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1. 전시과 제도
  • 1) 건국 직후의 토지지배관계와 역분전의 설치
  • (3) 토지(수조지) 사급과 역분전의 설치

(3) 토지(수조지) 사급과 역분전의 설치

고려 건국 직후에 조세 및 공부·역역을 수취할 수 있는 식읍과 녹읍만이 지급되었던 것은 아니다. 조세의 수취만을 인정한 단순한 수조지의 분급도 함께 행해졌다. 흔히 면적 단위로 분급되거나, 단순히 ‘田 또는 田宅’의 사급으로 표현된 토지의 실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토지를 지급받는 계층은 매우 다양하였다. 우선 귀순성주 계열의 인물들이 그러한 토지의 사급 대상이었다. 흥달에게 청주록과 아울러 전택이 사급되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고, 溟州의 대호족인 왕순식에게도 전택이 지급되었으며, 후백제의 장군으로 활약하다 귀순한 朴英規에게는 田 1,000頃이 주어졌다.0037)≪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朴英規. 다음으로 개국공신으로 대표되는 태조의 막료들도 사급의 대상이었다. 개국 일등공신인 卜智謙과 申崇謙이 각각 沔川과 平州의 토지 3백결을 받았던 일이나,0038)≪新增東國輿地勝覽≫권 19, 忠淸道 沔川郡 人物·권 41, 黃海道 平山都護府 人物. 林椿의 선조가 태조를 도와 큰 공을 세우고 丹書鐵券으로 보증된 土田을 하사받은 것0039)林椿,≪西河集≫권 4, 書簡, 上刑部李侍郎書. 등이 이러한 사례를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녹읍의 주된 수급자이기도 한 이들 귀순성주와 개국공신, 즉 고위 관계의 소유자만이 이러한 토지(수조지)를 사급받은 것은 아니었다. 낮은 관계를 지닌 하위 관리들도 이의 사급 대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김부가 귀순할 때 함께 와 고려의 관리로 서용된 인물들이 ‘田祿’을 받은 사실과,0040)≪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8년 12월 임신. 발해의 왕자 大光顯을 따라온 僚佐들이 官爵 및 전택을 받은 일0041)≪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7년 7월. 등이 주목된다. 즉 김부와 대광현을 수종한 인물들은 대부분 고려의 하위 관리로 편입되었다고 판단되는데, 이들이 토지를 받게 된 것은 귀순이라는 사유 때문이 아니라 관리가 되었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토지의 사급이 관리에 대한 일반적인 처우방식이었기 때문이라고 이해된다.0042)洪承基, 앞의 글. 따라서 토지의 지급은 이 시기의 관료를 대우하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대표적인 방식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 지급과 관련된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 예컨대 지급의 원칙이나 기준이 어떠하였는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나름대로 일정한 원칙과 기준이 마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한편 이렇게 사급된 토지의 실체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식읍이나 녹읍과는 다른 단순한 수조지였다. 즉 조세(田租)의 수취만이 허용된 토지였다. 앞서 소개한 바 있지만 “신숭겸에게 평주의 토지 300결을 하사하여 대대로 그 租를 먹도록 하였다(世食其租)”는 내용의≪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사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신숭겸이 받은 300결의 토지는 후대의 공신전과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 하겠는데,0043)≪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申崇謙이 이 토지를 받게 된 계기를 태조와 함께 수렵할 때 기러기를 쏘아 떨어뜨렸던 일로 기술하였으나 이는 그야말로 諺傳이며, 개국의 공으로 300頃(結)의 토지를 받았던 卜智謙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실제로는 태조를 추대하여 고려를 개국한 공훈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洪儒·裵玄慶·卜智謙과 함께 개국 일등 공신이었다(≪高麗史≫권 92, 列傳 5, 洪儒). 이 토지에 대한 수급자 신숭겸의 지배권은 ‘世食其租’, 즉 대대로 전조만을 수취할 수 있는 권리 뿐이었다. 아울러 ‘世食其租’의 구절은 그 토지의 분급이 소유권의 이양과는 무관하다는 점도 시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때의 분급으로 인해 그 토지가 신숭겸의 사유지가 된 것은 아니었다. 위에서 열거한 다른 토지의 실체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의 건국에서 후삼국 통일에 이르는 시기의 토지 분급의 실상은 대체로 이상과 같았다. 관리에 대해서는 관계의 고하에 상관없이 수조지가 사급되었고, 이 밖의 귀순성주와 개국공신 등 고위 관계를 소유한 인물들에게는 녹읍이 추가로 주어졌으며, 국왕의 신분으로 귀부한 견훤과 김부에게는 극히 예외적으로 식읍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통일을 완성한 태조의 입장에서 일정 지역에서의 人丁의 지배까지를 인정하는 녹읍을 더 이상 존속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후삼국 통일 이후에 녹읍이 분급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통일전쟁에서 공을 세운 인물에 대한 논공행상을 외면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제까지 녹읍제와 병행하였던 수조지 급여의 방식을 재정비하여 활용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것은 결국 역분전의 설치로 이어졌다.

역분전의 지급규정은 태조 23년에 마련되었는데,≪高麗史≫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0044)≪高麗史≫권 92, 列傳 5, 朴守卿.

처음으로 役分田을 정하였는데, 통합 때의 朝臣과 軍士들에게 官階는 논하지 않고 그들 性行의 선악과 공로의 대소를 보아 차등있게 지급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여기에서 역분전의 지급대상은 통일전쟁에 참여한 조신과 군사이며, 지급기준은 官階가 아닌 性行의 선악과 공로의 대소에 두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행의 선악은 새 왕조에 대한 충성도를 뜻하고, 공로는 곧 통일전쟁에서의 공훈을 가리킨다. 따라서 역분전은 일단 논공행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관계를 가진 조신을 그 분급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후일 전시과 제도의 선구를 이루었다는 점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분명한 기록이 없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의 실시를 계기로 기왕의 녹읍도 폐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역분전의 분급과 관련된 보다 구체적인 내용, 즉 어떠한 구분에 의해 어느 정도의 토지가 분급되었는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통일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朴守卿에게 특별히 사급하였다고 하는 역분전이 200결이었다는 사실을44) 고려할 때 최대 200결 이상은 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金載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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