신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고려 초기의 녹읍은 지배의 내용과 성격에 있어서 식읍과 매우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조세는 물론 공부와 역역도 수취할 수 있었으므로 녹읍은 수급자들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귀순 성주의 본거지에 설정된 녹읍은 그들의 군사적 기반으로도 활용되었다. 당대 최대의 호족으로 여겨지는 왕순식은 물론이고 흥달과 공직·이총언 등도 자신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녹읍이 이의 유지에 필요한 인적·물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리라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결국 귀순 성주들은 녹읍에 대한 지배를 통해 반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호족들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야 할 태조에게 있어서 이러한 녹읍은 점차 축소 내지 폐지해야 할 대상이었다. 후삼국 통일이 달성된 이후 전공이 있는 자들에게 대규모의 토지(수조지)를 사급하면서도0036)통일 직후 朴英規에게 1,000頃의 토지를 사급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高麗史≫권 92, 列傳 5, 朴英規). 녹읍을 지급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후삼국이 통일된 이후로 녹읍의 분급은 중단되었고, 기왕에 지급된 녹읍도 단순한 수조지의 사급(賜田)으로 대체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다름 아닌 태조 23년(940)에 실시된 役分田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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